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남자친구는 통찰력 있는 사람이었다.
그에게 나의 무능력함과 불안을 들키지 않기 위해, 그렇게 함으로써 이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있는 힘껏 통제하고 있었지만 그는 나의 외로움과 불안을 모두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나 혼자 극복해야 하는 문제임도 알고 있었다. 그는 그저 묵묵히 내곁에 있어주었다.
나는 그를 내 인생의 구원자라고 생각했다.
일방적으로 그가 나를 구해주길 원했다.
처음엔 그랬다.
그는 안정적이고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었고, 나를 꿰뚤어 보는 강철처럼 강해보이는 남자였다. 나는 의심 없이 마음껏 의지했다. 아버지의 우주에서 그의 우주로 환승한 꼴이었다. 그래서 자주 애처럼 칭얼 됐다. 하지만 권태기가 올즈음에 찾아온 첫 번째 위기는 내게 큰 지침을 줬다.
'그에게 의지하면 버림받고 말거야.'
배신감이 차올랐지만 헤어질 용기도 없었다.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힘든 연애가 시작 되었다. 너무 힘들어서 어떻게든 그를 미워해 보려고 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를 잃지 않기 위해 나는 최대한 나를 통제했다. 그를 이해하려고 노력했지만 언제나 마음 한 구석 섭섭함이 차올라 있었다.
연애 5년차, 두번째 위기가 찾아왔다.
첫번째 위기와 마찬가지로 눌러왔던 나의 분노가 터지며 시작됐다. 첫번째 것이 뜨거운 분노였다면, 두번째 것은 차가운 분노였다. 나는 이제 그를 버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3년 전과는 다를 거라고 생각한 나는 이 연애를 끝내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일주일의 시간을 갖자고 했다. 일주일간 연락 없이 각자의 시간을 가지며 앞으로의 관계를 결정하자고 나는 쿨하게 통보했다.
하지만 헤어진지 24시간도 되지 않아 나의 불안과 초조는 극에 달했다. 바로 전화해서 뻥이었다고 번복하고 싶었다. 내가 잠깐 미쳤었나. 3년 전의 데자부였다. 멋없게 싹싹 빌고 싶은 마음을 다행히 꿀꺽 삼켰다. 내 자신이 한심 했다. 남자 없이 잘 사는 미스에이가 부러웠다. 나는 아무래도 이 남자 없이 잘 살 것 같지가 않다. 하지만 지금 연락하면 모든 게 망할 것 같았다. 어떻게든 일주일 동안 연락 하지 않고 지내 보고자 나는 필사적으로 연애 코칭 서적들을 읽었다. 그리고 그 유명한 베스트셀러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를 통해 큰 깨달음을 얻게 된다. 사실 지금와서 보면 남자는 사고중심, 여자는 감정중심이라는 성차별적 발언으로 가득한 책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는 나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내가 너무나 자신에게 매몰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일주일 후에 가진 우리의 대화는 더 큰 깨달음을 주게된다. 그는 언제나 그렇듯 무표정 하고 차분하게 그의 자취방 화장실에 있는 나의 칫솔 얘기를 꺼냈다. 처음엔 무슨 얘긴가 싶었다. 그는 얼마전 함께 보았던 영화 '호빗'의 한 장면을 이야기하면서 자신이 일주일 동안 겪었던 감정을 무미건조하게 설명했다.
극중 '타우리엘'은 사랑하는 '킬리'가 죽은 후 '이게 사랑이라면 다시는 하고 싶지 않다'고 얘기한다.
“If this is love, I do not want it. Take it from me. Please.”
그의 자취방 화장실에서 내가 남긴 흔적들을 보면서 타우리엘과 똑같은 감정을 느꼈다는 설명이었다. 그는 심각한데 나는 웃음이 나왔다. 이것도 일종의 사랑고백인건가? 5년 만에 처음으로 그가 귀엽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그 칫솔을 그대로 두라고 말했다.
