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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도 Oct 22. 2023

라이프 오브 팬시


전생에 최소 이순신

  5년 간의 홍대 라이프를 청산하고 송도로 이사했다.

  이때부터가 나의 결혼생활이라고 봐도 되고, 동거생활이라고 봐도 된다.


  당시 나에겐 신혼이고 웨딩이고 안중에 없었다. 그저 음악생각뿐이었다. 그리고 나의 7년 차 연인은 나를 살릴 생각뿐이었다. 내가 혼자 옥탑방에서 음악만 만들다가 어느 날 변사체로 발견될까 봐 두려웠던 모양이다.


  아무튼 지금은 나의 세대주로 활동 중이니, 이제부터 남편이라고 칭하겠다. 남편은 나를 좀 더 건강하게 만들고, 음악 하기에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고자 했다. 덕분에 나는 드디어 바(퀴)선생과 결별하고, 모기조차 보기 힘든 신도시로 이주했다.


  3개월간의 요양시간 동안 남편은 섬세하게 나를 돌봐주었다. 병원에 내원하는 날이면 연차를 내서라도 함께 가주었고, 나의 (신체적 정신적) 변화들을 예민하게 알아차려 주었으며 적절한 조치를 취해주었다. 전생에 나라를 구한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빠른 속도로 회복됐다.


  함께 살 공간으로 굉장히 특이한 구조의 오피스텔 전세를 구했다. 거실의 두면이 통유리창으로 시원하게 트이고 집 앞으로 인공수로가 흐르는 5층 짜리 건물로 유럽의 카페거리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독특한 곳이었다. 1,2층은 카페와 상점 3,4,5층은 주거, 사무공간으로 나뉘어 있어서 통유리 밖으로는 활기찬 느낌이 가득했다. 언젠가 내가 송도에 놀러 와서 여기 살고 싶다고 외쳤던 곳이었다. 말이 전세지 관리비가 너무 비싸서 월세 같았다. 하지만 그는 맘에 드는 공간에서 마음껏 작업 하라며 나만의 작업실을 꾸밀 수 있게 도와주었다. 평생 내가 가져 본 것 중 가장 아름다운 공간이었다.





레슨이 물 밀듯

  지난 2년간 죽을 듯이 음악을 만들었던 건,

  남은 생을 티쳐 teacher가 아닌 아티스트 artist로 살아가기 위함이었다. 열심히 하다 보면 차츰 음악으로 돈을 벌 수 있겠지. 하는 희망을 안고 달렸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나의 음악들은 엄청난 레슨기회들을 몰고 왔다. 그동안은 엔터에서 연습생을 가르치거나, 대학에서 시간강사를 했기 때문에 입시레슨은 학원뿐이었다. 하지만 이제 본격적으로 예술고등학교에 출강하게 됐다. 나이를 생각하니 안정적인 수입을 뿌리칠 수 없었다.




운전과 필라테스, 광활한 주방에 관하여


  #1

  운전면허는 뭘 그렇게 일찍 따 뒀는지,

  차가 이렇게 늦게 생길 거라곤 스므살의 나는 몰랐다. 덕분에 나는 브레이크가 왼쪽인지 오른쪽인지도 까먹은 15년 차 무사고 운전자였다. 운전대 한번 못 잡았는데 갱신까지 1회 해 둔 참이었다.


  20대 시절보다 겁도 늘고, 걱정도 늘은 내가 과연 운전을 잘 해낼 수 있을지 두려웠지만 레슨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면서 운전을 해야만 했다. 나는 돈을 벌기 위해 돈을 쓰는 자본주의의 세계로 직진했다. 작고 까만 반짝이는 스파크를 데려왔고, 단 3회의 운전연수로 나의 염려는 깨끗이 사라졌다. 나의 공간지각능력은 평균 이상이었고, 시야는 넓었으며 비숑이 그려진 ’개초보’ 스티커를 당당히 붙여놓은 채 스무스하게 차선변경을 해내는 침착한 드라이버였다. 과연 15년 무사고다웠다.


#2

  남편이 비싼 필라테스를 끊어주었다.

  춤을 출 일이 사라지면서 숨쉬기 운동 밖에 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게다가 그 숨쉬기 운동마저도 가끔 버거워지는 천식환자였다. 정상과 비정상의 애매한 경계까지 폐 기능을 끌어올린 후 치료가 중단된 상태였다. 나의 호흡기 내과 주치의는 더 이상은 해줄 수 있는 것이 없다며 아는 한의원을 추천해 줬다.


   한약을 몇 재 먹었지만 큰 변화는 없었다. 달리면 숨이 차고 과하게 웃어도 숨이 찼지만 적당히 자제하면 급격한 천식발작이 오지는 않았다. 오래 노래를 하면 종종 등이 좀 아파오긴 했지만 큰 문제는 없어서 그냥저냥 살았다. 운동량이 줄어들고 작업에 몰두하면서 몸은 심하게 쇠약해져 있었기에 일반적인 단체수업은 따라갈 수가 없었다. 재활이나, 실버 수준으로 시작해야 하는 상황이라 1:1 PT를 할 수밖에 없었고 맞춤형 수업을 찾아보니 당연히 비쌌다. 열심히 PT를 받으면서도 이게 무슨 호사인가 싶어 죄책감이 밀려왔다. 그럴수록 더욱 레슨과 작업에 영혼을 갈아 넣기로 다짐했다.


#3

  레슨이 없는 평일, 작업실에 앉아 나의 영혼을 멸치처럼 달달 볶다 지쳐 문득 나의 광활한 주방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황송함이 밀려왔다. 무언가 대단한 음식을 만들어내야만 할 것 같은 공간이었다. 생전 처음 보는 ㄷ자 형태의 공간으로 싱크홀과 조리대 모두 널찍했다. 망원동 옥탑방 주방의 네 배 정도 되는 크기였고, 새것이었다. 처음 몇 번은 땀을 뻘뻘 흘리며 7첩 반상을 내어 놓았다. 체력거지인 주제에 그렇게 욕심을 내고 나면 설거지할 힘은커녕 밥 씹을 힘도 모자랐다.


  몇 번의 요리전투 후 점점 배달음식을 시켜 먹거나 외식을 하는 횟수가 늘어났다. 하지만 어느 날인가 남편은 비싼 스테인리스 프라이팬을 구경하기 시작했고, 반짝이는 식기들을 조금씩 사들였다. 나로서는 저걸 왜 사나 싶은 서로 다른 크기의 스테인리스 바트와 채반, 집게 등이었다. 그리고 그는 곧 훌륭한 이탈리안 음식 요리사가 되어버렸다. 그가 마늘과 페퍼론치노를 능숙하게 다루어 알리오 올리오를 만들고 조개를 해감하여 봉골레를 만들거나 스테이크를 굽는 동안 나는 옆에서 열심히 샐러드를 씻고 와인을 따며 깨끗하게 설거지할 것을 다짐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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