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대로 돌아와서 쓴 첫 데모곡은 'I'll Find'라는 곡이었다.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에서 영감을 받은 곡으로 주인공 '산티아고'가 긴 모험 끝에 집으로 돌아와 앞마당에서 보물을 발견하는 것처럼 나는 이곳에 돌아와 보물을 발견하리라는 희망을 담은 곡이었다.
보물은 개뿔, 서교동 옥탑생활은 빚과 좌절만을 안겨줬다. '정말 싫어'를 쓰고 '내가 너를 니가 나를' 을 쓰고 영원히 기억에서 지우고 싶은 애걸복걸 쏭 'Forgive Me'를 쓰고, '아무일도 없네' 라는 후렴구 가사로 이루어진 '아무 일'을 마지막으로 처참한 엔딩을 맞이한다. 약 1년간 스므곡 남짓의 데모를 작업하고, 몇개의 레이블에 메일을 보냈지만 '아무 일' 없이 끝이 났다. 얻은 것은 나의 1년을 고스란히 담은 상처투성이의 노래들과 대인기피증 뿐이었다.
음악 10년차,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는 자괴감과 먹고 살아야 하는 불안감, 그리고 가난에 쫓기고 있었다. 자존감은 바닥에 떨어졌다. 확신과 자신감에 가득찼던 시절은 전생 같았다. 꿈이고 나발이고 생존을 위해 보컬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기 시작했다. 보컬레슨은 물론 게스트보컬부터 가이드보컬과 탑라이너까지 생존을 위한 음악들이 매일을 가득 채웠다.
엔터,대학,학원 가리지 않고 노래하는 법을 가르쳤다. 오로지 레슨을 위해 들어야하고 익혀야 하는 노래들이 수십곡씩 쌓여갔다. 그 모든 노래들이 나를 불행하게 했다. 길에서 카페에서 식당에서 흘러 나오는 모든 음악이 듣기 싫어졌다.
목소리를 빌려주는 일도 많았다. 나는 코드를 짜주는 엔지니어처럼 일했다. 내가 뱉는 목소리는 나의 감정이었고 철학이었고 정체성이었으며 나 자체였지만 그런건 불필요했다. 그런 나의 소리를 0과 1로 바꾸어, 살점을 잘라주듯 건넨다. 피드백을 받아 요리조리 자르고 기우고 비틀어 결국에는 나도 아니고 뭣도 아닌 기괴한 완성품이 만들어지면 나의 영혼은 너덜너덜 해지고 통장에는 새로운 숫자가 찍혔다. 나의 목소리는 그냥 공기로 성대를 진동시켜 피치를 발생시키는 물리적 행위가 되었다. 그저 '돈'으로 환산되는 의미없는 행위였다.
녹음실과 무대 위는 이제 놀이터가 아닌 전쟁터로 바뀌었다. 그저 노래하는게 행복했던 아이는 차곡차곡 불행한 어른이 되어갔다. 우울감은 날로 커져갔다. 하지만 주어진 일을 해내지 못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는' 내면의 완벽주의자는 나의 피폐해진 영혼을 무시하며 성과를 내어 나갔다. 아이들은 데뷔를 하고, 대학교에 갔으며, 무대와 녹음실은 계속 나를 찾았다. 충분한 페이도 따라왔다. 아무런 성취감도 없었다. 자괴감만 성실하게 쌓여갔다. 나 자신이 싫었다.
일을 마치고 집에 오는 길은 허무와 공허가 나를 가득 채워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다. 아니 그냥 사라지고 싶었다. 무감각해져갔다. 충족감과 자극을 위해 매운 음식을 먹었다. 자괴감과 외로움 위로 캡사이신을 들이부으며 내 삶은 나의 바램과는 전혀 상관없는 방향으로 무성하게 뻗어나가는 기괴한 실패작처럼 보였다. 나의 계획적인 외로움만이 성공적이었다. 나 자신이 싫었다.
