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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luie Dec 08. 2020

협상의 기술, 부동산 계약에 써먹다

이것이 바로 삶을 깨우는 지식인가

회사마다 직원을 가르쳐 더 잘 써먹기 위한 교육들을 많이 진행하곤 하는데, 경영/경제'를 체계적으로 배워보지 못한 나로선 회사에서 알려주는 몇몇 실무적인 기술들을 꽤 재미있게 청강하곤 했다.


그 중 의외로 개인 생활에 도움을 받았던 것이 '협상의 기술'이었다. 협상의 기술이라고 해 봤자 초급 단계의 이론을 조금 맛보는 정도였지만, 당시 인생 최대의 협상을 눈앞에 두고 있었던 나에게는 내 입장을 정리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아쉽게도 그 기술이 회사 일에는 그다지 적용이 안되었다. 이런.




2016년 가을, 우리 부부는 우연히 찾아 낸 서울 도심의 작은 집을 매매하기 위해 낯선 동네에 발을 딛고 있었다. 급매물로 나왔기에 확실히 평당 매매가가 주변의 집보다 낮았고, 일단 집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던 상태. 하지만 협상의 기본은 '물건이 마음에 드는 것을 들키지 마라'이다. 그래서 우리는 성격과 마침 잘 맞는 무뚝뚝한 표정을 장착하고 부동산 문을 두드렸다.


「 (우리를 보며) 아유, 오셨어요. (집 주인을 보며) 근데 사장님, 방금 하신 얘기는 좀 어렵겠는데.. 」


무언가 난처한 표정으로 부동산 사장님이 우리를 맞았다. '나는 아쉬울 것이 없다, 우위다'는 표현과도 같은 쩍벌 포즈를 하고 부동산의 낡은 의자에 앉아 있던 집 주인이 우리를 힐끔 쳐다보았다.


집 주인은 오랜 기간 이 곳에서 살았던 사람으로, 사업이 잘 되지 않아 집을 팔고 빚을 처분하려 하고 있었다. 단독주택은 상대적으로 쉽게 매매가 이루어지지 않기에 좀 여유를 두고 급매물로 내놓았는데, 내놓은 지 한 달 만에 우리가 계약 의사를 밝혀 온 것.


「 그게 안 받아들여지면 난 계약 못하지 」


음? 이게 무슨 소리지. 계약을 하겠다고 구두 협의가 완료되어서 인감까지 챙겨온 우리를 보고, 집 주인은 계약을 위한 세 가지 조건을 내놓았다.


1. 지금 돈이 급하니 선금과 중도금의 비중을 높이고, 지급을 일찍 해 달라.
2. 당장 집을 못 구하겠으니 집이 구해질 때까지 입주 시기를 늦추라.
3. 세입자는 내보낼 수 없으니 매매할 때 안고 가라.


아니, 이런 위험 부담과 여러 가지 불편을 감수하라고 일방적으로 통보하다니 - 우리는 다소 어이가 없었다. 다음 순간, 그래도 어르신인데 부드럽게 이야기해서 풀어볼까 생각했으나 협상의 또 하나 기본은 '미소를 짓지 마라'임을 기억하고 더 표정을 굳혔다.


사실 1번은 일단 요구한 금액과 일시에 맞춰 돈을 줄 수가 없었고, 2번은 우리도 오갈 데가 없어지기에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집을 리모델링할 텐데, 세입자가 있으면 불가능하고 최악의 경우 명도를 해야 하는 일도 발생한다. 또 그런 말이 있다. 상대의 첫 제안은 일단 모두 거절하라.


그러나 모두 받아들이기가 어렵다고 하자 집 주인은 「 아니, 아무 것도 못 해 주겠다는데 난 계약 못하지 」 라고 앵무새같이 되풀이했다.




지리멸렬한 방어전이 계속되고, 우리의 거절과 집 주인의 고집이 이어졌다. 결국 Y가 못박듯 말했다.


「 사실, 세 조건 다 저희로선 받아들일 수 없어요. 다만, 세입자를 책임지고 내보내신다는 내용을 특약에 넣어 주시면 이사 비용을 조금 얹어서 매매할 수 있어요. 」


어찌 보면 협상 가능한 영역을 넓힌 셈인데, 그러면서 예상 가능한 가장 낮은 비용을 이사 비용으로 제안했다. 집 주인은 다소 마음이 흔들린 듯 했지만, 이사 비용을 조금 더 달라고 하면서 한 번 더 고집을 부렸다.


그렇지 않아도 그의 계속된 무례함으로 인해 화가 나 있던 Y가 내 쪽을 힐끗 돌아보았다. 무언의 눈빛을 주고 받은 우리는, 각자의 행동을 취했다.


「 정 그러시다면 어쩔 수가 없네요. 저흰 최대한 협의하고 싶었는데. 」


Y의 말에 맞춰 옆에 앉아 있던 나는 코트와 가방을 집고, 볼펜을 가방 속에 챙겨 넣었다. 협상의 기술에 이런 건 나오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일종의 파토의 기술(?)같은 것이었다. 사실 그 즈음엔 지쳐서, '이 집은 우리와 인연이 아니구나' 생각했던 것도 사실이다.


우리가 나가려고 하자 집 주인은 우리를 잡으며  「 이 집이 많이 마음에 듭니까? 」 라고 물어왔다. 아마 협상을 재개하고자, 그리고 슬슬 마무리를 짓고자 하는 제스처라고 생각했다.  「 맘에 드니까 여기까지 온 겁니다만, 이렇게 얘기가 안 되면 그만둬야죠. 」



 그래요, 그럼 계약합시다.


이렇게 우리의 최초이자 최대의, 어설프고도 결사적이었던 협상은 끝났다. 반절의 성공으로. 어머님은 아직 그 때 이사 비용을 안 줘도 됐을 거라고 하신다


※ 이렇게 매매 계약을 하고, 집을 고쳐서 사는 이야기는 브런치북에 있습니다.


https://brunch.co.kr/brunchbook/houseinse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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