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nzar - Melide
곤사르 - 멜리데
모두가 말이 없었다
아침에 메그의 열은 떨어졌다.
예정대로 걸을 수 있다고 평소처럼 짐을 꾸리는 그녀가 걱정되었지만, 여기서는 누구나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한다. 가다가 힘들면 얼마든지 중간에 멈출 수 있으니, 결정을 믿고 일단 함께 출발한다.
별을 본 것이 얼마 만인가. 안개로 뒤덮인 몇 번의 아침이 지나고 드디어 별로 총총 뒤덮인 깊푸른 하늘 아래를 걷는다. 곤사르에서 이어지는 오르막길은 유난히 어두웠고 덕분에 별이 잘 보였다. 어두운 만큼 적막하기도 했다. 지상에 우리 셋만 존재하는 것 같던 적막함. 하얀 입김이 춤추고, 유일하게 들리는 숨소리와 한마디 기척들이 별처럼 내 마음에 총총 내려앉는다. 그렇게나 어두운 적막함을 두려움 없이 걸었다.
한 시간쯤 걸어 벤따스 데 나론 (Ventas de Narón)을 지나가는 길, 길 따라 저만치 앞서가던 사람들이 자꾸 걸음을 멈추고 또 멈추며 돌아본다. 뜨는 해를 보느라 그런가 보다 했는데, 그곳에 먼저 다다른 메그 역시 멈추더니 오른쪽을 향해 환하게 웃는다.
언덕 사이로 낮게 깔린 운무가 보이기 시작했다.
한걸음 가니 와 여기구나, 한 걸음 더 가니 아니야 여기였어, 또 한걸음 갔는데 와... 하게 되는 바람에 자꾸만 걸음걸음 돌아보게 만드는 풍경. 이럴 때 사람들의 얼굴은 그 풍경을 닮는다. 나에겐 그 얼굴까지가 풍경이다.
모두가 시간도 말도 잃었다.
어쩌면 우리는
오늘은 곤사르에서 멜리데(Melida)까지 32km를 걷는다. 레온 이후 다시는 30km 이상을 걸을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심지어 내일은 오늘보다 2km를 더 걷는다. 그래야 모레 산티아고에 도착할 수 있다.
이틀 후로 다가온 산티아고 여정. 산티아고 대성당에 도착하는 상상을 수없이 한다. 막연히 떠오르던 순간을 이제는 구체적으로 그려본다. 몇 번을 떠올려도 울컥하게 되는 장면이다.
대부분의 순례자는 산티아고까지 가지만 우리는 피스테라와 무시아까지 약 100km를 더 걷는다. 세상의 끝이라 불리던 곳 피스테라와 무시아에서 바다를 만나 더 이상 걸어갈 수 있는 길이 없을 때까지 갈 것이다. 그러니 다른 이들보다 평정심이 필요하다. 아직 우리에겐 남은 길이 있으니 중간에 주저앉지 않도록 페이스를 유지해야만 했다.
사랑하는 수염 친구 리카르도와 오늘도 만났다. 꽤 길게 함께 걸었던 친구다. 그와 산티아고까지 남은 85km의 일정을 맞춰보니 우리는 3일 만에 걷고 그는 4일 동안 걸어서 하루씩 차이가 나게 될 것 같다.
오늘이 그와의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이제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한 명 한 명 헤어짐이 다르다. 같이 사진도 찍고 연락처도 주고받는다. 헤어짐이 아쉽지 않도록, 우리의 만남을 충분히 감사하며.
어쩌면 벌써 우리는. 매일 이별을 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메그는 괜찮은 걸까?
멜리데의 식당가를 들어서자 뽈뽀(문어) 요리 호객에 눈과 귀가 즐겁다. 어찌나 한국 사람들이 뽈뽀를 좋아했던지 어느 한 식당 직원은 한국말로 말을 건네기도 한다. 점심이라도 먹으면 좋았지만 하.. 사실 오늘 너무 힘들다. 너무 지쳤다. 어서 숙소에서 씻고 쉬고 싶다는 생각만 간절했다. 오후 3시가 다 되어가니 해도 빨리 피하고 싶었다.
숙소는 식당가와 좀 떨어진 오르막에 있었다. 마을에 들어서도 도통 나올 기미가 없는 숙소 가는 길이 유난히도 길고 힘들게 느껴졌다.
결국 메그는 목적지까지 왔다.
서둘러 씻고 빨래를 한다. 조물조물 너무 힘주지 않고 너무 힘들이지 않고 손빨래를 끝낸다. 그리고 지금 당장 필요한 것, 바로 시원한 맥주. 숙소에서 팔고 있는 맥주 한 병을 사고 배낭에 있던 땅콩을 꺼낸다. 퉁퉁 부은 다리를 의자에 올려 조물조물 마사지한다. 이대로 꼼짝 못 할 것 같았다.
샤워 후 메그의 상태는 어제처럼 다시 편도가 붓고 고열이 시작되었다. 걸을 땐 괜찮다가 씻고 난 후 다시 열에 시달리는 것이다.
"약은 먹었어?"
"아니 약이 다 떨어져서 약국 다녀와야 해."
"한국에서 가져온 감기약 있는데. 네 증상에 맞을지 모르겠네. 검색해 보고 괜찮으면 일단 이거 먹자."
한국에서부터 여러 가지 감기약을 챙겨갔는데 다행히 메그의 증상에 맞는 약이 있었다.
소은, 지지와 식당가에서 뽈뽀를 먹기로 한 저녁 약속은 취소해야 했다. 메그는 나라도 다녀오라 했지만, 마트에서 메그가 먹을 수 있는 저녁거리를 사서 함께 먹는 것이 마음이 편했다. 사실 내 다리도 거기까지 가기엔 너무 지친 상태이기도 했다.
내일 이 길을 멈추게 된다 해도
알베르게는 식당가와 조금 멀어서 그런지 빈 침대가 많고 조용했다. 쉬다가 저녁거리를 사러 마트에 가기위해 몸을 일으켰다. 내가 사 오면 되는데, 조금 움직여 보겠다며 메그가 따라나선다.
메그는 정말이지 이를 악물고 저녁을 먹는다. 어떻게든 다시 컨디션을 회복하겠다는 의지가 대단하다. 까미노에서 아픈 건 메그만은 아니었다. 다른 친구들도 한 번씩 2~3일 정도 아픈 적이 있다고 한다. 한 달이 넘도록 체력의 한계를 경험하며 하루의 절반을 밖에서 걷고 있으니, 생각해 보면 누구라도 한 번은 아픈 것이 당연하다.
나는 까미노 첫날 샤워 후 체온조절에 실패해 고열이 잠시 왔던 것 빼고는 아직 괜찮았다. 무시아까지 남은 일주일 동안 몸이 잘 버텨줘야 할 텐데..
아무래도 오늘은 마을을 돌아보기는 힘들겠다 싶어 맥주와 함께 긴 저녁을 홀로 즐길 참이다. 마침 알베르게는 한적하니 조용했고, 멋진 발코니에 테이블이 있어서 해지는 것을 볼 수도 있었다.
자기 전 메그의 이마를 짚어보니 아직 뜨겁다. 내가 준 약이 효과가 있기를.
나는 최대한 담담하게 옆에 있어 주고 싶었다.
어떤 상황이 와도 괜찮아. 내일 이 길을 멈추게 된다 해도.
우리는 함께 결정하고 잘 해결해 나갈 테니까.
밤사이 버텨내기를.
부디 시간이 약이 되어 정성스럽게 흐르기를.
bonus!
+ 알베르게 : Albergue Alfonso II el Ca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