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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Hz 오즈 Aug 18. 2023

끝은 언제나 시작을 향한다

Melide - O Pedrouzo

 멜리데 - 오 뻬드로우소



마지막 인사들

컨디션이 훨씬 나아 보이는 메그. 

내가 준 약이 아주 잘 드는 것 같다고 웃어보인다. 

잘 버텨 주었구나. 다행이다. 그럼 오늘도 출발해 볼까? 


산티아고 도착 하루 전. 

멜리데에서 오 빼드로우소까지 33.4km를 걷는 날이다. 


아침 식사를 하는 곳에서 메그의 까미노 초기 친구를 만났다. 나에게는 그렉이나 올리, 마리오 같이 초반 까미노 길에 서로 위로가 된 친구였을 것이다. 나도 그와 안면은 있는데, 그 사이에 수염이 덥수룩해진 모습이 사뭇 달라 보였다. 초반에 그는 탑건 선글라스에 스프레이로 멋지게 옆 가르마를 탔던 멋쟁이였는데 말이다. 그래도 지금 모습이 훨씬 좋아 보였다. 수염과 거뭇해진 피부 때문인지 성숙해진 그를 만나서 반가웠다. 


그들은 서로를 만나 뜻밖의 선물을 받은 기분일 테지. 정말 잘되었다. 나는 기꺼이 그들의 사진을 찍어 주었다. 


나도 떠올려지는 사람들이 있다. 

JM언니는 어디쯤 왔을까? 물집 때문에 힘들어하던 언니를 못 본 지 너무 오래되었다. 어쩌자고 연락처 하나 받아놓지 못했을까? 

세종 쌤들은 잘 걸으시니 아마 오늘쯤 도착했을지도. 부산 쌤들은 언제 또 만나게 될까? 

신사 아저씨 미켈레, 게르트루트, 그렉, 에릭, 마틴, 쭌, ES언니, 울산 KM씨와 그녀의 딸, 멕시코 모녀, 모건, 이브 한 명 한 명 떠오른다. 이반은 일상으로 잘 돌아갔을까? 

언제나 함께 걷는 것 같은, 보고싶은 포와 리카르도. 

그리고 레온 이후 단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던 아픈 손가락 Y.  


아, 너무 많다. 이름 모를 그와 그녀들. 늘 눈빛으로 응원하던 혼자인 사람들. 

모두 어디쯤일까? 그게 우리의 마지막이었을까? 






사사로운 감정에 대하여

오늘은 어쩐지 마음이 싱숭생숭하다. 내일 산티아고에 도착하는데 담대해야 할 순례자의 마음이 어쩜 이리도 사사로운지. 


사실 며칠 전부터 길에서 자주 마주치는 사람이 있다. 그는 우리와 마주치면 한동안 함께 걸었지만, 나는 그와 걷다 보면 편하지 않아서 사진을 찍는 척 하며 속도를 늦추곤 했다. 그가 뭘 잘못한 건 아니니 크게 문제 될 건 없었다. 내가 불편하면 내가 피하면 되는 것이니까. 헌데 이상하게도 산티아고에 가까워질수록 신경이 쓰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제 정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서겠지. 남은 시간들이 그로 인해 다른 감정으로 채워지는 것이 싫었다. 불편함과 함께 산티아고에 도착하게 된다면, 수없이 상상했던 그 순간이 거품쳐럼 사라져 버릴것만 같았다. 


오늘도 그는 어딘가에 있다가 길에서 마주쳤다. 확언하건대 내일 산티아고에 들어가는 순간에도 어느새 우리 옆에 있을 것이다. 

나는 또다시 혼자 속도를 늦췄다. 오늘은 아주 거리가 멀어지도록 메그도 먼저 보내고 바에 혼자 들어가 버렸다. 


너무 사사로운 감정이라 빨리 털어버리고 싶었다. 바에 들어가 숨을 가다듬는다. 

오, 여기 꽤 아늑한 정원이 있구나.  

완만한 풀밭과 여유로워 보이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니, 마음이 평소의 리듬을 찾아간다. 


혼자서 멍하니 앉아있다가 피식 한번 웃었다. 

사사로운 감정은 작고 하찮아 보이지만 자연스러운 거야. 개인적인 감정을 하찮게 여기는 사람이야말로 대체 어떤 사람일까? 큰일에 연연하고 작은 일에 무심한 것 보다, 큰일에 담대하고 작은 일에 연연하는 사람도 필요해. 그 사람은 나중에 주변을 더 섬세하게 살피는 사람이 될 테니까. 그에겐 나무가 곧 숲이고 구르는 돌이 곧 지구일 테니까. 






