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다 기력을 다해 정신을 차려보니 내 눈물로 도솔이의 목덜미와 가슴팍 모피가 모두 젖어있었다.
예기치 못하게 도솔이 항문에서는 피가 섞인 검붉은 체액이 흘러나왔다.
도솔이의 상반신은 내 눈물로, 하반신은 체액으로 흥건하게 물들고 있었다.
심호흡을 하고 정신을 가다듬었다.
젖은 도솔이의 몸을 정갈하게 단장하기 시작했다.
도솔이의 마지막 가는 길을 아름답고 기품 있게 마련해주고 싶었다.
도솔이의 젖은 모피를 하얀 가제 손수건으로 닦고, 항문을 여미어 주었다.
눈은 감겨주지 않았다.
앞으로 하느님의 늘 푸른 동산에서 마음껏 뛰어놀려면 잠들지 않아야 한다.
내가 우는 동안에 도솔이의 몸은 따뜻했는데, 단장을 마치고 나니 도솔이의 몸은 차가워졌다.
사후경직이 왔고, 도솔이의 몸은 굳어갔다.
그러나 여전히 사랑스러웠다.
도솔이의 차가운 입과 이마에 따뜻하게 입맞춤하고, 경직된 도솔이의 몸에 하얀 담요을 살포시 덮어주었다.
나는 하느님께 위령기도를 바쳤다.
가톨릭 위령기도 연도문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을 선별하여 나는 하느님께 도솔이의 영원한 안식을 간구하는 위령기도를 오래도록 바쳤다.
목이 잠기어 기도가 막힌 시간에는 천주교 연령회 모임에서 유튜브로 제작한 위령기도문 낭송 영상을 영면에 든 도솔이 앞에서 플레이했다.
노년의 연령회 회원분들이 구슬픈 성조로 합창하듯 연도문을 낭송했다.
영면에 든 영혼을 추도하는 진실한 마음들이 모여 만든 하모니가 모차르트의 레퀴엠만큼 아름다웠다.
위령기도는 죽은 이가 주님 곁에서 영원한 안식을 얻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뜨거운 문장에 담아 하늘 위로 피워 올린다.
위령기도는 우리들의 간절한 마음을 문장으로 불태워내는 ‘말들의 분향’이다.
반려견의 이름을 기도문에 직접 대입하여 가톨릭 연령기도를 하느님께 바친 일은 아마도 나와 도솔이우리 부자父子가 처음일 듯싶다.
하느님께서 조금은 놀라셨겠지만 나의 간절한위령기도에 귀 기울여 주셨을 것임을 믿는다.
아니 나는 100% 확신한다.
도솔이의 영혼은 지금 이 순간에도 하느님 곁에 있다.
하느님께서 도솔이를 주님의 늘 푸른 동산에서 평화롭게 쉬게 하고 계심을 나는 일 백 퍼센트 확신한다.
도솔이의 영혼이 늘 주님과 함께 하고 있다는 나의 신앙적 확신에 간혹나의 정신건강을 의심하는 이들이 있다.
도솔이를 잃고 미쳤거나 나이가 들어 머리가 우둔해진 게 아닌가 걱정하기도 한다.
하지만 하느님의 은사로 나는 멘사회원이다. 총끼가 넘쳤던 청소년기에 비하여 나이가 들어 우둔해진 건 사실이지만 아직도 정상지능 분포 안에는 머물 것이다.
그리고 나는 미치지 않았다.
경계성 인격장애로 실제로 미쳐봐서 안다.
청년기에 나는 죽으려고 자해만 7번 넘게 했다. 오른손잡이인 나의 왼쪽 팔목엔 영화 <올드보이>의 오대수처럼 갈지자로 여러 개의 자상의 상흔이 있다.
그러나 지금의 나의 정신상태는 온전하다.도솔이를 추도하는 목적의 이 글을 쓰고 있음은 내가 현재 정서적으로 안정되어 있음을 방증한다. <페키니즈가 필요한 시간>의 완성으로 나의 온전한 정신건강은 객관적으로입증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정신건강을 지속적으로 걱정하는 이들에게, 이제부터 나와 도솔이에게 일어난 하느님의 기적을 이야기해주려고 한다.
도솔이는 2022년 11월 24일 오후 7시경에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그리고 자정시간까지 나는 도솔이를 단장시키고 하느님께 끊임없이 위령기도를 바쳤다.
도솔이의 장례를 나 혼자서 3일 장으로 치르기로 마음먹고, 영면에 든 도솔이를 내 이부자리 바로 옆에다 눕히고 흰 담요를 깔아 자리를 잡아주었다. 그리고내가 가장 아끼는 비취색 옥돌 묵주를 도솔이 목에 걸어주었다.
3일장의 남은 스케줄이 예비되어 있었기에 나는 도솔이 옆에서 잠을 청했다.
오래도록 울어 노곤해진 몸으로 나는 금방 잠이 들었다.
