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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두 Oct 24. 2020

지나고 나니 모든 시간이 눈부셨다

“안녕하세요 산모님, 어디 놀러 가시나 봐요?”

“아 네, 얼른 진료 보고 캠핑 가려고요”    


어디로 가느냐, 언제 돌아오느냐 등등 꼬치꼬치 캐물으시고는 의사 선생님은 걱정 섞인 당부의 말을 하셨다. 그토록 기다기던 안정기에 접어든 것도 오래전, 내가 해외여행 가는 것도 아니고 등산을 가는 것도 아니고 나름 임산부임을 충분히 고려해 그나마 편한 캠핑을 하겠다는데도 걱정을 들어야 한다는 사실에 순간 섭섭한 마음에 눈물까지 그렁그렁해졌었다. 


혹시라도  놀러 못 가게 하는 엄마 앞에서 떼를 쓰는 어린아이처럼 보였는지, 선생님은 당부는 하되 네가 알아서 하라는 식으로 서둘러 마무리하셨다.     

왜 그때 우리가 바닥이 자갈인 캠핑장을 택했는지는 오래되어서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요즘처럼 캠핑 장비 일체를 준비해서 가는 캠핑이 아니라, 등산에서 급히 방향을 바꾼 우리의 캠핑 장비는 허접하기 짝이 없었다. 홀몸이었으면 어느 산 대피소에서도 모포 한 장 깔고 덮으면 바로 숙면을 취하던 나였지만, 아가와 함께 하는 첫 외박은 철없는 엄마를 긴장하고 또 긴장하게 했었다. 더불어 텐트를 치고 장비를 세팅하는 동안 갑작스럽게 불어 닥친 비바람에 이제까지의 야생 생존 본능과 예비 부모로서의 조심스러운 마음 사이에서 치열하게 갈등하다가 결국 두어 시간의 장비 세팅이 이루어진 다음에야 철수를 결정했었다. 남편은 비바람을 맞으며 겨우겨우 날아가는 텐트를 다 치고 난 후 조금 기다려보자는 의견이었지만 나는 곧바로 철수를 결정했다. 남편은 다시 비바람을 맞으며 다시 텐트를 철수시켰다. 출발할 무렵 비바람은 잦아들고 날은 다시 평온해졌었다.  옆집 텐트들은 평온하게 다시 캠핑의 즐거움을 즐기기 시작할 무렵 우리는 집으로 출발했다.

이날 우리가 찍은 영화의 제목은 한국판 덤 엔 더머 속편이지 않았을까.  


첫 캠핑이 실패로 돌아간 후, 조금 더 준비해서 두 번째 캠핑에 도전했다. 차를 타고 다소 지름길인 비포장도로를 운전해 캠핑장으로 향했다. 그 길이 지름길이라 시간과 돈을 아낄 수  있다는 지극히 단순하기 짝이 없는 생각으로 비포장도로를 달려 목적지에 도착했다. 물론 돌아오는 길에도 우리는 같은 길을 선택했고 비포장도로가 전해주는 위아래로 약간의 흔들리는 승차감을 약 30분 정도 감내해야 했다. 집으로 돌아온 후, 저녁 무렵부터 배가 살살 아픈 거 같기도 하고 당기는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그 느낌을 뭐라 설명하기 어렵지만 불편하기는 했다. 병원으로 연락을 해보았고 즉시 병원으로 달려오라는 답을 들으면서 설마 그 정도로 내 몸에 어떤 이상이 생길 수 있겠냐는 생각을 하면서 병원 응급실 문을 열었다. 


검사 결과 약간의 자궁 수축이 있다며 며칠 입원해서 안정을 취하라는 지시가 내려지고 병원으로 내달려오시는 우리 엄마의 얼굴은 속상함과 분노로 일그러져 내가 임산부만 아니었다면 틀림없이 등짝에 불꽃 스매싱을 꽂으셨을 것이다.

    

‘아, 이런 거였구나. 내가 지켜야 하는 이 조그마한 아기는 이런 것도 힘들어하는구나’라는 뒤늦은 반성과 참회를 하며 병원 입원 생활을 했다. 입원해보니 병실엔 다들 나보다 한참 어린 나이의 산모들이 많았다. 누워서 그들의 대화를 들어보니 이미 다들 오랜 병원 생활로 서로 많이 친숙해진 모양이었다. 병원에서 절대 안정이란 처방을 받고 아기와 만나는 날까지 그 답답한 병원 생활을 나보다 훨씬 어린 엄마들이 애써 밝은 분위기로 잘 버티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내 마음 한편이 뭉클해지기도 했었다. 아마도 그건 세대를 아우르는 동지 의식이라고 할까. 나는 2~3일 입원 후 앞으로는 더욱 조심하라는 경고를 겸허히 받아들이고 퇴원할 수 있는 사실에 감사하며 다시는 이런 일로 병원을 들락거리지 않겠다 맹세했다.     


