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책없이 재독립을 했다.
무언가 해낼 수 있을리라는 근거없는 믿음으로 홍대로 돌아온 나는 전 재산을 탈탈 털어 커다란 테이블과 오디오 인터페이스를 샀다. 맥북프로, 88건반, 컨덴서 마이크와 모니터 헤드폰이 내가 가진 무기였다. 그걸로 작은 옥탑 스튜디오를 만들었다. 그속에 나를 가두고 데모를 만들기 시작했다.
스마트폰의 보급으로 스트리밍 서비스가 대중화 되고, 이제 누구도 mp3플레이어 를 들고 다니지 않았다. 수천곡의 콜렉션으로 가득한 나의 은빛 아이팟은 고대유물이 되었고, 오디션계에도 새바람이 불었다. CD에 음원을 구워서 우편으로 보내던 시절은 가고 메일을 보내거나, 링크를 공유하는 시대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디지털 음악장비가 발달하면서 대형엔터 위주로 흘러가던 음악제작환경은 새로운 갈래를 형성했다. 재능있는 아티스트들을 주축으로 소규모 레이블들이 생겨났고, 힙합 알앤비 씬은 파죽지세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자이언티, 크러쉬 같은 슈퍼루키가 소속해 있었던 다이나믹 듀오의 '아메바 컬쳐' 부터 도끼, 더콰이엇, 빈지노의 '일리네어' , 타이거jk의 '필굿' , 박재범과 쌈디의 'AOMG'가 거대 자본과 아이돌을 보유한 대형기획사들을 위협하며 챠트에 어깨를 나란히 했다.
거기에 더해 소셜 미디어의 발전은 전통적 사회 관계망을 빠르게 디지털화 시켰다. 페이스북, 트위터, 인스타그램을 통한 바이럴 마케팅이 시작되었고 실력있는 다양한 아티스트들이 대형엔터의 기획없이 세상에 알려질 수 있는 토양이 마련되었다. 나에게도 희망적인 흐름이었다.
알앤비장르를 주축으로 힙합적인 요소와 팝적인 요소들을 골고루 흩뿌렸다. 데모를 만들어 레이블들에 뿌리고 원하는 레이블에 소속해서 정식으로 앨범을 내는 것이 나의 계획이었다.
열심히 데모작업을 하고 여러군데 데모메일을 보냈지만 기다리는 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창작에 올인하기 위해 최소한의 레슨을 하고 있었기에 월세와 생활비 내기도 빠듯했다. 여가 생활은 사치가 되었고 생필품 외의 소비는 거의 하지 않았다. 여행, 맛집, 쇼핑, 카페, 카메라 기변, 필름사진 등 돈이 드는 모든 욕구를 포기했다. 일주일에 한번 남자친구를 만나 가벼운 데이트를 하는 걸로 만족하며 오로지 음악에 올인했다.
그러다보니 친구들을 만나는 일도 사치가 되었다. 그들은 이제 대부분 안정된 직장인이었다. 씀씀이도 달랐고, 어른이 되어서인지 마음도 사뭇 달라져 있었다. '그 정도 수입이면 반백수 아니냐, 왜 슈스케에 나가지 않느냐, 아이고 우리 동네가수' 같은 (본인은 재치있다고 생각할) 필터 없는 발언들은 제법 친하다고 생각했던 친구의 입에서 쏟아졌고, '네가 투애니원같은 가수가 될 줄 알았는데 안타깝다'며 나를 저울질하는 친구도 있었다. 생각 없는 발언들에 상처받는 게 일상이 됐고 말없이 상처 주는 연민의 눈빛들도 있었다.
조용한 대인기피가 시작됐다. 생각없고 뻔뻔한 그들의 세치 혀를 잡아뽑는 상상을 하며 '정말 싫어'를 써내려갔다. 당시 '더 스트록스' 의 쿨한 사운드에 빠져있던 난, 빨간색 할로우 기타를 안고 사뭇 유쾌하게 시니컬한 가사를 뱉어냈다. 그렇게 작업실에 틀어박힌다. 세상과의 거리는 빠르게 벌어진다. 나는 점점 외로워진다. 그덕에 곡은 쏟아져나오지만 메일의 회신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는다.
나는 점점 예민해져 갔다. 내 마음 속에서 뾰족한 가시들이 하나 둘 솟아남을 느꼈다. 이러다 거대한 성게가 될 것 만 같다. 이제 나의 가장 가까운 곳에 남은 친구는 나의 연인이었지만 돋아난 나의 가시가 자꾸만 그를 찌른다. 1년 반을 채워가던 연애는 결국 1차 위기를 맞이한다.
상수동 '이리카페'에서 사진집을 보며 데이트를 한 어느 가을의 토요일이었다.
만난지 1년 반이면 권태감이 올 만한 시기였지만, 그는 슬기롭게 그 감정을 다루고 있었다. 예민해진 내가 그의 행동을 삐딱하게 읽고, 재단하고,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그럴듯한 이유를 조목조목 들어 그를 비난하지만 않았다면 그날은 여느 날들처럼 아무일 없이 다정하게 흘러갔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기어코 그를 비난하고야 말았다. 감정은 폭발하고 뒤엉켰다. 나는 그를 상처주고, 그는 나를 상처줬다. 우리의 관계는 순식간에 잘리다 만 손가락처럼 덜렁거린다.
덜컥 겁이 났다. 시간을 돌리고 싶지만 일은 이미 벌어졌다. 심장이 뛰고 숨쉬기가 힘들다. 아차 싶어진 나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지만 이미 금이 가버렸다. 싹싹 빌고 싶은 멋없는 마음을 겨우겨우 참아내며 그를 회유하고 설득해 보지만 그의 눈 속엔 이미 영혼이 없다. 그래도 어찌어찌 그를 잡았다. 덕지덕지 붙여는 놓았지만 내 마음도 우리의 관계도 너덜너덜하다. 작업실로 돌아와 '내가 너를 니가 나를' 이라는 곡을 썼다. 그후로 한참동안이나 나는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힘든 연애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