새벽녘에 갑자기 방문이 열렸다.
도솔이가 방문을 머리로 밀치고 들어와 폴짝폴짝 나를 향해 뛰어왔다.
나는 심장이 멎는 듯했다.
얼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도솔이를 얼싸 품에 안고 연신 뽀뽀를 했다.
그 순간 나는 도솔이의 시신이 누워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묵주를 목에 걸고서 도솔이의 시신은 그 자리에 있었다.
그리고 내 품 안에는 한창때 건강하던 모습으로 도솔이가 재롱을 부리며 안겨있었다.
찰나의 직감으로 나는 도솔이의 영혼이 주님의 허락 하에 나에게 잠시 들른 것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도솔이에게 사랑한다고. 고맙다고. 아빠가 나중에 도솔이 따라갈 때까지 딴 데 가지 말고 하느님 곁에 꼭 붙어 있으라고. 다급히 당부하면서 나는 도솔이를 품에 꼭 안고 슬픔과 환희가 뒤섞인 마음으로 흐느껴 울었다.
도솔이가 밝게 웃으며 내 코를 핥아주었다.내가 가장 좋아하는 도솔이의 코 뽀뽀 스킨십이었다.
1분 여가 지났을까.
내 품 안에 안겨있던 도솔이 몸의 윤곽과 질감이 희미해지면서 곧 사라졌다.
나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성호경을 긋고 고개를 천장 쪽으로 치켜들어 하늘을 향해 주기도문을 암송했다.
온몸에 간질간질한 전율이 피어올라 피부에 야릇하고도 신비로운 쾌감이 계속해서 흘렀다.
나는 다리가 저리도록 오래도록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도솔이는 그렇게 새벽에 나를 찾아와 주었다.
아마도 도솔이에 대한 거짓 없는 나의 참된 사랑을 하느님께서 어여삐 보시고, 하느님께서 도솔이를 주님의 늘 푸른 동산으로 데려가기 직전에 1분여의 재회의 시간을 마련해 주신 것으로 생각됐다.
내 방에는 CCTV가 없으니 당연히 기록물은 없다. 만약 CCTV가 설치되어 있었더라도 도솔이는 영상에 나오지 않고 나 혼자서 혼잣말하고 무릎 꿇고 기도하는 행동만이 녹화되었을 것이다.영혼은 물적 존재가 아닌 형이상학적 실체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나는 지독하게 논리적인 사람이어서 꿈속에서도 나 자신이 꿈꾸는 중이란 걸 안다.
예컨대 꿈속에서 내가 우크라이나 전쟁에 참전한 상황이라면, 나는 이 상황이 꿈인 걸 알고서 목숨을 건 백병전의 나이프 배틀조차 웃으며 즐긴다.
꿈속에서 꿈인 것을 자각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그 논리는 이렇다. 꿈속에서 나는 이 전쟁에서 내가 소속된 부대와 배정받은 소임을 파악하려고 시도한다. 전쟁 중에 내가 장교인지 병사인지 혹은 내가 통역관인지 소총수인지 자신의 신분 정보를 자기가 모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개인 정보들을 파악하려고 노력했을 때 내 머리 안에 나 자신에 관한 세부정보가 없는 것을 ‘꿈속에서’ 스스로 헤아리고 나는 이것이 ‘꿈’인 것임을 자각하는 것이다.
나의 자아는 이처럼 꿈과 같은 무의식의 경계에서도 논리적이다.
하느님께서 나를 애초에 그렇게 지으셨다.
한 번은 친구들에게 <자각 가능한 꿈>에 관한 나의 에피소드를 들려주었더니 친구들 말이 ‘그건 너만 가능한 일’이고 ‘논리적으로 미친 것’이라며 기가 막힌다고 다들 놀라고 웃었다. 에피소드를 전해 들은 친구들로부터 사실임을 의심하는 부가 질문은 따로 나오는 바가 없었다. 나의 오랜 벗들은 내가 허풍과는 거리가 아주 먼 사람이란 걸 잘 알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나는 뼛속까지 논리적이어서 꿈과 현실을 꿈속에서조차 혼동하지 않을,세상에서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이다. 하느님께서는 다양성의 관점에서 인류의 일부를 호모 로지쿠스(Homo-Logicus논리추론하는 인간. 내가 만든 조어)로 제작하셨다는 것을 나는 안다.
도솔이와 그리고 하느님과 함께한 3일장을 마치고, 경기도 광주에 있는 반려동물 화장터로 도솔이와 함께 마지막 나들이를 나왔다.
차로 이동 중에 도솔이와 늘 함께 걷던 성내동과 풍납동의 정든 길목 구석구석으로 운전해서 왔다. 길목마다 도솔이의 발걸음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화장터에 도착하여 실장님으로부터 가족용 추도실을 안내받았다.
도솔이를 오동나무 관에 눕히고, 나는 가져온 십자고상을 추도실 중앙에 놓았다.
