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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도 Oct 22. 2023

제 직업은요


이중생활

  ‘섬’은 나의 데뷔곡이 됐다.

  그리고 나는 네이버 인물검색에 등록된 인물이 됐다.


  오래 염원한 일을 해내버리고 나니 모든 게 쉽게 느껴졌다. 당시 신인 아티스트들의 등용문이었던 CJ ‘튠업’과 네이버 ‘뮤지션 리그’에 지원했고 파죽지세로 좋은 성과를 냈다. 여세를 몰아 다음곡을 발매했고, 차츰 도와주는 이들도 생겨났다. 인디 레이블에 소속하게 됐고 다시금 소속감이 생겨났다.


  여기까지 딱 1년이 걸렸다.

  통장잔고는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 막 작은 가능성이 시작 됐지만 당장 음악활동만으로 월세가 벌리진 않았다. 나는 다시 레슨을 늘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데뷔 전보다는 덜 괴로웠다.


  일주일에 4일간 ‘박OO 쌤’ 역할을 하면

  일주일에 3일은 ‘가수 팬시’로 살 수 있었다.

  비록 정신과 육체를 탈탈 털어 넣어야 했지만 행복했다.




입국카드와 존재론적 갈등

  두 번째 싱글을 막 발매한 눈부신 초여름이었다.

  1년간 많은 것을 해낸 기특한 나 자신에게 선물을 주기로 했다.


  4박 5일간의 베트남 여행. 다낭행 비행기를 타고 입국카드를 작성하는 시간이 왔다. 이름, 생년월일, 여권번호, 국적, 항공편명을 빠르게 적어 내리고 나니 ‘직업’ 칸에 도달했다. 잠깐 심호흡을 하고 경건하게 빈칸을 채웠다.



   ‘Artist’



  또박또박 적어 넣은 여섯 개의 알파벳을 몇 번인가 다시 눈으로 만져 보았다. 숨쉬기가 약간 어려워진 느낌은 기내 산소부족 탓인지, 공황인지, 천식인지, 그냥 벅차 오름 때문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지만 몇 번 심호흡을 하자 차츰 가라앉았다.


  처음으로 입국카드를 작성한 것은 대학생 시절이었다. 아무런 고민 없이 student라고 적을 수 있었던 시절. 하지만 졸업 이후 종종 이 칸을 마주할 때마다 나는 늘 내적갈등에 빠지게 됐다.


  누군가는 HUMAN이라고 적어 넣는다는, 어쩌면 아무 의미도 없는 그 작은 네모칸 속에서 나는 쓸모없는 존재론적 갈등에 빠져 한없이 작아지곤 했다. 이곳에 어떤 알파벳을 나열해야 정당한가. 내면의 심판관은 냉철한 시선으로 나를 주시하고 있었고, 나는 안절부절 눈치를 보다가 결국 teacher (혹은 instructor)라고 적어 넣은 후 깊은 자괴감에 빠지곤 했다.


  음악으로 돈을 벌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내게 월세를 내게 해주고, 닭발을 주문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은 ‘보컬 트레이너’라는 직업이었기 때문이었다. 수년간 주 5일 했던 일은 예술이 아닌 교육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아티스트’ 이길 원했지만 ‘티쳐’로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깊은 우물에 빠진 느낌이었다.


  누군가는 레슨도 음악이지 왜 그러느냐며 의아해했지만, 나의 우주에서 나는 전혀 뮤지션이 아니었다. 내가 꿈꿔 온 모습은 그림자가 아닌 빛이었고, 조력자가 아닌 주인공이었다. 하지만 이제 나는 데뷔를 했고, 아티스트 네임을 가지고 있었고, 작품활동을 하고 있었다. 물론 닭발 한번 시켜 먹기 어려운 저작권료가 입금되었지만, 단돈 1원이라도 내 음악이 벌어다 주는 돈이 통장에 입금된다는 사실에 나는 뭔가 해낸 기분이었다. 비로소 ‘아. 티. 스. 트’가 된 기분이었다.



  난 그동안 단 한 번도 스스로에게

  아티스트로 인정받지 못해 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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