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울했다.
임신 사실을 테스트한 후 남편과 산부인과를 찾은 날.
내 주민등록번호만 가지고 나를 고위험 임산부님이라고 분류를 하다니.
마흔 살이 넘어 자연 임신의 가능성이 현저히 낮아진다고 하는 의학적 팩트 앞에 가족과 의료진 모두에게 축하와 칭찬을 받고 싶었던 건 아니었지만, 그저 불과 몇 달 전만 하더라도 나는 지리산 종주와 암벽 등반 운동을 즐기는 나름 성인 평균 이상의 체력의 소유자로, 다른 건 몰라도 체력만큼은 걱정하지 않고 살았었다. 다소 다른 분야이긴 하지만 임신과 출산 분야에선 노산으로 모든 것에 주의와 당부를 기울여야 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진료를 보는 내내 앞으로 10개월 동안 조심하시라는 잔소리만 내내 들어야 했다.
내가 아이를 만드는 엄마가 되는 과정에서는 다소 약체에 속한다는 얘기였고 한껏 들떠있는 철없고 늦은 엄마를 기죽게 만드는 말만 반복했다.
약체를 구분 짓는 기준이 단지 생년월일에 근거한 나이라는 것인데 말이다. 속으로는 내가 그다지 약체에 속하지 않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있긴 하지만, 뭐 그건 나만의 생각이고, 여러 의학적 임상 사례와 많은 사람이 경험한 바에 따르면 나는 그저 고령 산모에다 고위험군 임산부에 속한다는 사실이었다.
지난 40여 년 동안 자신만을 위한 멋진 인생을 살았다면, 앞으로 남은 열 달은 이 세상에 스스로 말하고 생각할 수 있는 하나의 작은 우주를 탄생시키는 멋진 과정을 행복하게 즐겨보시라고 영화 같은 메시지를 남겨줘도 좋았을 텐데...
산부인과 진료를 다녀온 후 주변의 과한 몸조심 분위기 때문이었는지, 조심이라는 단어에 대한 스트레스 반응으로 심한 변비에 따른 약간의 유혈 사태를 맞이하였다. 임신 초기 유산에 대한 거대한 공포감으로 급기야 떨어졌다는 단어조차 사용을 꺼렸던 기억이 난다. 지나고 생각하면 얼마나 코믹하고 말도 안 되는 상황인지 물건이 탁자에서 떨어졌다는 말도 사용하기 싫어서 물건이 땅에 붙었다고 생각할 정도였으니 그 당시 몇 방울의 유혈사태는 나를 꼼짝도 못 하고 침대에 누워 며칠을 보내게 할 만큼 충격적이었다. 물론 누구도 그것이 유산의 징조라고 판단하진 않았지만,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집안 어른들은 절대 안정을 권하셨고 나는 꼼짝없이 누워 머리도 못 감은 채 며칠을 보내야 했었다.
절대 안정의 고비를 넘어 중반으로 접어들 즈음에는, 나 같은 고위험 임산부들을 위한 여러 검사를 줄줄이 안내받았다. 외모상으로는 그냥 나도 여느 대기실에 앉아 있는 다른 임산부들과 별 차이 없이 비슷하게 보일 것 같은데, 나에게는 뭘 그리 많이도 권하는지. 권하는 검사들을 굳이 하고 싶지도 않지만, 또 하지 않으면 왠지 찝찝하기도 하고 내가 고위험군이라 결과들이 무서워 자칫 피하는 것처럼 느껴져 오히려 더 당당히 검사에 임했던 기억도 난다. 겉으론 당당하게 아무렇지 않은 듯 검사에 임하지만, 결과를 듣는 순간까지 떨리는 마음으로 애를 태우며 기다리며 그렇게 여러 고비를 넘어왔다.
옛날엔 우리 엄마는 하지도 않았던 그 많은 검사를 통과해야지만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나는야 고령 임산부이다.
그러나 애초의 걱정과 불안과는 달리, 나는 임신 기간 중 입덧조차도 별로 하지 않았다. 입덧이라 해봐야 임신 전보다 늘어난 식사량으로 과식한 날 탄산음료 정도 먹고 싶은 정도였으니까. 고위험군이라고 초반에 잔뜩 졸아 있던 나는 고맙게도 무난한 날들이 이어지며 슬슬 동네 산꼭대기를 바라보며 회상에 젖었다.
남편과 나는 산에서 만나, 한 3년 정도 함께 산에 다녔었다. 앞에서 든든한 길잡이 역할을 하던 그가 결혼하자고 했을 때 나는 거절했었다. 이유 중 한 가지는 우리의 나이 차이도 있었다. 남편은 나보다 일곱 살 연하였고 나는 그와 산길을 걸어갈 땐 나이 차이에 대한 어떤 불편도 느끼지 않았지만, 결혼은 산 아래 현실이지 않나. 그때 나는 남편에게 이런 말을 했던 기억이 난다.
“나는 내 나이 마흔 살이 자랑스럽다. 사십 년 동안 열심히 살아온 내가 어느 날 늙어가는 속도를 당신과 비교하며 내 나잇살을 자랑스러워하지 않을
순간이 올까 두렵다”
거절하는 나의 말에 남편은 “걱정하지 마, 내가 술 담배를 많이 해서 당신보다 더 늙어 보이게 만들게” 우리의 나이 차이를 극복하는 방법을 이토록 진지하고도 단순하게 말하는 남편이 얼마나 말도 안 되게 웃기는지, 난 그 말에 빵 터져 헤어지겠다는 그 순간을 폭소로 장식했다. 가끔 한 번씩 옛날 그 이야기를 하면 남편은 자기가 그땐 미. 쳤. 었. 지.라고 머리를 쥐어뜯으며 자책을 하지만 하여튼 두고두고 생각해도 웃긴 이야기다.
남편과 나는 봄에는 산에 연둣빛을 보러 가고 여름엔 땀으로 흠뻑 젖은 시원한 계곡 산행 그리고 가을 온통 울긋불긋한 단풍 보러 줄 서서 다니기도 하고 겨울엔 눈 덮인 내리막길에서 신나게 눈썰매 타고 내려오는 스릴을 즐기며 사계절을 다녔었다. 이제 나는 언제 다시 가보려나.. 기약 없는 미래를 약속하며 지금 나의 배 속에서 꼬물꼬물 자라는 아이가 태어나서 내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일을 함께할 그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