나는 드디어 그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를 신이 아닌, 내가 돌보고 지켜줘야 할 사람으로 인식하기 시작하면서 기울었던 추는 밸런스를 찾았고 우리의 연애는 안정되기 시작했다. 그때 니가 INTP인 걸 알았더라면 그렇게 힘들진 않았을텐데.
퇴사를 했다.
죽네 사네 하는 이 생존게임에서 빠지기로 결심했다. 당시 회사는 투자자가 빵빵한 신생엔터였고 A&R 팀장자리를 건 피비린내 나는 전투가 한창이었다. 팀장은 모든 트레이닝 시스템의 인사에 관여했다. 이 더러운 정치질에 가담하여 자리를 지킬 것인가.
통장에 잔고가 쌓여서였는지 견고해진 연애 덕인지 나는 갑자기 초연해졌다. 자리를 지키기 위해 몸부림치던 지난 몇년이 무색하게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내가 여기서 살아남는다면 '진짜 나'는 영영 죽으리라는 갑작스러운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대학, 엔터, 밴드를 모두 그만뒀다. 애써 붙잡고 있던 것들을 죄다 놓아버렸다. 죽어가는 나 자신부터 심폐소생하자.
노트북을 켜고 내곡을 쓰기 시작했다.
아무 대책도 없었다.
홀가분하고도 불안한 마음으로 몇 날 며칠, 나의 작은 옥탑방 바닥에 누워 있었다. 열린 창문으로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왔다. 어떤 레슨도 공연도 없는 한가로운 오후였다.
마음이 고요했다.
치솟는 호르몬과 심장박동은 없다.
나는 안전하다.
그냥 내가 하고 싶은 걸 하기 시작했다.
레슨을 위한 음악을 듣지 않아도 됐다.
아무 음악도 듣지 않아도 됐다.
그냥 내 안에 있는 걸 끄집어내기 시작했다.
하루종일 방구석을 굴러다니며 음악을 만들었다.
음악을 만들다가 힘들면 다시 방구석을 굴렀다.
힘들고 우울하면 그 감정을 그대로 음악에 담았다.
아무런 의도도 없이내 안에서 흘러나오는 것들을 주워 담았다.
하루는 나무의자가 되는 꿈을 꾸었다.
그것이 꿈인지 공상인지 어제 본 영화인지 모호했다.
그렇게 세상과 나의 거리를 유지한 채로
나의 탑에 고립된 채로
내 마음에 관한 곡을 써내려갔다.
죽어가는 진짜 나를 살리기 위한 CPR이었다.
음악을 한 지 15년 만에 데뷔곡을 완성했다.
아무도 없는 방 혼자 눈을 뜨면
아침에 뭐 먹지 잠깐 고민하고
늘 같은 풍경 속 나무 의자처럼
자리를 바꿔가며 바래져 가네
핸드폰 속에는 여러 개의 창문
두드려 볼 때도 가끔은 있지만
커다란 우주 속을 떠다니듯이
누군가 와 닿기는 어려워 보이네
아주 잠깐 선명해지는
순간 발견해야 해
아주 살짝 맘을 스치는
순간 알아봐야 해
I'm gonna find it
I'll find it out
꿈을 꾸듯 아스라이 보이는
네게 닿긴 어려워 보이네
나는 섬
푸른 바달 건너야 만나는 섬
작게 보이는
너는 섬
배를 타고 떠나야 닿는 섬
아무도 없는 밤 잠을 깨면
저 멀리 별빛이 내게 손짓하고
또 다른 우주 속을 헤엄 치듯이
고요히 반짝거리는 꿈을 꾸네
아주 잠깐 여길 떠나는
순간 발견해야 해
아주 잠깐 반짝거리는
순간 알아봐야 해
I'm gonna find it
I'll find it out
너와 나를 가로지른 바다 위를
걸어가는 그런 꿈을 꾸네
나는 섬
푸른 바달 건너야 만나는 섬
작게 보이는
너는 섬
배를 타고 떠나야 닿는 섬
나는 섬
푸른 바달 건너야 만나는 섬
작게 보이는
너는 섬
배를 타고 떠나야 닿는 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