중도에 포기했던 이유
선거운동본부가 당선되고 난 뒤, 총학생회의 책임자를 맡아야 했다. 선거운동본부장이었으므로 집행위원장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그런데 내가 하기 어려울것 같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마음이 여리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일만오천 학우의 총학생회를 운영해야하는, 사람을 챙기고 일도 챙겨야 하는 집행위원장의 역할은 정말 중차대한 일이다. 쉽게 말하면 총학생회장, 부총학생회장, 그 다음이 집행위원장이니까 조직의 3인자쯤 된다. 그런데 마음이 여리고 금세 흔들리게 되면 아무래도 믿음직하지 못하다 보니 말린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나를 믿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나를 응원해주는 사람에게 힘을 얻어 집행위원장을 맡았다. 결과는? 중도포기였다. 내가 죽기 전에 여길 나가야한다고 생각했으니까.
대체 왜 그런 일이 발생한 걸까? 호기롭게 시작했던 나는 왜 온갖 상처를 받고 도망쳐나와야 했을까?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다.
첫째는, 내가 3인자로서의 직책을 수행하기 전에 4인자인 국장 정도의 실무능력조차 없었다는 점이다. 나는 "선택에 한계는 없다"는 말을 믿었지만, "지금의 역량은 그 선택이 요구하는 수준에 크게 못미친다"는 말은 외면했었다. 집행위원장은 책임리더의 위치이다. 그러나 나는 그 전년도에 학생회장을 한 뒤 실무진 역할을 해보지 않고 바로 집행위원장이 된 거여서, 직책리더인 국장보다도 일을 못했다. 국장들이 힘들어할 때 내가 도와줄 수 없었다. 실제 일을 도와주지 못하는 사람에게 마음을 맡길 수 있을리가 없다. 만약 내가 국장부터 했다면 그나마 괜찮았을텐데, 알량한 자존심에 할 수 있을거라고 되뇌면서 시작했었다. 그 기간동안의 나는 스스로를 자꾸만 갉아먹었다. 우울의 늪에 빠지고 억지로 일어서고 다시 죽고싶어지기를 반복하는 1년이었다.
이후에 내 역할에 대한 문제제기가 들어오면서, 나는 빵꾸가 났던 한 국의 국장과 집행위원장을 동시에 하게됐다. 사수도 없었지만, 주변에서 자료를 긁어모으면서 바닥부터 시작했다. 기획서 작성하는 법, 세부 프로세스 짜는 법, 그에 따라 차근차근 이행하는 법, 마감기한을 설정하고 그 안에 팀원이나 타 국장, 소통하는 타 단체의 팀장과 소통하는 법을 배웠다. 난생 처음 하는 일이기에 혼자 하기는 버거웠지만, 도와준 사람들이 있었기에 그나마 꾸역꾸역 나아갈 수 있었다.
둘째는, 조직은 일만 잘해서는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이 모인 곳에서는 갈등이 불거지고, 이것을 잘 풀어내지 못하면 함께 의기투합했던 과거는 저멀리 스러진다. 그리고 집행위원장의 역할에는 그 관계와 조직을 융합시키는 것도 있었다. 차라리 국장으로 일할 땐 마음이 편했다. 일만 하면 되니까. 열심히 노력하고 조언을 구하면서 일에 대한 부분에서는 실력이 늘었지만, 사람 문제는 그렇지 못했다.
내가 모두 책임질 수 있는 일도 아니었고, 그럴 역량도 없었다. 그런데 직책과 이 선거를 시작한 사람이라는 옛날옛적의 책임감 탓에 두고 볼 수도 없었다. 책임감은 막중한데, 그걸 이행할 능력이 없는 상황이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곪아갔다.
마지막으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나는 위의 두가지 이유가 나의 거대한 결점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너무 과도한 압박감을 짊어졌고, 스스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능력조차 없었다. 그러니 에너지가 고갈될 수 밖에 없었다.
