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체르니 몇 쳐?

수치와 지표로 규정되는 한 사람의 음악성

체르니라면 왕년에 피아노를 한 번쯤 쳐본 사람이라면 어렵지 않게 들어보았을 것입니다. 바이엘을 뗀 사람이 그다음으로 치는 피아노 연습 교본이 바로 체르니이기 때문입니다. 한 번 체르니를 치기 시작한 사람이라면 아마도 그 사람이 피아노 학원을 끊을 때까지 계속 쳤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체르니는 대중적으로 친숙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으며, 다양한 피아노 연습곡을 출판하였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연습 교본으로는 체르니 100이 있습니다. 체르니 중에서도 가장 쉽다고 하는 책이죠. 어렸을 적에 피아노를 배운 사람은 반드시 거쳐갔던 관문이기도 합니다.

체르니 교본도 하농과 마찬가지로 음악가의 이름으로부터 유래하였습니다. 오스트리아 빈 출신의 음악가인 카를 체르니(Carl Czerny, 1791~1857)가 바로 그 인물이었죠. 체르니는 어렸을 때부터 천재적인 음악성을 보였다고 합니다. 그가 베토벤 앞에서 <비창 소나타>를 연주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체르니의 음악성을 발견한 베토벤이 바로 제자를 삼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합니다. 베토벤의 제자였던 체르니는 나중에 대(大)음악가를 후학으로 양성하게 됩니다. 체르니의 제자는 바로 프란츠 리스트(Franz Liszt)였던 것이죠. 역시 거장들은 무언가 통하는 게 있는가 봅니다.

Carl Czerny (1791~1857)

체르니는 약 1,000여 개에 가까운 곡들을 작곡하였습니다. 그중에는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체르니 100을 포함하여, 체르니 30, 체르니 40, 체르니 50 등이 있지요. 성인이 되어 피아노를 시작하는 사람이 체르니를 연습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어린이, 학생들이 피아노 학원에 등록하면 반드시 체르니를 쳤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저도 약 유년 시절부터 중학생 때까지 약 12년간 피아노를 연습하면서, 체르니를 치지 않았던 적은 가히 없었으니까요. 그만큼 체르니는 피아노를 치는 사람들 사이에서 자주 연주되는 연습곡이었습니다.

어렸을 때 학교나 학원에서 친구가 피아노를 친다고 하면 항상 나오는 말이 있었습니다. 그건 바로 “너는 체르니 몇 쳐?”라는 물음이었습니다. 피아노를 오래 다닌 사람일수록 체르니 난이도가 높은 책을 치고 있다고 대답하곤 했었습니다. 누군가가 체르니 100을 친다고 하면, 그의 피아노 실력은 초보적인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그런 친구를 보면 저를 포함한 다른 애들은 “애걔 겨우 그거 쳐?”라고 하면서 놀리기도 했습니다. 물론 장난이었겠지만, 분명 은연중에 어느 체르니를 치느냐에 따라서 한 사람의 음악 실력을 평가하려는 의도가 있었습니다.

체르니 100을 치면 초보, 체르니 30을 치면 그래도 피아노를 조금 배웠다고 할 수 있는 사람, 체르니 40을 치면 피아노 잘 치는 사람, 체르니 50을 치면 피아노 대마왕(?) 뭐 이런 식으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께 피아노를 배웠기 때문에 비교적 다른 친구들보다는 빠르게 체르니 30과 40을 끝냈습니다. 아마도 초등학생 6학년 정도쯤에 체르니 50을 치기 시작했으니 말입니다. 그러니까 체르니를 몇 치느냐가 피아노 실력을 좌우한다고 믿었던 것이지요.

체르니 30

물론 그게 아주 틀린 말은 아닙니다. 높은 단계의 체르니를 치기 위해서는 그만큼 피아노에 쏟은 시간이 많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대개 연습량에 비례하여 피아노 실력이 향상되므로, 그 말은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과연 체르니만으로 누군가의 피아노 실력과 음악성이 평가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이 듭니다. 아니, 애초에 한 사람과 다른 사람의 음악성이 비교되거나 서열을 가릴 만한 것인지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다양한 콩쿠르에서 1, 2, 3위를 가리기도 하지만, 저는 이게 일반적인 현상이라고 보기는 힘들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신춘문예 상을 받은 작가만이 최고의 글을 써내는 것은 아니듯이, 각각의 피아노 연주와 음악적 표현은 나름의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예전에 가졌던 ‘어떤 체르니를 치느냐에 따라 피아노 실력이 규정된다는 마음’은 어쩌면 현재진행형일지도 모릅니다. 오늘날에도 저는 특정한 잣대를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고자 하는 습성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그게 전적으로 올바르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입니다. 가령, 무엇이 있을까요? 학력을 생각해보죠. 일반적으로 좋은 학부를 나온 사람을, 아니면 대학원에서 석박사 과정을 마친 사람을, 혹은 유학을 마치고 온 사람을 더 우러러보곤 했습니다. 실제로 만나보지는 않았어도 그냥 지레 짐작으로 말이죠.

앞으로 연구자가 되기를 희망하는 저로서는 연구 업적 등도 하나의 예시가 될 수 있겠습니다. 진정한 연구자의 기준을 단순히 연구 논문을 몇 편 써냈는지로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그 연구자의 생각과 목적, 계획, 이념, 앞으로의 목표를 위해 지금까지 무슨 준비를 하였는지, 인간성 등은 논문의 편수로 가늠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현실이 너무 팍팍해서 그런지 우리는 가끔 사람을 특정한 잣대로 규정하고 판단해버립니다. 일정한 기준을 세워놓고 그것을 넘으면 우러러보고, 거기에 미달되면 거들떠도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체르니를 이야기하면서 무슨 문제의식을 그렇게 멀리까지 가지고 가냐고 질문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이것이 제가 지금 체르니를 다시 생각하며 느끼는 바입니다. 만약 이것을 알았더라면, 저는 그렇게 열심히 체르니를 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른 친구들보다 잘 친다는 소리를 듣기 위해 체르니를 그렇게 빨리 나가도 되지 않았다는 의미죠. 차라리 체르니를 칠 시간에 제가 정말로 좋아하는 곡을 한 번이라도 더 쳤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뭐, 다 지나버린 얘기이지만요.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을 규정하는 잣대이자 지표가 되는 ‘체르니’는 무엇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