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한 살의 어느 가을날, 나는 결혼을 했다.
그날에 관한 어떤 계획과 설계도 내 머릿속엔 없었었는데,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 같았던 그 하루가 존재해 버렸다. 이왕 하는 거 짧은 미니 드레스를 입고 싶었는데 목덜미 잡고 쓰러지실 엄마 얼굴이 그려져 그것만은 참았다. 그날 내 결혼식장에는 이제껏 알아왔던 직장동료, 학교 선후배, 동문 친구들보다 알고 지낸 지 얼마 되진 않았지만, 여러 산을 함께 오르며 내가 안전하게 출발점으로 다시 되돌아올 수 있도록 함께 해준 산 친구들이 더 많았다. 10년 전 나의 결혼 기념사진 속에는 하객룩으로 등산복을 입은 사람들이 절반 이상이나 된다. 나의 지인들은 갑작스러운 결혼 소식에 깜짝 놀라 실화냐? 제정신이냐? 등등의 반응을 보였고 지역적 한계 또는 여러 가정환경 등으로 참석률이 그리 높진 않았던 탓도 있었겠다.
나는 비혼 주의자였다.
생각해 보면, 난 늘 그 무엇인가가 되기 위하여 나 자신을 부지런히 담금질하였다. 그 과정에서 혹시나 가정이나 육아가 걸림돌이 될까 걱정하며, 연애는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결혼 적령기가 지난 후에는 내 돈으로 왼손 약지에 얇은 링 반지 하나 사서 끼고.. 인생에서 결혼과 육아가 생략된, 최대한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살아보고자 나름대로 열심히 앞만 보고 살았던 기억이 난다. 복잡하고 여러 가지 역할을 동시에 수행해야 하는 어른의 이미지는 내겐 너무나 어려워 보이고 자기희생이 담보되어야만 하는 것 같아 아예 피하고 싶었다.
나는 연구직 공무원을 그만두고 미국으로 떠나 한의학을 공부하고 그곳에서 한의사로서 나름 만족하며 살고 있었다. 한의사라는 직업이 내 인생의 목적이었는지, 미국이라는 타국 땅에서의 삶이 목적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런 내게 아버지는 한국으로의 귀국을 원하셨고 “네가 이 미국에서 산다면 너의 삶은 완성이 될지는 모르나 우리 가족에서 나는 큰딸을 잃어버리는 셈이다. 한의사를 원했다면 해봤지 않느냐? 한의사를 하려고 태어난 건 아니지 않나? 이제 한국으로 돌아가자”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처음에는 아버지의 설득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고 한마디로 거절했었지만 계속되는 설득에 ‘그래 나도 미국에서 한의사를 하려고 태어난 건 아니지. 가족의 한 구성원으로서 삶도 중요하지’라고 어느 정도 설득이 되었고 계속되는 아버지의 설득에 한국으로 돌아와 한 3개월 정도 부모님과 함께 지내며 여행도 다니고 다섯 남매의 큰딸 노릇도 하며 이후 다시 내가 있던 자리로 돌아가리라 마음먹었다.
한국에서의 새로운 일자리와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는 것에 관해 갈팡질팡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답답해하는 나에게 동생이 등산모임을 소개해 주었고, 태어나 처음으로 영남 알프스 영축산이라는 곳에 오르게 되었다. 3월 초순, 1,000m 넘는 산에는 겨우내 쌓인 눈이 막 녹기 시작하며 땅은 질척거리고 가파른 등산로 덕분에 면티에 기모 셔츠까지 입은 나의 얼굴은 곧 터질 것 같은 잘 익은 토마토, 온몸은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앞사람 쫒아가기 바빠 쟈켓 하나 벗을 시간도 없이 오직 낙오되지 않겠다는 생각만으로 부지런히 땅만 보고 걷고 또 걸었다. 정상에 도착하니 눈이 시리도록 오직 파랗기만 한 하늘과 아직 채 녹지 않은 겨우내 쌓인 눈을 머금은 차디찬 바람이 여러 생각으로 복잡스러운 내 머릿속을 관통하려는 듯 아주 속. 시. 원. 하게 불었다.
그날 내가 본 하늘은 생애 최고의 파란 하늘이었으며 머릿속 관통 바람은 산아래서 지고 올라간 나의 세상 고민을 한방에 다 날려버리고도 남을 기세였다.
한국으로 돌아온 이후 24시간 내내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던 내게, 숨이 턱 밑까지 치받는 서너 시간 후 볼 수 있는 정상에서의 탁 트인 전망과 바람은 지금도 잊지 못할 내 인생 최고의 희열을 느끼게 해 주었다.
왜 산에 오르는가?라는 질문에 혹자는 산이 거기 있으니까,라고 답을 한다는 말을 들었다. 나에게 산을 오르는 이유는 세상 고민을 잠시 잊을 수 있는 시간을 벌기 위해서라고 말하고 싶었다.
