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은 나의 데뷔곡이 됐다.
그리고 나는 네이버 인물검색에 가수로 등록되었다. 뭔가 이뤄낸 기분이었다.하지만 통장잔고는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 막 작은 가능성이 시작 됐지만 당장 월세가 벌리는 상황은 아니었다. 나는 다시 레슨을 늘릴 수 밖에 없었지만 데뷔 전보다는 훨씬 덜 괴로웠다.
일주일에 4일정도만 ‘OO 쌤’ 역할을 하면
일주일에 3일은 ‘가수 팬시’ 로 살 수 있었다.
'섬'을 내고 나서 나에게는 소속이 생겼다. 한때 게스트 보컬로 활동했던 밴드의 프로듀서였던 예대선배와 전속계약을 했다. 음악적 방향성을 논의하고, 믹스마스터링과 유통문제를 맡길 수 있었다. 든든했다. 이제 열심히 하는 일만 남았다.
이미 몇 년 전부터 '제임스 블레이크' 와 'M83'에 반해 '신스가 이끄는 몽환적인 사운드'의 매력에 빠져 있었다. 신스사운드의 바람은 점점 거세졌고 알앤비, 팝, 록 등과 결합하며 신스팝을 재해석하고 드림팝을 결합하는 등 새로운 사운드를 만들어내며 전세계적으로 유행했다.
'위켄드'의 'Can't Feel My Face'는 '마이클 잭슨'의 향수를 불러왔고, 독특한 목소리와 어우러져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로드'의 'Melodrama'는 그래미 후보에 올랐다. '트로이 시반'의 'Youth' 와 '혼네'의 Warm on a Cold Night' 은 왠지 마음을 벅차오르게 하는 한편 '빌리 아일리쉬'는 더 깊이 내면을 파고들며 마음을 서늘하게 만들어주었다.
신스팝, 드림팝, 일렉트로팝, 다크팝, 아트팝 등으로 불리우는 몽환적인 사운드의 트렌드는 계속 이어졌고 신스사운드와 브레시한 보컬, 미니멀한 편곡과 개인적인 가사들은 내 마음을 두드리며 새로운 영감을 부어주고 있었다.
'섬' 발매 이후 오랫동안 연락이 되지 않던 친구들에게 연락이 오기 시작했다. 갑자기 세상이 나에게 우르르 몰려 오는 기분이었다. 푸른 바다를 건너야 작게 보이는 나의 작고 외로운 섬은 만석이 되었다. 긴 고립과 외로움의 끝에서 드라마틱하게 세상과 연결된 기분을 만끽하던 눈부신 초여름. 날씨는 거짓말처럼 맑았고 마음 속에서는 세상 모두를 사랑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몽글몽글한 기분이 따뜻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초여름, 해질녘, 따스함, 이 넘실대는 마음의 흐름과 온도를 표현할 방법을 찾기 위해 로직의 악기를 이잡듯 뒤지고 있었다. 몽환적인 감성의 신스사운드를 발견하고 바로 그 순간의 바이브를 담아 예쁜 코드진행을 만들었다. 꽉 찬 마음에서 흘러나온 가사와 멜로디가 더해져 두번째 싱글 '안아줄게'가 탄생했다.
한때 바닥을 쳤던 나의 삶은 느린 상승곡선을 타기 시작했다. 숨통이 트이고 종종 행복감을 느끼는 기적이 이어졌다. 1년간 많은 것을 해낸 기특한 나 자신에게 선물을 주기로 했다. 4박5일간의 베트남 여행. 20대 시절 유럽 배낭여행 이후로 딱 10년 만이었다.
다낭행 비행기는 구름을 뚫고 날아 입국카드를 작성하는 시간이 왔다. 이름, 생년월일, 여권번호, 국적, 항공편명을 빠르게 적어내리고 나니 드디어 ‘직업’ 칸에 도달했다. 잠깐 심호흡을 하고 경건하게 빈칸을 채웠다.
‘Artist’
또박또박 적어 넣은 여섯개의 알파벳을 몇번인가 다시 눈으로 만져 보았다. 숨쉬기가 약간 어려워진 느낌은 기내 산소부족탓인지, 벅차오름때문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지만 몇번 심호흡을 하자 차츰 가라앉았다. 처음으로 입국카드를 작성한 것은 대학생 시절이었다. 아무런 고민없이 'student' 라고 적을 수 있었던 시절. 하지만 졸업 이후 일을 위해 떠난 여정에서 이 칸을 마주할때마다 나는 늘 내적갈등에 빠지게 됐다.
누군가는 HUMAN 이라고 적어 넣는다는, 어쩌면 아무 의미도 없는 그 작은 네모칸 속에서 나는 쓸모없는 존재론적 갈등에 빠져 한없이 작아지곤 했다. 이곳에 어떤 알파벳을 나열해야 정당한가. 내면의 심판관은 냉철한 시선으로 나를 주시하고 있었고, 나는 안절부절 눈치를 보다가 결국 'Instructor' 라고 적어 넣은 후 깊은 자괴감에 빠지곤 했다.
음악으로 돈을 벌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내게 월세를 내게 해주고, 닭발을 주문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은 ‘보컬 트레이너’라는 직업이었기 때문이었다. 수년간 주5일 했던 일은 예술이 아닌 교육이었다. 나는 ‘아티스트’ 이길 원했지만 ‘티쳐’ 로 살아가고 있었고 깊은 우물에 빠진 느낌이었다.
누군가는 레슨도 음악이지 않느냐며 의아해 했고, 자신의 직업을 비하한다고 느꼈는지 기분나빠 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단지 교육의 뜻이 없었을 뿐이다. 나는 교육자가 아닌 창작자를 꿈꾸었고, 조력자가 아닌 주인공이 되길 원했다. 하지만 불과 1년 전과 다르게 이제 나는 데뷔를 했고, 아티스트 네임을 가지고 있었고, 작품활동을 하고 있었다. 물론 닭발 한번 시켜먹기 어려운 저작권료가 입금 되었지만, 단돈 1원이라도 내 음악이 벌어다주는 돈이 통장에 입금된다는 사실에 나는 비로소 ‘아.티.스.트’ 가 된 기분이었다.
그동안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아티스트로 인정하지 못해 왔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