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이 하얀 꽃다발 같은 ‘비숑’ 아기를 태운 유모차를 보고, 노신사분들이 눈을 흘기며 비난하는 말이다.
세대 갈등은 이따금 공원에서 <개모차>를 마주하고 발생한다.
나라가 다 망하기 전에 할아버지들이 먼저 젊은 사람들과 그들의 개를 연륜으로 품어주면 얼마나 좋을까. 진짜로 이 나라가 다 망하기 전에.
곧 휠체어에 앉아 다음 세대의 보살핌을 받게 될 은발의 할아버지들.
노소를 불문하고 나라가 망하기 전에 유한한 우리들의 생이 먼저 소멸하게 될 것임을 정녕 할아버지들은 모르고 계신단 말인가. 안쓰러운 할아버지들이 나라가 망할 걱정에, 비숑 아기를 태운 개모차를 조심스럽게 운전하는 아가씨의 뒷머리를 향해 총구 없는 총신을 겨눈다. 벌레보다 더한 것을 본 듯한 표정으로 할아버지들은 아가씨가 흘려듣지 못하도록 충분한 성량으로 언성을 높여 오래도록 성토했다.
새로운 형식의 가족 <개모차를 탄 반려견 아이들> (사진 출처. 네이버)
은총 가득한 주일날, 비숑 견주 아가씨의 평화로움을 깰 권리가 할아버지들에게 있을 리 없다. 할아버지들은 언제쯤 이 세상을 포용하실 수 있을까.
스스로 자각하고 해법을 찾지 못한다면 남은 삶은 풀 한 포기 자라나지 못할 만큼 황량해질 것이기에 안타깝다. 할아버지 옆엔 당일 우연히 만나 친해 보이지 않는 또 다른 말동무 할아버지 한 분만이 계셨다.연중무휴로 기력을 다하여 성을 내는 할아버지들의 오늘의 사냥감으로 포획된 비숑 견주 아가씨를 나는 용기 내어 구하지 못하고 다만 기도드렸다.
“아버지시여, 저들을 용서해 주옵소서. 그들은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하나이다.”
< 루카 복음 23장 35절 >
반려견들은 반려인들에겐 가족이다.
‘가족家族’이란 말이다.
나아가 일부 반려인들에겐 가족 그 이상의 의미를 갖기도 한다.
나는 사람 자녀를 가져 본 적이 없으나 부모가 되어본 어른들의 연륜이 담긴 표현 중엔 ‘품 안의 자식’이라는 말이 있다. 자식이 유년기에는 부모의 뜻을 따르지만 자라서는 제 뜻대로 행동하려 든다는 뜻의 속담이다. 아이가 7살쯤 되면 드디어 부모와 자녀 간의 의견대립은 시작된다. 그리고 사춘기가 되어 청소년기를 맞이한 자녀들은 부모와 가치관의 차이로 반목한다. 그들 간의 정서적 이질감은 증폭되고, 자녀는 인격적으로 부모로부터 완전한 분리를 요구하게 된다. 그로써 친밀감은 고갈되고 혈연지간의 관계적 의무감만이 남게 되는 안타까운 일들이 벌어진다.
그런 측면에서 반려견들은 < 품 안의 ‘영원한’ 자식 >이다.
반려견들은 사람 기준으로 대략 4~5세 나이의 정서적 지능을 갖춘 유아 상태로 평생을 머물면서, 반려인들과 일생토록 친밀한 사랑만 주고받는다. 그것도 십 수년 동안을.
게다가 특별히 일인 가구의 반려인들은 적막한 삶 속에서 유일하게 함께하는 반려견과 깊은 전우애를 경험한다. 혹여 일인 가구가 아닐지라도, 다양한 이유에서 오직 반려견과의 교감만으로 고된 삶을 지탱해 나아갈 의미를 찾은 반려인들도 적지 않다.