등에 진 배낭의 무게만큼 산 아래 고민을 잔뜩 담고 한발 한 발 내딛다 보면 숨이 턱 밑까지 차오르고 앞사람의 발자국을 따라가야지 다시 출발점으로 올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 그저 한 발 한 발 내딛는 시간이 그땐 참으로 소중했었다. 이후 나는 정말 미친 듯이 산에 올랐다. 처음엔 내가 가진 인생 고민에서 해방되고 싶어 산에 갔지만, 점차 산이 가진 매력에 빠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산에 오르는 다양한 직업군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살면서 한 가지 직업을 열심히 해서 인정받는 위치에 오른다는 의미의 다른 면에는 그동안 만나는 사람들도 매우 한정적이고 생각하는 영역도 제한적인 삶을 살았다는 뜻이 될 수 있다는 걸 그때 깨달았다. 등산의 매력은 평등하다는 것이다. 신체적인 한계도 경제적인 한계도 모두 50센티 내외의 한걸음에 의지해 그 한 걸음, 한 걸음으로 산을 오른다는 것이 아주 매력적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면서 함께 산을 오르는 산 친구도 생기고, 결국 나는 산 위에서 만난 산 친구와 평생 함께 산을 오르자는 소박한 소망으로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때 내 나이 41살, 인생이 여행 같을 수 있다고 믿었다.
20대 중반, 유럽 배낭여행 중 스위스에서 내가 묵었던 게스트하우스 주인은 배낭여행을 하다가 그곳이 좋아서 아예 정착해서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며 여행자들을 만나는 삶을 살고 있었다. 그 당시 나의 여행 일정은 절반을 넘어서서, 출발했을 때의 설렘보다는 한 달 넘은 여행의 피로감으로 다소 지쳐있었다. 외국의 정취도 좋고 자유로움도 좋지만, 어서 다시 제자리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마음 그리고 여행을 안전하게 마무리하고 싶은 나에겐 다소 놀랍고도 신기하게 느껴졌다. 인생이 은하철도 999와 같은 기차여행이라면, 예전의 나는 중간중간 내려 여행을 하거나 내려 잠시 길을 잃더라도 언젠가 다시 내가 탔던 기차에 다시 오르기 위해 내달리는 노력도 마다하지 않을뿐더러 아예 노선이 다른 기차로 옮겨 탈 용기는 내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 오십 살이 넘어 생각해 보면, 결혼을 결심하고 이제껏 타고 다니던 내 인생 기차의 노선을 바꿔 탈 용기를 낸 어느 날, 문득 스위스의 멋진 풍경과 함께 인생도 여행 같을 수 있다는 띄엄띄엄 알아들었던 이탈리안 아저씨의 말씀이 떠올랐다.
그러나 결혼은 하지만, 아이는 낳지 않겠다고 말했었다.
이 나이에 결혼해서 아이까지 낳아 내 남은 인생을 육아에 허덕이며 사는 건 생각만 해도 두려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엄마에 어울리는 성향이 아니라고 스스로 판단했다. 엄마 스타일보다는 이모 스타일에 적합하다고 생각했었다. 이모는 내가 원할 때 안고 내가 원치 않으면 치고 빠질 수 있는, 사랑은 하되 책임은 안 져도 되는 그런 관계라고 할까? 남편에게도 정확하게 뜻을 전달하고 동의도 받은 상태였다.
결혼 후 남편은 바닥을 내려다보며 조그마한 목소리로 “우리도 아이를 갖는 게 어떨까? 물론 자기 마음에 달렸지만….”
말은 우리의 아이라고 시작하지만, 임신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여자인 내 몫으로 우리의 아이를 만드는 나의 과정이 아닌가. 물론 처음에는 단호하게 거절했었다. 내 인생에서 결혼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용감하고도 무모한 도전이라고.
남편의 조심스럽고도 계속되는 제안에 나의 마음이 어떻게 움직였는지는 솔직히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이를 낳아서 키워보니 내 아이지만, 이 아이의 존재를 내가 선택했다는 건 나의 오만이고 착각인 듯하다. 사랑하는 사람과 살고 그 사랑의 결실로 생긴 아이를 내가 택하거나 택하지 않는 건 나만의 착각이지 그건 이미 운명처럼 내 삶에 정해져 있던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임신 사실을 알았을 때, 그 순간 내가 엄마가 되었고 앞으로 지켜주어야 하는 존재가 생겼다는 사실에 기쁨과 동시에 늦은 나이 임신이란 여러 가지 걱정으로 앞으로의 여정에 대한 걱정과 불안이 함께 했다.
막연히 이 나이에 아이까지 낳아?라고 생각했던 것이 바로 그 순간, 이 나이라도
아이를 꼭 지켜주겠다는 강한 엄마 모드로 급변경되었다.
덧붙여 이렇게 결혼하고 아이를 원할 줄 알았으면 다들 할 때 한 살이라도 더 젊었을 때 하면 좋았을 것이라는 엄마의 책망 어린 잔소리를 등 뒤로 하며, 여기까지 돌고 돌아오는 내 인생길에 엄마 몰래 박수는 보내고 싶었다.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에도, 옆에서 계속 무언가에 관해 나에게 말을 하는 이쁜 딸을 보면 그저 ‘나와 함께 해줘서 고맙다’라는 말을 되뇔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