어느날 객원보컬로 노래를 부르러 간 무대 위에서 난생 처음 공황을 경험했다. 내 뒤의 밴드도 내 앞의 관객도 모두 내게 총을 겨눈 적으로 느껴졌다. 나는 포위 됐고, 모두가 나를 비웃고 있었다. 모두가 입꼬리를 올리고 나의 실수를 기다렸다. 나는 가사의 첫번째 단어를 떠올리지 못한 채 8마디의 전주를 흘려보내며 완벽한 지옥을 경험했다. 온몸에 식은땀이 나고 숨을 쉴 수 없었다.
노래해야 하는 지점이 다가오고 있었다.
3...2...1....
가까스로 모호한 음과 단어를 대충 섞어 토하듯 뱉어냈다. 다행히도 첫 소절을 뱉으니 내몸은 멜로디와 가사를 기억해내어 자동재생 모드로 들어갔다. 어떻게 끝났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 그 무대가 끝나고 나는 독한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공황 경험 이후로 무대공포증이 생겼다. 평생 경험해보지 못한 생소한 것이었다. 20대의 나는 기세 하나로 살았다. 확신과 자신감에 찬 나의 기세는 관객을 압도했고 그들의 감탄은 다시 내게 돌아와 더욱 나를 끌어올리는 선순환이었다. 하지만 뒤늦게 경험하는 공포와 불안은 생소하고 두려웠다.
하지만 무대에 서야만 했던 나는 치열하게 위장했다.
불안증상은 점점 컨트롤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극복했다기보다는 익숙해졌다. 그것이 내게 커다란 스트레스 상황인 것은 확실했지만 물 속에서 잠시 숨을 참는 것처럼 참을 수 있었다. 남들이 보기에는 전혀 문제가 없는 듯 했다. 마치 가위에 눌린 사람을 지켜보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여기서 나의 나약함과 두려움을 들키면 끝장이라고 생각했다. 무대 자체는 익숙한 공간이었기에 '위장'이 가능했다. 나는 전혀 즐기지 못하고 있었고 나의 두려움을 숨기기에 급급했지만 멋진 척, 신난 척, 몰입한 척을 했고 '적당한' 무대를 만들었다.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무대가 끝나고 집에 돌아오면 12시간동안 죽은 사람처럼 누워있었다.
밴드멤버들은 좋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늘 어딘가 좀 고장난 것 같이 보였을 나를 챙겨줬다. 하지만 나는 그들과 가까워지는 것이 두려웠다. 그들은 멋진 커리어와 실력을 가진 뮤지션이었고, 외제차를 타고 다녔다. 그들과 가까워지면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초라한 내가 모조리 들통날 것 같았다. 두려웠다. 두려움을 감추기 위해 점점 더 나를 숨겼다. 되도록 그들과 어울리지 않았다. 그렇게 슬금슬금 물러나 풍경처럼 위장하면 적어도 안심이 됐다.
점점 사람을 만나는 게 피로했다.
내 안엔 불안과 패배감이 가득한데 그렇지 않은 척하며 사람을 만나려면 너무 많은 에너지가 필요했다. 스몰토크는 부담스러웠고, 이제 사소한 말에 상처받는 것을 넘어서서 모든 말과 행동을 오해하는 편집증적인 반응에 까지 이르렀다. 나 자신이 싫었다.
세상은 나의 적이 되었다.
어떤 무리에도 섞이고 싶지 않았다.
그냥 혼자인 나로 존재하기로 했다.
위장색을 벗어 던지고 나의 색 그대로 있고 싶었다. 아무것도 경계하지 않고 싶었다. 세상과 멀찌감치 떨어져 있으면 그럴 수 있었다. 남자친구는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안전가옥이었지만 한번 헤어질 뻔한 이후로 조심스러웠다. 필요 이상으로 의지하면 그가 떠나버릴 것만 같아서 그에게조차 나를 통제했다.
그렇게 나는 혼자를 받아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