사실 아무리 혼자 뼈를 갈아 노력해도 상황이 열악하면 성장할 수 있는 양은 한계가 있다. 사수가 없고, 서로 돕는 조직문화가 없고, 인수인계 자료도 없고, 내가 챙겨야하는 국장급이 2명이었고, 부총학생회장이 부재다시피 해 그 역할도 해야하고, 전체적으로 이루어져야하는 공약이 130개이며, 몇백명이 참여하는 행사를 서너개씩 해야했던 상황이라면 누구나 그랬을 것이다.
그 모든 걸 내가 책임진다? 불가능하다. 나의 에너지도 한계가 있고, 조직의 역량에도 한계가 있다. 책임은 권한에 비례한다. 나는 이 선거의 시작에 있었지만, 나의 권한은 3인자이므로 1,2인자보다 더 권한도 책임도 높지 않다. 모든 잘못된 결과를 전부 내 탓으로 돌린다는 건 부당한 일이다. 그러나 그 부당한 일을 내 스스로 내게 가하고 있었다.
어쨌든 임기 마무리를 세 달 남긴 시점에 나는 탈주닌자가 되었다. 너무 미안해서 총학생회실 근처에도 못갔다. 내가 얼마나 힘들었든, 같이 고통받고 있는 동료들에게 나의 짐을 떠넘기고 도망친거였으니까. 나만큼이나 힘들텐데 버티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까지 누구도 내게 뭐라고 하지는 않았다. 아마 너무 고통스러워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좋은 사람들이라 그럴 수도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내가 이런 상황을 다시는 반복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2년간 수없이 반추했다.
총학생회를 그만두기 1년 전. 함께 학교에서 활동을 하던 선배가 내게 "선거를 해보자"고 했었다. 나는 제가요? 갑자기요? 누구랑요? 어떻게요? 하고 두 눈 가득 당혹감과 물음표를 담은 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뭔가 해보고 싶었던 마음은 있었기에 결국 선거운동본부장을 수락했다. 그때부터 후보와 부후보, 선본의 각 팀장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 선택이 내가 가지고 있던 과도한 책임감의 근원이었다.
하지만 선거운동본부 결성부터 선거운동과 당선을 지나 총학생회의 1년까지. 나 혼자 했던 일이 아니다. 도와준 사람들, 힘써준 사람들이 있었다. 동시에 나는 외면하고 있었지만, 이 상황을 만든 책임이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잡아다가 앉혀서 일을 시킬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억지로 기운을 내게 할 수도 없고, 도와준다고 해도 한계가 있고, 그런 선택을 했다는 데 내가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 단지 중요한 것은, 내가 그렇게나 힘들었던 원인 중에서 오롯이 나의 책임만 있던 건 아니라는 점이다. 나만 달랐다면 그런 상황이 오지 않았을까? 아니다. 나는 그것을 2년간 고통받다가 이제야 알았다.
그걸 몰라서 수없이 나를 탓했다. 내가 노력하지 않아서. 내가 그 사람을 너무 믿어서. 대책을 찾지 못해서. 내가 이런 조직문화를 못 만들어서. 내가 그 사람을 더 챙기지 못해서. 내가 사람을 설득하지 못해서. 하지만 그때 내 에너지는 한계가 있었다. 한계의 최대치까지 했는데, 더 하지 못했다고 나를 탓하는 건 나에게 너무 미안한 일이다. 게다가 믿을만한 사람이었는데 알고보니 내 곁을 떠나갈지, 해보지도 않고 어떻게 안단 말인가?
더이상 그 때의 나를 미워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고 나니 그 과정에서 얻었던 것들이 보였다. 실무능력의 바탕, 나를 성찰하는 일의 깊이, 진로에 대한 진지한 고민같은 것들 말이다. 즐거운 경험을 했고, 아직도 그 당시 총학생회 단톡방은 살아서 이런 저런 좋은 소식들을 전한다. 코로나가 좀 풀리고 나면 같이 모여서 술도 먹을 것 같다. 그러면 된 게 아닐까.
다시 앞을 본다. 여기서 얻어낸 자원들을 가지고, 나는 다시 새로운 선택을 한다. 조금은 가벼워진 마음으로, 새로운 자원들을 발굴해내고, 하고 싶은 것들을 찾아간다. 2년 전의 나보다 지금의 나는 조금 더 단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