끝은 언제나 시작으로

오늘은 까미노에서 흔하지 않게 보드랍고 폭신한 산길이 많았다. 먼 길을 걸을 생각에 혼자 씩씩거렸던 나는 금세 뻘쭘해졌다. 가는 길이 부드러우니 걷는 내 마음도 포근하다. 길에는 밤나무가 많아 우수수 밤송이들이 떨어져 있다. 우리 엄마가 보면 좋아하겠네. 엄마는 분명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몇 개는 주웠을 테지? 


마지막 6km를 남겨두었을까? 나와 걷는 속도가 비슷한지 아까부터 옆으로 나란히 걷고 있는 아저씨가 있었다. 보통은 어느 순간 누군가 앞서가거나 뒤처지게 마련인데 이 아저씨와는 이상하게 적당한 거리에서 나란히 걸어가고 있었다. 인사도 없고 한마디 말도 없이. 


그렇게 한동안 가다가 두 갈래로 나뉘는 길이 나와 멈추게 되었다. 어? 갈림길이 있었던가? 어디로 가야 하지? 미쳐 길을 확인하지 못한 나는 멈추어 지도를 확인했다. 나란히 걷던 아저씨도 멈추었고 동시에 비슷하게 걷던 앞뒤 사람들도 멈춰 길을 확인한다. 이 길을 이미 걸어본 누군가가 왼쪽 길은 아름답지만 조금 돌아가는 길이고 오른쪽 길이 원래 길이라고 알려주었다. 


"어디까지 가?"

"오 빼드로우소. 당신은?"

"어 나도 오빼드로우소."


누가 먼저 물었을까? 잘 기억도 나지 않는다. 우리의 첫 대화는 여기서 목적지를 물어보는 아주 간단한 대화였다. 그러고는 다시 오른쪽 길로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어떻게 처음 보는 사람과 말도 없이 한 시간 이상을 함께 걸을 수 있었을까? 

이상하고 신기한 경험이었다. 모르는 사람과 서로의 숨과 발과 웃음과 공기를 감지하며 걸어간다는 것은. 그 사람의 숨소리가 이해되었고 그 사람의 표정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만큼 신기한 교감이 이뤄졌던 마지막 한 시간. 


덕분에 몹시 힘들었을 마지막 한 시간을 그의 숨소리와 발소리에 집중하며 힘들이지 않고 걸을 수 있었다. 아마 서로에게 좋은 페이스메이커가 되었던 것 같다. 


우리는 정말 한 시간을 말없이 걷다가 오 빼드로우소에 도착하고 나서야 인사와 대화를 나누었다. 

아일랜드에서 온 스티븐 아저씨. 

나는 아직도 가끔 생각한다. 스티븐아저씨는 신이 나에게 보내준 메신저가 아니었을까 하고. 

헤어지기 전 그는 나에게 말했다.


"우리는 내일 산티아고에 도착하지만, 까미노는 내일 끝나는 게 아니라 그때부터가 시작인 거야. 그렇지?"





메그는 숙소에 와 있었고 샤워 후에도 열이 오르지 않았다. 약간의 기침만 있어서 오늘 푹 자면 내일은 좋은 컨디션으로 산티아고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다. 전처럼 웃는 그녀의 얼굴을 보니 나도 마음이 놓였다. 

메그는 먼저 가버린 것이 마음에 걸리는가 보다. 나의 눈치를 살짝 살피는 표정이다. 

아닌데, 그게 아닌데. 내가 일부터 걸음을 늦췄던 건데. 미안해하지 말아요. 


조금 늦게 도착한 소은은 오는 길에 밤을 한 아름주워 왔다. 이게 무슨 일이야, 우리 엄마인 줄 알았어! 라며 반가운 기색과 함께 농담을 던졌다. 


저녁은 공용키친이 있으니 마트에서 뭘 사다가 해 먹기로 했다. 오랜만에 3명이 함께 장을 보러 간다. 가는 길이 너무 뜨거워 비닐을 뒤집어쓰는 엉뚱한 소은이 귀엽다. 


요리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 내가 오랜만에 프라이팬을 잡으니 메그가 "아주 특별한 순간"이라며 사진을 찍어 준다. 소은이 주워 온 밤은 삶아서 다른 순례자들과 오손도손 함께 까먹었다. 


저녁을 먹으며 내일 산티아고 이후의 일정을 논의했다. 하루 더 쉴지 말지 아직도 고민스러웠지만, 역시 더 쉬지 않고 이 페이스 유지하며 무시아까지 가기로 했다.  


내일은 어떤 날이 될까? 산티아고는 어떤 모습이고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그 앞에 서게 될까? 


나는 문득 바다가 보고 싶어졌다. 






bonus!

+알베르게 : Albergue Crucei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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