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가 생각하는 ‘나’보다 좀 더 큰 존재일지도 모른다.
사람 하나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좁고 구불구불한 통로다. 문을 열면 한 걸음도 채 가기 전 또다시 문이 나온다. 문은 하나가 아니다. 사방에 닫힌 문 중 내가 선택하는 문에 따라 방향이 바뀐다. 지인을 따라 이동하며 ‘뭐 이런데가 있나’ 싶은 순간 눈앞에 넓은 세상이 펼쳐진다. 내가 흠모하던 그림 속 풍경이 그대로 재현되어 있다. 인상파 화가의 붓터치까지 살아있는 산, 쏟아지는 햇살에 손부채를 하고 올려다본 하늘은 하늘색 유리구슬처럼 맑고 깨끗하다. 진초록 짧은 풀은 낮은 언덕을 덮은 카펫이다. 나는 천천히 언덕을 걸으며 주변을 둘러본다.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할 수 없다.
돌아가는 문을 연다. 다음 문이 보인다. 두 번째 문고리를 잡고 돌아본다. 이미 지나온 문이 닫혀있다. 문고리를 돌려 천천히 문을 민다. 또 다른 문이 보인다. 그 순간 발이 얼어붙은 듯 떨어지지 않는다. 고개만 앞과 뒤를 왔다 갔다 반복한다. 한참을 서 있다 문을 닫고 첫 번째 문으로 돌아선다.
나는 동생과 함께 나가는 길을 찾고 있다. 끝없이 이어진 좁은 문 사이사이 넓은 공간이 있기도 하다. 끝없이 마주하는 문 앞에서 동생 얼굴은 흙빛이 된다. 갑작스레 큰 방이 나타난다. 침대와 거실이 있다. 나는 담담하게 제안한다. “오늘은 여기서 쉬자.” 먹을 것은 없다. ‘가다 보면 길이 나올 거야.’란 생각을 하다 잠에서 깼다.
지난여름 독일로 여행을 다녀오면서부터 하루하루가 버거웠다. 매일 새벽 명상, 책 읽기, 글쓰기를 하던 오전이 사라졌다. 일어나는 시간이 불규칙해지고 낮잠이 늘었다. 외식이 잦아지며 반주를 종종 했다. ‘뭐가 문제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고민이 깊어질수록 몸과 마음이 무거웠다. 답을 알 수 없으니 괴로움이 쌓이고 화가 났다. 9월에는 크게 넘어져 팔다리를 다쳤다. 지인들과 함께 다시 루틴을 잡으려 애쓰던 중 휴대폰을 잃어버렸다. 나는 다시 휘청거렸다. 원인을 찾으려 할수록 사건이 터졌다.
꿈에서 깨어나니 현실이다. 칼 구스타프 융은 ‘꿈은 있는 그대로를 보여준다. 다만 난해한 상징들로 가득한 꿈을 해석하는데 어려움이 있을 뿐이다.’ 라 말한다. 지난밤 꾼 꿈의 상징과 의미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다만, 깨자 마자 들었던 생각 “‘진짜 나’는 내가 생각하는 ‘나’보다 좀 더 큰 존재야.” 이것에 꿈이 나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 아니었을까? 현실은 바뀐 것이 없는데 갑자기 마음이 고요하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예수님의 말씀이 어느 순간 받아들여졌던 것처럼, 나는 지금 잘하고 있다는 믿음이 가슴으로 쑥 들어온다. 잘하고 있어, 윤정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