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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미 Oct 05. 2021

소심쟁이 아싸를 위하여

꿈을 꿨다. 고등학생으로 돌아간 꿈이었다. 대학을 다니다 다시 입학했는지, 아이들보다 나이가 많았다. 고등학생 땐 남자애랑 대화도 못했고, 부당한 일을 겪어도 떨었는데 꿈에선 아니었다. 어른이 된 나는 남자애들과 대화도 잘하고, 기세가 있어서 깔짝거리는 애들쯤은 제압할 수 있었다. 그게 먹혀서 애들도 나에게 모여들기 시작했다. 마음에 들었다. 왜 요즘 웹소설이나 웹툰에서 회귀가 유행하는지 알 것 같다.


눈을 떠보니 내 방이었다. 아, 내 무의식이 이제 그때의 나는 확실하게 뛰어넘었다고 생각했구나. 그러니까 꿈에서 돌아가도 완전히 다른 모습인 것일 테다. 이렇게 변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지난날이 떠올라, 조금 아련해졌다.





사춘기라 그랬겠지만 남자아이들과 단 한마디도 못하는 애였다. 물건을 건네줄 때 손이 잠깐이라도 닿으면 그게 누구라도 두근거렸다. 말도 못걸고 같이 놀지도 못했다. 누가 장난이라도 치면 과도하게 반응하곤 했다. 장난이 핑퐁이 안되니 남자인 친구가 없었다. 금사빠라서 좋아하는 애는 매년 생겼는데, 말을 못거니 항상 짝사랑이었다.


친구들과의 관계에선 항상 끌려다니는 애였다. 매년 친한 친구들이 생겼지만, 보통 자기 주장이 강한 친구들이었다. 내가 워낙 잘 맞춰주고, 싫은 말을 잘 못해서 상성이 잘 맞았던 것 같다. 그러다보니 속상했던 일도 많았다. 화장실에서 일을 보는 데 위에서 쳐다보는 장난을 친다든지, 그런데 속상해서 울기만 하고 말을 못했다든지. 키 크려고 먹은 한약 부작용으로 10kg가 쪘는데, 외모를 가지고 놀린다던지. 속상해도 내가 속상한지도 몰랐다.


때로 소위 '노는' 애들과 부딪칠 때도 있었다. 사실 부딪치는 것도 대등한 관계여야 할 수 있는 일이다. 소심쟁이는 그냥 쪼그라들었다. 어떤 '노는' 아이가 자리를 바꿔달라고 한 적이 있는데, 그게 싫었던 나는 지금 생각하면 얼토당토않은 핑계를 댔다. 다행히 그 애는 몇 번의 대화 후에 돌아갔지만, 무섭고 떨렸던 기억으로 남아있다. 내가 싫으면 그냥 싫다고 해도 되는건데, 당당하게 싫다고 할 용기가 없어서 이런 저런 말을 주워섬겼던 것 같다.


그런 나를 답답해하며 새롭게 친해졌던 친구가 있다. 내가 분명 상처받고 있는 것 같은데, 왜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건지 의아해했다. 그 친구는 외향성의 끝판왕이었다. 누구와도 3마디만 하면 친해지며, 남자애들과도 친해서 고백도 일주일에 한번씩 받았다. 물론 그애도 자기주장이 강한 편이라 내게 집착이 심했다. 다른 친구랑 못 놀게 하거나, 애인이 생겼을 때 애인보다 자기를 좋아해주길 바란다던지. 고3이라 공부하러 가고 싶은데 항상 데려다달라고 한다던지. 재미와 고통이 뒤섞였던 나날들이었다.



그런 내가 너무 싫었다. 나도 남자애들이랑 놀고 싶고, 거절도 잘 하고싶고, 연애도 막 하고싶고, 인싸이고 싶었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방법은 벤치마킹이었다. 나는 파워외향인 친구의 행동을 그대로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 친구도 나를 도와주겠다며 수많은 조언을 해주었다. 내 자존감을 올려준다고 예쁜 사진을 찍어주기도 하고, 내 얼굴을 하나하나 뜯어보며 어디가 예쁜지 말해주곤 했다.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때 목록은 대충 이랬다.


1) 그 친구처럼 무조건 먼저 말 걸기, 인사 먼저 하기
2) 자뻑하기 (누가 칭찬하면 나도 알아! 하기, 누가 장난이라도 비난하면 아니라고, 난 예쁘다고, 나는 내가 좋다고 하기, 양아치처럼 뻔뻔한 요구 하며 장난치기)
3) 쉴새없이 대화할 수 있도록 질문 목록 만들기
4) 무조건 도전하기, 나는 할 수 있다 속으로 외치기 (남자애한테 말 걸기)
5) 오디오 비지 않게 뭐라도 질문하기
...


