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음악장비와 소프트웨어의 발달은 홈 레코딩을 통해 누구나 자신의 음악을 만들고, 유튜브, 사운드클라우드 같은 플랫폼을 통해 직접 배포까지 할 수 있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사진,영상장비와 소프트웨어의 발달로 앨범커버와 뮤직 비디오까지직접 제작,편집할 수 있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뿐만 아니라 SNS의 발달로 직접 마케팅을 하고 팬들과 소통할 수 있게 되었다. 새로운 미디어로 자리잡은 SNS는 인디뮤지션들이 거대 미디어에의 의존없이도 대중에게 노출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빌리 아일리시'는 바이럴로 세상에 알려진 대표적인 케이스다. 국내에서는 '호미들 ', '릴러말즈' 같은 힙합 아티스트들과 '잔나비' , '새소년' 같은 록 밴드가 바이럴을 타고 인기를 얻었다.
이로써 자신만의 독립적인 음악 활동을 이어가는 아티스트들이 빠르게 늘어나게 되었다. DIY : Do It Yourself 뮤지션이라는 개념은 여기서 탄생했다. 나는 그걸 '가내수공업'이라고 불렀다.
데뷔 한 해에 열심히 음악작업을 했다. 그리고 열심히 아트웍 작업도 했다. 소속이 있었지만 작은 규모였고 아티스트 크루의 개념이었다. 제작비를 쏟아 뮤비를 만들거나 홍보비를 쏟아 마케팅을 할 수 있는 상황이 당연히 아니었다. 소속 아티스트들은 각자 알아서 할 수 있는 걸 하고 소속사는 그것을 아우르고 연결하여 서로 돕는 알콩달콩한 구조였다. 그러니 음악은 당연하고, 아트웍과 마케팅까지 모두 내 손으로 해야했다.
홀로 해낼 수 있는 홍보의 일환으로 커버곡들을 불러서 올렸다. 유튜브에서 커버곡 채널이 유행하던 시절이었고 큰 채널의 아티스트들을 벤치마킹 해보니, 양질의 영상이 필요했다. 나름 사진으로 돈까지 벌었던 사람으로써 사진기술을 응용하니 영상기술도 금새 익혔다. 캐논 5D와 24-70으로 찍은 원본 소스는 그럴싸 했다. 내친김에 영상편집에도 손을 댔다. 하필 적성에 맞았다. 또 영혼을 갈아넣다보니 영상편집 실력은 급상승했다. 자연스럽게 세번째 싱글의 뮤비에 욕심을 냈다. 짐벌과 카메라를 대여하고, 레이블 사장님부터 소속 아티스트들까지 몽땅 동원하여 일을 크게 벌렸다. 그리고 거북목으로 편집만 일주일을 했다. 입시철이라 입시레슨을 병행했다. 몇번의 라이브까지 소화했다. 체력이 달려 힘들었지만 간신히 버티며 발매와 입시를 마쳤다. 그리고 당연히 병이 났다.
나는 매우 지쳐있었다. 내 정신과 육체가 감당할 수 없는 한계까지 나를 몰아붙였기 때문이다. 몸무게는 인생 최저점을 찍었고, 우울감은 최고점을 찍고 있었다. 불안했기 때문이다. 중요한 기회가 찾아온 것 같았고 이 기회를 놓치면 내 인생은 나락이라고 생각했다. '이번엔 진짜 영혼을 팔아서라도 이 현실을 벗어나리라’며 24시간 쫓기고 있었다.
작업에 몰두하면 우울감은 잠시 사라졌지만 작업을 중단하면 금단현상처럼 차올랐다. 이상한 자세로 웅크린 채 작업을 하고, 타르 6.0mm의 독한 담배를 성실하게 피워대는 헤비스모커가 됐다. 레슨 외의 시간을 잘 '써.야.만' 한다는 생각에 쉬지도 못했다. 너무 힘들면 시체처럼 누워있다가 다시 작업을 했다. 도저히 배가 고파서 안 되겠다 싶으면 매운 닭발 같은 걸 시켜서 빈속에 때려 넣었다. 배는 고픈데 입맛은 없었고 자극적인 게 아니면 안 들어갔다. 탄산음료와 매운 음식 마니아가 되어갔다.
니코틴과 캡사이신과 정제당의 서포트로 겨우겨우 목숨을 이어갔다.
새벽에 잠이 들면 꿈에는 그날 작업한 멜로디가 무한루프로 자동재생 됐다. 내 머릿속의 생각공장은 24시간 쉬지 않고 돌아갔다. 매우 예민하고 강박적인 상태였다. 목의 커브는 사라져 가고 디스크가 도졌다. 체지방도 근육량도 심지어 체내수분도 부족했다. 원 헌드레드 퍼센트 쉬어야 했다. 하지만 나는 들뜬 경주마 같은 상태였다.
해내야한다!
달려 나가야한다!
빨리 뭔가를 이뤄내야한다!
마치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몸과 마음의 신호를 모른 척 했다. 쉬는 게 두려웠다. 쉬면 그대로 영원히 멈춰버릴 것만 같았다. 모든 순간이 마지막 기회 같았다.
그리고 어느 날 ‘더 하면 죽는다’는 경고처럼 통증이 찾아와 준 것이다.
전신마취로 해야 하는 수술을 했다.
죽을 병이 아니어서였는지 내 몸 상태에 대한 걱정보다 작업을 멈추는 것에 대한 걱정이 더 컸다. 하지만 나의 초조함과 상관없이 수술 후 주의사항은 대부분 그렇듯 ‘절대안정’이었다. A4에 출력된 빼곡한 주의사항은 스트레스를 받지 말라는 지침으로 끝이 났다.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방법 따위는 전혀 알 길이 없었다. 스트레스받지 말라는 말에 스트레스를 받았다. 쉬어야 한다는 사실이 나를 환장하게 했다. 복부수술이었던지라 한 달간은 노래를 할 수도 없었다. 초조함에 미칠 것 같았다.
그렇게 광인이 되어가는 나를
나의 구원자가 다시 한번 구원했다.
연애 7년차,
사진찍는 남자와 음악하는 여자는
이제 한집에서 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