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은도 Oct 22. 2023

팬시 스튜디오


강박과 완벽주의

  너무 좋은 환경에 쳐하니 나는 웬일인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주방에 대한 황송함은 둘째 치고, 작업공간의 웅장함이 나를 압도했다. 빛이 원 없이 들어오는 통유리에 둘러싸인 널찍한 마루에는 유럽에서 날아온 진짜 페르시아 양탄자가 깔려있고, 그 위에는 나를 위해 친구 J가 직접  디자인하고 제작해 준 미드 센츄리 모던 스타일의 작업책상이 자리 잡고 있다. 센터에는 은빛 유려한 (무려 4백만 원을 태운) 아이맥 27인치와 음악장비들이 가지런히 늘어서 있다. 놀랍게도 그 모든 완벽함이 나를 협박했다. 내면의 목소리가 속삭였다.



  ‘이런 완벽한 환경에서 똑바로 못하면 반칙이지!’

  ‘무조건 대단한 성과를 내야 해!’

  ‘네 몫을 못하면 넌 버림받을 거야!’



  난 다시 무리할 준비가 됐다.

  아니 전보다 더 강박적이 되어갔다.

  데뷔 전에는 ‘죽기 전에 내 이름으로 낸 음악을 한곡만이라도 발표하자’는 목표로 달렸다. 그래서 좋은 곡을 쓰는 것에 온 정신을 집중했다. 하지만 어느새 나는 더욱더 큰 성과를 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리고 있었다.


  작업환경이 급격하게 좋아지자 큰 빚을 낸 기분이었다. 뭔가 대단하게 성공해내야만 할 것 같았다. 좋은 음악은 기본이었고, 그 음악을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는 통로가 필요했다. 머리를 싸맨 고민 끝에 작곡과정 브이로그를 기획했다. 기획과 샘플촬영에만 한 달이 걸렸다.



정체성

  동시에 그간 쌓인 음악적 정체성에 대한 고민도 해결해야 했다. 팬시라는 이름을 가진 후, 어느 정도 색깔을 정립했지만, 보컬 스타일에 너무 큰 변화를 줬기 때문에 스스로는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20대의 나와 30대의 나는 너무 달라져 있었고, 그에 따른 자연스러운 결과였지만 핵심적인 무언가를 놓치고 있는 기분이었다.

  게다가 당시의 난 다시 인정중독의 늪에서 허덕이고 있었다. 작업을 하면서도 반응이 좋은 것과 내가 끌리는 것 사이에서 전자를 택했고 그렇게 만들어진 이미지와 방향들은 나를 답답하게 했다. 방향전환이 필요했다.


  새 작업실에서 믹스테이프를 만들어 사운드클라우드에 올리기 시작했다. 느낌 가는 대로 비트를 고르고, 아무말 대잔치로 가사를 붙이고, 자유로운 탑라인을 올려 뚝딱 완성한 노래에 핀터레스트에서 가장 끌리는 사진을 골라 커버로 썼다. 정말 마음 가는 대로 했다.


  그때까지 난 다소 차분하고 여성스러운 느낌의 결과물들을 내고 있었고, 자연스럽게 블라우스나 원피스류의 의상을 입고 있었다. 하지만 마음 가는 대로 하기 시작하니 내면의 톰보이가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지나치게 통제하던 부분들이 반대급부로 튀어 오른 것이다. 무지개 색깔을 다 채울 기세로 볼캡을 사들이고, 중고딩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스트릿 스타일의 옷을 입기 시작하니 마음도 껄렁껄렁해졌다. 한껏 힙한 기분은 굳었던 마음을 물렁하게 풀어놨다. 옷의 사이즈가 늘어나면서 나를 조이고 있던 무언가도 같이 헐렁해진 기분이었다.


  커버 작업에도 변화를 줬다. 그동안 커버곡을 선곡할 때는 전혀 듣지 않는 음악들을 고르곤 했다. 아이유, 헤이즈 같은 인기가수들의 음악이었고, 나는 제법 잘 소화를 했으며, 반응도 좋았다. 하지만 좋아하지 않는 곡들을 부르면서 난 점점 지쳐가고 있던 참이었다.


  이제 그냥 부르고 싶은 걸 부르기로 했다. 에리카 바두와 조자 스미스, 리앤 라 하바스, 시드의 노래들을 불렀다. 볼캡을 쓰고, XXL 티셔츠를 입고, 쭈그리고 앉아 폰으로 가사를 보며 편하게 내키는 대로 불렀다. 훨씬 수월했다. 조금씩 실마리가 풀렸다.



성과

2019년, 1월 나의 야심 찬 계획은 세 가지였다.


- 유튜브 구독자 1000명 모으기

- 꾸준히 곡 쓰기

- 연말에 음원 발매하기


  2019년 1월 ‘팬시 스튜디오’ 채널을 개설하고

  첫 영상을 올렸다.


  그해 12월,

  12곡이 수록된 정규 1집 STRESS를 발매했다.

  구독자가 2500명을 넘어 선 시점이었다.



이전 14화 라이프 오브 팬시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