그때부터는 과잉 조심이니 답답함이니 하는 것은 임산부인 나에게 사치임을 스스로 깨닫고 역시 백 마디 잔소리보다 몸소 느껴보는 것이 낫다는 성인의 말씀을 되새기며 매일매일 감사하며 소소한 일상을 지냈다.  드디어 임신 막달, 슬슬 아래로 내려와 출산 준비를 해야 하는데 우리 아이는 여전히 위에서 엄청 활발하게 놀고 있다고 했다. 


병원에선 이제 내가 하고 싶은 거 다 해도 된다고 하셨다. 이불을 빨던지 쪼그리고 앉아 방을 닦던지 내가 하고 싶은 거 다 하라고.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14층 아파트 계단도 오르내리고, 일요일 오전엔 배낭을 싸서 집 근처 산으로 달려갔다. 정상 아래까지는 차로 이동하고 미끄러지는 것만 주의하면 완만한 능선을 걷는 것은 큰 무리는 없어 보였다. 열 달을 동네 공원 둘레길만 걷다가 막달에 산꼭대기에 올라서 느껴보는 바람의 시원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능선을 걷다가 우연히 지나가던 몇몇 산 친구 무리를 만나 점심을 얻어먹게 되었다. 등산으로 인한 허기에다 만삭의 무한 식욕이 더해져 그들의 배낭 안에 있는 대부분의 음식은 내 차지였다. 그들은 처음엔 산 위에서 우연히 만삭의 나를 만났으니 얼마나 놀랍고도 반가웠을까? 나는 이것저것 꺼내어 먹어보라 권하는 그들의 점심과 간식을 정말 순식간에 해치워 버렸다. 친구 한 명이 식빵을 약한 버너 불에 구워서 딸기잼을 발라주었는데 그 맛이 정말 너무 맛있었다. 




염치없이 더 없어? 또 더 없어?라고 외치는 나를 남편이 인근 식당에 가자고 다독여 일어났지만, 그날의 딸기잼 토스트는 내 생애 최고의 토스트였다. 아마 내가 그 토스트 맛을 재현할 수 있다면 난 바로 토스트 식당을 차릴 것 같다.    


매사에 서툴렀던 나의 임신 기간이 끝나고 나니, 임신하고도 직장과 가정생활을 병행하는 엄마들 그리고 다둥이 엄마들을 보면 나는 나이에 상관없이 그분들께 존경심이 생긴다. 때로는 힘들고 때로는 경이롭고 행복했던 시간들, 처음엔 내가 늦은 나이 엄마라는 타이틀 덕분에 두렵고 걱정만 많았었지만, 지나고 나니 정말 모든 날이 감사하고 행복했었다.     


엄마가 되는 순간부터 모든 엄마는 아이를 지켜내기 위해서는 자신의 모든 것을 최전선에 건다. 이십 대 초반에 나를 낳은 우리 엄마부터 마흔 살 넘어 임신한 나까지, 엄마가 되기에 늦은 나이, 아까운 나이, 늦은 나이.. 이런 건 없는 것 같다.


 누구나 엄마가 된 그 순간부터 인고의 시간을 담담히 감내하며 그렇게 서서히 엄마가 되는 과정을 이수하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엄마가 거쳐나가는 시간 동안 혼자만 손을 위로 쭉 뻗어 나는 고위험군 약체라고 계속 혼자 걱정하고 불안해하며 소리쳐 외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을. 혹시라도 입덧하지 않는다고, 또는 배가 뭉치거나 출혈이 조금 있어도 ‘역시 난 고위험군이야’라며 스스로 약점 잡고 위축되어 불안해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라는 아쉬운 마음마저 들었다.    


얼마 전, 친한 동생이 결혼 소식을 알려왔다. 10년 전 나의 청첩장을 받고는 “와 언니 대단하다, 멋지다”라고 축하해주던 그녀. 주변에 결혼이 늦은 사람들에게 자기가 아는 언니도 마흔두 살에 결혼해서 아이 낳고 잘살고 있다며 나의 얘기를 주변에 널리 알리고 있다는 그녀가 나보다 더 늦은 43살에 결혼을 한다고 했다. 

어느 날 그녀가 혹시나 나처럼 임신과 출산에 대해 걱정을 한다면, 나는 나의 서툰 임신 일기를 함께 공유하며 그녀의 곁을 지키는 든든한 지원군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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