물론 어르신들 보기에는 ‘대가족으로 부대끼며 안 살아봐서 저렇게들 개를 끼고 산다’고 백안시하겠지만,안타깝게도 동일한 논리로 어르신들은 일인 가구로 개와 단둘이 동고동락을 해보지 않아서 모른다.
개는 우리와 영혼의 핏줄로 연결된 혈육이고, 풍진 세상의 유일한 전우인 것을.
개와 함께 살아보지 않은 사람은 사랑이 무엇인지 충분히 이해할 수 없다.
< 진 힐. 미국 배우 >
환난과 고난 안에서 가장 고되고 초라했을 때 언제나 곁에서 함께 비바람을 맞아준 우리들의 소중한 반려견 아이들.
평생토록 유아인 상태로 사소한 의견대립 한번 없이 오직 무한한 긍정과 믿음 그리고 사랑만을 주는 우리들의 생때같은 반려견 자식들.
가슴으로 낳아 자식처럼 키우고, 세월이 흘러 무한한 신뢰와 전우애까지 생긴 반려견들에게 우리는 이들과 목숨을 나누어도 아깝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기도 한다.
만약 도솔이가 불의의 사고로 생사의 기로와 마주하게 되었을 때, 나는 과연 도솔이에게 내 심장을 내어 줄 수 있을까?
'그렇다.' 라는 확신이 내 안에서 자연스럽다.
만약 대형 화재사고가 발생하여 화마가 집과 사람을 집어삼키고 있는 위기 한가운데 도솔이가 위태롭게 갇혀 있다면 나는 도솔이를 구하러 그 화마를 향해 뛰어들 것임이 분명하다. 그 확신의 근거는 말로는 설명될 수 없고 다만 내 안에서 충만하고 자연스럽다. 참된 사랑 안에는 언제나 자발적으로 헌신하려는 기백의 싹이 응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내 심장을 내어주어도 좋을 만큼 사랑하는 도솔이의 심장에 문제가 생겼다.
14살이 되어 도솔이는 심장병을 앓게 되었다.
2022년 7월 여름날의 어느 새벽.
자다가 도솔이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숨을 가쁘게 내쉰다.
목이 마른 건가.
악몽이라도 꾼 건가.
나 역시 자다가 깨어 비몽사몽 중에 실눈을 뜨고서 도솔이를 지켜보았다.
잠시 후 도솔이는 다시 둥글게 몸을 말고 수면자세로 누웠다.
안심하고 나도 다시 잠을 청했다.
그런데 5분 후에 다시 도솔이가 일어섰다.
숨을 연신 가쁘게 내쉬며 안절부절을 못한다.
무슨 상황이지.
응급한 바이털 사인을 내비치는 상태일지 몰라 잠을 물리치고 나는 도솔이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노견이 된 도솔이의 생체리듬상 반드시 수면을 취해야 할 새벽시간이다. 그런데 자려고 누우면 호흡곤란이 찾아오고, 기립해 있으려니 앞다리와 목 기립근에 부하가 걸려 도솔이는 이렇지도 저렇지도 못하는 고통 가운데 기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누운 자세로는 숨 쉬기가 어려워 잠들지 못하고, 기립해 있어야만 호흡이 가능해지는 것으로 나는 사태를 파악했다. 반려견의 질병 상식으로 알아둔 <폐수종> 증상이 의심되었다.
도솔이는 진퇴양난의 위기 안에 놓여있었다.
(추후에 주치의 선생님으로부터 확인한 내 판단은 정확했다.)
시계를 보니 새벽 3시다.
도솔이의 주치의 선생님이 운영하는 동물병원은 9시에 문을 연다.
동물병원이 문을 열기까지 대략 6시간 동안의 응급처치가 필요한 상황이다.
도솔이에게서 증상이 발현되고 대략 십여분 만에 응급상황임을 깨달은 것은 하느님의 보호하심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성격이 예민하여 잠귀가 밝은 나의 얕은 수면의 습관이 도솔이와 나에게 모두 기회가 되어주었다.
