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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도 Oct 22. 2023

오래된 감정덩어리


퇴마 

  나의 첫 앨범은 “감정 덩어리” 그 자체였다.

  뱉지도 삼키지도 못한 오래된 감정들은 소화되지 않은 채 쌓여 단단히 체해 있었다.


  나는 대부분의 감정을 못 본 척했고, 그런 내가 강하다고 착각했다. 하지만 정반대였다. 나는 불편한 감정을 다루는 방법을 전혀 알지 못했고, 마주 볼 용기가 없어 스스로를 속였을 뿐이다. 완벽한 셀프 가스라이팅이었다.


  곡을 쓰면서 내면으로 들어가는 것에 조금씩 익숙해졌다. 나는 그곳에서 오랫동안 방치된 거대한 감정의 덩어리들을 마주하고 뜨악했다. 불성실하게 미뤄 놓은 감정들은 내면에 처박혀 썩어가고 있었다. 마음의 병은 대부분 거기에서 기인했다.


  뒤죽박죽이 되어 뭐가 뭔지 구분하기도 어려워진 그 덩어리들을 바깥쪽부터 조금씩, 살살 도려냈다. 아팠다. 아파도 해결해야 했다. 외로움을 잘라서 ‘섬’을 썼듯이, 불안을 잘라서 ‘roller coaster’를 쓰고, 공허를 퍼올려 ’starlight’을 썼다. 한 해 동안 무려 스무 곡을 완성했다. 그렇게 뱉어내고 나니 퇴마라도 한 기분이었다.



STRESS

  내면의 거대한 덩어리로부터 태어난 열두 개의 감정들을 골라내어 옷을 입히고 머리를 빗긴 후 한놈 한놈 이름을 붙였다. 이 모자라고 소중한 녀석들을 세상에 내보낼 생각을 하니 마음이 찌르르 떨렸다. 불안, 외로움, 혼란, 두려움, 공허함, 냉소, 절망, 기대감, 희망, 설렘… 을 나누어 담은 열두 곡을 관통하는 키워드, 나의 첫 앨범의 제목은 ‘STRESS’가 되었다.



아트웍

  녀석들을 정갈히 포장해 줄 앨범아트웍 작업이 시작됐다. 모두 가내수공업이었다. 혼자 스토리보드를 짜고, 로케이션 견학을 다녀오고, 씬별로 의상을 준비하고, 소품을 준비했다.


  촬영 당일 남편은 일 할 때 쓰는 스튜디오용 조명과 촬영장비들을 잔뜩 가져왔다. 뮤비의 첫씬이자, 앨범커버의 장소는 지난 1년간 내가 지박령처럼 서성였던 나의 작업실이었다. 2x3m의 페르시아 양탄자와 딥그린 컬러의 벨벳 커튼으로 둘러싸인 공간에 나의 모든 악기를 던져놓고 그 한가운데 털썩 쭈그리고 앉았다. 벽에는 에리카 바두의 포스터와 마이클 잭슨의 LP가 걸려있고, 여기저기 다스베이더, 요다, 고라파덕 등 평소 소중하게 여기는 소품들도 프레임 안에 배치했다. 내 마음속을 시각적으로 표현해 보려는 심사였다. 정신없고 힙하고 키치한 분위기랄까. 혼란하다 혼란해.  


  앨범 메인커버를 찍기 위해 그 가운데서 한참 놀았다. 건반을 치고, 바이올린을 켜고, 드럼패드를 두드리면 남편은 찰칵찰칵 수없이 셔터를 눌렀다. 수십 컷의 사진을 찍어가던 중, 문득 눈에 띈 덤블도어의 딱총나무 지팡이를 관자놀이에 대고 ‘오블리비아테’를 중얼거린 컷이 최종커버로 셀렉 됐다.



  뮤비촬영은 캐논의 DSLR과 당시 발매 한 달 차였던 아이폰13pro로 그 흔한 짐벌 하나 없이 진행됐다. 남편이 촬영을 맡았고, 나의 베프 둘이 만사 제치고 찾아와 도와주었다. 작업실 씬을 찍고 밖으로 나섰다. 겨울의 초입, 차가운 공기를 마시며 송도의 나대지와 대형트럭 주차장등 황량한 도시의 모습들을 찾아다니며 립싱크를 하고, 보드를 탔다. 아침 10시에 시작된 촬영은 밤 10시가 다 되어서야 끝났다. 홀가분했다. 우리는 작업실로 돌아와 엽기닭볶음탕에 소맥을 마시며 촬영마무리를 자축했다.  



내면아이

  일 년 만에 스무 곡을 썼지만 마음속, 곡의 재료는 아직도 넘쳐났다. 나의 오래된 감정들은 다양한 농도와 색과 질감으로 존재했다.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이제 막 표면을 살짝 긁어냈을 뿐이었다. 가장 바깥에 있는 것이 가장 최근의 감정이었다. 더 깊이 파헤쳐 들어갈수록 더 오래된 감정들을 마주해야 함을 직감했다. 그걸 채굴하는 것은 훨씬 더 힘든 작업일 것이다.


  그리고 그 거대한 덩어리 속 한가운데, 깊고 깊은 그곳에, 상처 입은 내면아이가 잔뜩 웅크린 채 긴 잠을 자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나는 차근차근 이 감정들을 퍼올려 용감하게 코어를 향해 직진해야 한다. 아이를 깨워야 한다. 아이가 잠에서 깨어 크게 울어도, 울다 휘두른 팔에 맞아 코가 부러진대도, 나는 언젠가 아이를 찾아가 깨워야 한다. 미뤄둔 대화를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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