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보미 Oct 18. 2021

공감능력이 너무 높았던 이유

그들에게서 나를 발견하곤 했다

마음이 많이 힘들었을 때, 나는 힘들어하는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크게 동요하곤 했다. 감정에 동화되고, 울고, 더 도와주지 못함에 힘들어했다.


학생회를 하다 보면 주변에 힘들어하는 아이들이 정말 많았다. 언제는 함께 술을 마시는데, 한 후배가 곪아왔던 상처가 터져 정신적으로 심각한 상태가 되었다. 친구들이 그 애를 케어해주러 갔고, 나는 학생회실로 돌아왔다. 어떻게 할 수 없던 일이 발생했고, 그 애가 겪는 어려움에 그 애의 책임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힘들어하는 건 그 애의 몫이었다. 그게 너무 슬프고 아팠다. 눈물이 줄줄 났다. 속이 너무 답답해서 동아리연습실의 샌드백을 치러 갔다. 내가 걱정되었는지 다른 후배가 따라나와 샌드백을 잡아주었다. 있는 힘껏 쳤더니 손등이 찢어져 피가 났다. 새벽 2시, 후배 말곤 아무도 없었던 동아리연습실에 드러누워 엉엉 울었다.


내가 그토록 힘들어하고 슬퍼했던 건 단순히 그 애에게 공감해서만은 아니다. 그 애의 이야기 속에, 거기에 내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내 책임도 아닌데, 힘들어하는 것밖에 할 수 없는 건 나였다. 그들의 이야기에서 버려졌던 나를 발견했던 거였다. 내가 돌봐주지 않았던 '나'들을. 결국 나는 나를 타인들에게 투사했던 것이다. 그건 나의 특기다.


투사란 개인의 태도나 특성에 대해 다른 사람에게 무의식적으로 원인을 돌리거나, 또는 자신의 감정, 태도를 다른 사람에게 전이시키는 심리현상을 말한다.

출처: 서울아산병원 알기쉬운의학용어


투사란 방어기제의 일종이다. 내가 그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타인이 내게 그 감정을 느끼고 있다고 생각해버리는 것이다. 나에게 그 감정이 너무나 버겁고, 내면의 힘이 그것을 인정하기에는 연약할 때 발생한다.


누군가를 속상하게 할까봐 힘들 때, 힘들어하는 사람을 보며 내가 너무 힘들 때, 엄격하게 굴어서 나를 불편하게 하는 사람을 만나기 싫을 때.


실은 그 사람이 속상하면 내가 속상한게 싫은 거였다. 힘들어하는 사람의 이야기 속에서 나의 아픔을 발견한거였다. 그 사람이 엄격한게 아니라 내가 그 사람의 말에 동의하면서도 반박하고 싶은데, 반박할 수가 없어서 불편한 거였다. 모든 상황이 그랬던 건 아니지만 분명히 그럴 때도 있었다. 다만 내가 몰랐을 뿐이다.


내가 유독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 마땅한 근거 없이, 몇 번의 경험으로 자기 생각이 옳다고 확신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재수없다. 누가 봐도 재수없겠지만 나는 유독 그런 사람을 미워한다. 그것 역시 투사다.


나에게도 그런 모습이 있다. 나는 욕심이 많았다. 잘하고 싶은 것도 많고, 내 생각이 흔들리는 것을 두려워했다. 내 신념이 너무 강해서, 그 신념이 곧 내가 되어버렸다. 그러니 신념을 흔드는 건 곧 나를 흔드는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런 나의 모습을 싫어하고 있었다. 그러니 누군가가 그렇게 행동할 때 유독 더 싫었던 것이다. 나와 관계있는 일이니까. 애초에, 그런 관계關係조차 없었더라면 그러거나 말거나 상관相關도 하지 않았을테니까.