그러나 지금 이 시간, 숨통이 조여 오는 고통 속에서 죽음의 공포를 느끼고 있을 도솔이를 6시간 동안 지켜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 뿐이다.
도솔이가 온몸에 힘을 빼고도 기립의 자세를 유지하여 편히 숨 쉴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집 안에서의 유일한 응급처치가 될 것으로 나는 추론했다.
나는 도솔이의 가슴팍과 아래턱 부위를 나의 두 팔로 부드럽게 감싸 안고 앞다리가 바닥 지면에서 살짝만 떨어지도록 들어 올렸다.그리하여 도솔이가 다리에 힘을 빼고 있어도 기립자세가 유지되도록 자세를 만들었다. 아울러 목 기립근에도 힘을 뺄 수 있도록 턱은 손바닥으로 받쳐주었다.
도솔이는 아빠가 주는 도움의 의미를 알아차리고 온몸을 나에게 맡겼다. 숨통이 조여들어 잔뜩 긴장했던 도솔이는 그제야 온몸에 힘을 풀고 눈을 감고서는 서서히 내 품 안에서 잠들었다.
나는 9kg의 도솔이를 두 팔로 안고 정지된 자세로 6시간을 미동 없이 버텼다.
9시가 되어 병원문을열자마자 도솔이를 안고 동물병원으로 뛰어갔다.
주치의 선생님께서 내가 전하는 이야기를 듣고, 청진기로 도솔이의 흉곽을 검진해 보시더니 도솔이에게 응급하게 이뇨제를 주사하셨다.
폐수종 증상을 빠르게 해결하는 데 효과적이라는 선생님 말씀에 가슴을 졸이며 도솔이를 지켜보았다.
놀랍게도 10분쯤 지나 도솔이가 첫 소변을 보았다.
그 양이 평소와는 다르게 어마어마하다.
다시 10분이 경과하고 배변감이 재차 찾아왔는지 한 차례 더 소변을 보았다.
그렇게 도솔이는 이뇨제 주사를 맞고 그 자리에서 자그마치 다섯 번 소변을 배출하였고, 내 두 눈으로 확인한 그 소변의 양은 대략 2~3일 치의 배출양과 맞먹었다.
폐에 차 있던 물이 모두 빠져나와 호흡이 안정화된 도솔이의 눈빛이 다시 초롱초롱해졌다.
나는 안도감에 도솔이를 안아 올려 고생했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며 도솔이의 두 볼에다 뽀뽀세례를 주었다.
하지만 곧이어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가 주치의 선생님으로부터 들려왔다.
도솔이의 병명은 <심장 이첨판 폐쇄 부전증>이고, 3기에 해당한다고 했다.
심장판막에 문제가 생겨 울혈성 심부전이 발생하는 질환으로 폐에 물이 차게 되는 합병증을 동반하는 질환이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고칠 수 없는 심장병이란 말이었다.
페키니즈 견주들의 모임에서 익히 들어온 악명 높은 노화성 질환이었다.
사랑하는 내 아들 도솔이와 이별하게 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의미했다.
도솔이 동물병원 엑스레이 검진.
심장의 울혈 증상을 완화시키는 약과 폐에 찬 물을 배출시키는 이뇨제를 도솔이에게 하루 3번 정해진 시간마다 먹여야 했다.
그리고 도솔이의 호흡이 가빠졌을 땐 응급 상태의 경중을 파악하여 이뇨제 약을 추가로 투약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치의 선생님으로부터 권고받았다.
결론적으로 24시간 도솔이의 호흡상태를 지켜보면서 적시에 알맞은 약들을 먹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프리랜서로 하던 일의 스케줄을 모두 정리하고 나는 도솔이에게 나의 24시간을 오롯이 내어주기로 결정했다. 내어준다라기보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도솔이 뿐만 아니라 나 자신 또한 1분 1초도 온전하게 숨 쉴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생사의 기로에서 고통받고 있는 도솔이와 분리된 공간에서 다른 일을 한다는 것은 나에겐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