우리와 마지막 시간까지함께한 십자고상이다.
<도솔이>를 위한 위령기도. 마지막 시간까지 함께 한 십자고상.
나는 마지막으로 한번 더 도솔이의 영원한 안식을 하느님께 간구하는 위령기도를 바쳤다.
깊은 구렁 속에서 주님께 부르짖사오니 주님, 제 소리를 들어주소서.
제가 비는 소리를 귀여겨들으소서.
파수꾼이 새벽을 기다리기보다 이스라엘이 주님을 더 기다리나이다.
지극히 어지신 하느님 아버지,
저희는 그리스도를 믿으며 살다가 이 세상을 떠난 모든 이가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리라 믿으며 저의 ‘도솔이’를 아버지 손에 맡겨드리나이다.
하느님 아버지, 저희 기도를 자애로이 들으시어 ‘도솔이’에게 천국 낙원의 문을 열어주시고 남아있는 저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만날 때까지 믿음의 말씀으로 서로 위로하며 살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그리고 눈을 감지 않고 있는 도솔이와 두 눈을 마주하고, 소리를 내어 도솔이에게 변하지 않을 나의 사랑을 고백했다.
사랑해 도솔아.
아빠는 도솔이와 함께한 모든 날들이 소중하고 행복했어.
내아들 도솔아. 잠시 떨어져 있어도 당분간일 거야.
아빠는 우리 도솔이와 영원히 함께 할 거야.
남은 삶 동안 아빠는 우리 도솔이 절대로 잊지 않을 거야.
끊임없이 그리워할 거야.
그러니까 우리 도솔이도 그 시간 동안 아빠 잊지 않고 하느님 곁에서 평안하고 행복하게 잘 지내야 해.
그리고 아빠 다시 만날 날을 꼭 기다려줘 도솔아.
하느님께 맹세할게.
그리고 아빠의 영원한 아들 우리 도솔이에게 약속할게.
다시 만날 때에는 우리 도솔이를 아빠 품 안에 꼬옥 안고서 다시는 놓지 않을 거야.
사랑해 내 아들!
나는 목놓아 울며 고백하고 또 고백했다.
지상에서의 마지막 사랑 고백을 마치고 나니 두어 시간이 지났다.
이제 내가 실장님을 부르면 도솔이는 꽃마차를 타고 화장터로 이동하게 될 것이다.
도솔이의 육신을 불에 사르는, 물리적 세계에서의 완전한 작별의 시간을 나는 이제 곧 스스로 결정지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나의 아들 도솔이에게 입맞춤하고 내 품 안에 꼬옥안아보았다.
실장님을 불렀다.
꽃마차를 타고 도솔이가 화장터 소각로로 들어간다.
내 아들을 한 줌의 재로 만들 저 화장로 속으로 나는 내 아들 도솔이를 들여보낸다.
이미 도솔이에게 전할 말들은 모두 다 끝마쳤다고 생각했는데, 내 마음 안에서 실체를 분간할 수 없는 수없이 많은 말들이 들끓었다.
내 심장이 <도솔아!!>외치며 내 가슴뼈를 열고 뛰쳐나갈 듯이 요동쳤다.
애끓은 도솔이의 이름 부르기를화장로에다 대고 반복했다.
심장이 녹아내릴 듯하여 화장터 밖으로 뛰쳐나와 바라본 하늘은 칠흑보다 검었다.
사람이 아닌 도솔이는 비록 영세받지 못했으나, 만약 도솔이에게도 언어지능이 있고 인격적 자유의지가 있었다면 내 아들 도솔이는 세례 받았을 것이다.
지은 죄가 많아 여러모로 부족했던 나조차도 하느님께서 자녀로 불러주셨는데,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지은 죄가 없는 우리 착한 도솔이가 영세받지 못할 이유가 티끌만큼도 없기 때문이다.
천국은 받아들일 대상을 편파적으로 선정한다. 만일 대상을 공평하게 선정한다면 당신이 아니라 당신의 개가 천국에 갈 것이다.
마크 트웨인. 미국 소설가
도솔이와의 마지막 작별 인사
뽀얗게 희고 고운 가루가 되어 도솔이가 나의 품 안으로 다시 안겨왔다.
유골함을 정성스럽게 비단 보자기로 감싸서집으로 돌아왔다.
햇빛이 잘 드는 내 책상 한가운데에, 하얀 비단 보자기에 싸인 도솔이를 올려놓았다.
우리 도솔이는 생전에도 새하얬고 지금도 새하얗다.
석 달 전 성모승천대축일에 수녀님으로부터 전해받아 곱게 말려놓았던 붉은 장미와 십자고상을 도솔이 유골함의 좌우로 배치했다.
유튜브에서 그레고리안 성가 음원을 찾아 나지막하게 플레이했다.
이제 다른 형식의 몸을 갖게 된 도솔이가 평화로운 그레고리안 성가 안에서 평안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나는 울지 않고 기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