내 감정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모두 투사해버리는 상황에 계속 처해있으면 궁지에 몰린 듯한 느낌이 든다. 내가 그 상황을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없게 된다. 나의 감정인데 타인의 감정인 줄 착각하므로 관계에서도 문제가 발생한다. 진실로부터 멀어지기 때문이다. 결국 오해로 점철된 관계가 되고 만다. 상황은 더더욱 안좋아진다.



나라는 존재의 선이 명확하게 그어지지 않았기에, 내 감정도 타인의 것으로 착각하고, 타인의 감정도 내것처럼 가져왔던 나날이었다. 그 모습도 내 것으로 받아안아 주지 않았기에 타인에게로 향했던 거였다. 그 이야기들 속에 버려진 '나'들은 울고 있었다. "받아들여줘, 이것도 너라고 인정해줘" 하고 슬퍼하고 있었다. 나를 싫어해봤자 득될 게 하나도 없다는 걸 깨달은 건 어느정도 마음이 회복이 되고 난 이후였다. 주섬주섬 그 애들을 주워모아, 한데 뭉쳐 만들어진 '나'를 다독거렸다.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그게 나인데 뭐 어때. 미워해도 괜찮아. 원망해도 괜찮아. 이해할 수 없어도 괜찮아. 너무 이해하려 들지 않아도 돼. 슬퍼해도 괜찮아. 그럴만한 일이야.


공감은 분명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건 자기를 파괴하라고 발휘되는 아니다. 나와 타인 간에 선이 그어져있지 않은  공감하게 된다면 그저 휩쓸릴 뿐이다. 선이 있어야 한다 감정을 자각하는 것부터가 시작이다. 저 사람이 날 미워하는 건지, 내가 저 사람이 미운 건지. 저 사람의 이야기가 슬픈 건지, 내가 아프고 힘들어서 슬퍼하는 건지. 저 사람이 나를 이해해주지 못하는 건지, 내가 저 사람을 이해하기 어려운 건지.


버겁지만 그 감정들도 받아들여 본다. 그것도 나라고. 그래도 괜찮다고. 그런 나도 사랑한다고. 물론 어렵다. 사랑스럽지가 않은데 어떻게 사랑하겠는가. 머리로는 모두가 안다. 그러나 마음은 다른 문제다.


그러나 내가 깨달았던 것처럼, 나를 싫어해봤자 득이 될 게 하나도 없다. 나와 24시간 숨쉬는 시간까지 붙어있는 사람이, 24시간 내내 나를 싫어한다고 생각해본다면 분명하다. 그건 괴로운 일이다. 숨쉬기도 어려운 일이다. 그러니 포기할 수는 없다. 지금 와서 알게된 나는 정말로 사랑스러우니까.



내가 어떻든 괜찮다고 전폭적으로 지지해주는 이가 24시간 함께하고 있는 건 정말로 다른 느낌이다. 몇 년간 수없는 노력을 통해 나를 받아들이면서 타인을 오해하는 일도 줄었다. 갈등도 자연히 줄었다. 내가 변하면 다른 사람들도 변한다. 놀랍게도.


물질적이고 객관적인 세상이 실재하기는 하겠지만, 사람마다 세계를 자각하는 방식은 다르다. 달리 말하면 사람마다 각각 다른 세상에서 살아간다.  사람의 일상은 그의 세계이고 세상이다. 내가 나로 존재하는 것은 나의 상이다.


나를 사랑한다는 문장은 쉽사리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러니 이렇게 생각해보곤 한다. 나의 세상만큼은 조금 더 따듯한 곳이었으면 한다. 거기에 24시간 상주하고 있는 나는, 나를 조금은 따듯하게 바라봐주었으면 좋겠다.


타인의 이야기  버려졌던 나의 이야기들.  애들을  속에서 찾아내 위로하고 보살펴주었다. 위로받은 아이들은 웃으며 내가 되었다. 그래서 이제는 울지 않게 되었다. 아니, 울되 무너지지 않게 되었다.

내게는 그애들이  힘이 있으니까.

버텨내고, 위로하고, 빛나게 서있을  있는 .


이전 05화 도전에 한계란 없을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