지금 생각하면 정말로 피곤한 일이다. 그렇게 태어나질 않은 사람이 저렇게 노력한다는 건 24시간 다른 사람으로 산다는 거였다. 그때 메모에도 쓰여져있다. 너무 피곤하다고. 하지만 누군가 나를 외향적인 사람으로 봐주면 성공한건가?하고 기뻐하기도 했다. 지금 보면 좀 짠하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스스로가 싫어서. 싫은 걸 감추고 밝은 사람인 척 하고싶어서. 있는 그대로도 참 귀엽고 괜찮은 아이였는데도.


노력은 대학에 가서도 이어졌다. 대학 가면 예뻐진다고 했는데, 다행히도 내게는 그 말이 맞았다. 쌍수도 했고, 교정도 끝났고, 화장도 시작하니 학생 때보다는 훨씬 괜찮았다. 학과의 모든 행사를 참여하고, 주류인 아이들과 놀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잘 되진 않았다. 학과 행사를 갔다오면 공허하고 피곤했다. 당연하다. 내가 아닌 사람으로 몇 시간을 쉴새없이 떠드는 건 그런 일이다.



그러다가 좋은 동아리를 만났다. 그들은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었다. 점차 외향인인 척은 줄어들고 본연의 밝음이 돌아왔다. 나를 인정해주는 사람들 속에 있으니 적극적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그곳의 문화는 어떤 사람이든 함께 어울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 mt에서 조를 편성해도 조장과 따로 초심자를 챙길 선배를 넣었다.


밤에도 술게임을 하지 않고 '테마토크테이블'이라는 게임을 했다. 조장들이 연애, 덕질, 가족, 무서운 이야기 등의 주제 테이블에 사회자로 들어가 있고, 참여자는 원하는 주제 아무 곳에나 들어갈 수 있었다. 30분마다 테이블을 바꿀 수 있으니, 원하는 주제를 실컷 이야기할 수 있던 셈이다. 게다가 술도 강요가 아니었다. 이야기할 사람들을 찾고 싶었던 내게는 천국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아싸가 아니라 그냥 좋아하는 얘기를 재밌게 하는 사람이었다.


얼마나 기뻤는지, 나는 그 사람들을 위해, 그 동아리를 위해 나의 모든 것을 바칠 수 있었다. 그곳을 계기로 동아리 지부장도 하고, 단과대학 학생회장도 하고, 총학생회 집행위원장도 했다. 심지어 지금 시민단체에서 일하는 것도 그때의 영향이다. 그러니 한 사람의 인생에서 그를 알아주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편안한 사람들 속에서 '슈퍼새내기' '알파걸' 소리를 듣던 아이는 선거를 거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선거를 할 때는 그 사람이 누구던간에 스몰토크와 원하는 얘기를 유도하는 것은 필수적이었으니까. 그렇게 어렵게 학생회장이 되었으나, 막상 다른 학생회장들과의 관계는 어려웠다. 나는 다시, 아싸였다. 내게 맞는 사람과 맞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고, 애석하게도 학생회 인싸들은 나와 잘 맞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아싸에서 인싸로, 인싸에서 아싸로 변모하며 시간이 흘렀다. 과거에 나는 내가 무리의 중심에 있는지 아닌지에 대해 모든 관심을 집중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저런 집단을 겪어보니, 내가 아싸든 인싸든 그건 내 소관이 아니었다. 단지 나와 맞는 사람들이냐, 아니냐의 문제였을 뿐이다.


주류가 아닌 건 네 잘못이 아니야.
 너는 좋은 사람이야.
근 미래에 편안하고
좋은 사람들을 만나게 될거야.
그리고 행복해질거야.


대학교 포함 학교를 다닌지가 17년. 지금 내 곁에는 그간의 길에서 편안했던 사람들만 남았다. 주류였던 사람도 있고, 주류가 아니었던 사람도 있다. 절교했다가 다시 만나게 된 친구도 있고, 뜨문뜨문 연락하다가 최근에 다시 친해진 친구도 있다. 그 모든 순간에 주류였던 사람들은 내 주요 순위에 존재하지 않는다.


단체카톡방이 열댓개 되었던 때도 있고, 학생회장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알아주는 '인싸'였던 때도 있지만, 지금의 교우관계가 가장 편안하다. 결국 관계는 내가 편안해야 이어질 수 있는 거였다.


스스로 아싸라고 생각하고 주눅들고 있을 때는 아무 말도 들리지 않는다. 결국 내가 잘못된 것이고, 내가 변해야 하고, 내가 못나서 주류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래서 필사적인 노력을 하기도 한다. 돌아서서 보니 그때의 내가 짠하고 사랑스럽다. 이런 말을 해주고 싶다.


지금의 너는 모르지만, 너는 정말 좋은 사람이야. 가만히 있어도 사랑스러워서 사람들이 모여드는 존재야. 네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될거야. 그때 너는 정말 행복해질거야. 그러니까 그때를 기대하며 조금은 마음을 놓아도 괜찮아. 미래의 너는 지금의 너도 사랑하게 될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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