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go - Cee
라고 - 씨
알베르게 앞에 미동 없이 앉아있던 흰둥이는 밤새 여기서 잠들었나 보다. 우리가 지나가자 무심하게 고개 한번 들고 떨구더니 다시 화석이 되었다.
나아지지 않는 컨디션. 그렇지만 아침은 늘 전날에 비해 괜찮아서 걸을 수 있겠다고 생각하고 마는 것이 함정. 오늘은 바다가 보인다는 마을 씨(Cee)까지 26km를 걸어야 한다. 몽롱한 상태로 새벽길을 나선다.
아침에 도착한 올비올라(Olviora)의 어느 바, TV에서 스페인 뉴스를 생각 없이 보는데 갑자기 아는 얼굴이 나와서 반갑고 놀랍다. 이정재! 영화 헌트를 소개하는 인터뷰가 스페인 아침 8시 뉴스에 나오고 있었다.
그 앞에서 소은과 메그는 유튜브를 보며 발목 테이핑하는 방법을 따라 하고 있다. 잘 안되는지 반복해 보면서 끙끙거리는 둘의 모습이 안쓰럽고 귀엽기도 하다.
소은의 발목은 어제 기어코 퉁퉁 부었었다. 겹 지른 건 아니었는데, 대체 얼마나 무리했으면 그렇게 부어오를 수 있는 건지.. 심각해 보였고 큰일이구나 심장이 쿵 했다. 무기력하게 몸져누웠던 나는 도와줄 방법은 없었고, 메그가 도와줘 얼음찜질한 것이 효과가 있었던 것 같다. 다행히 아침에는 부기가 빠졌고 걸을 수 있었다.
나는 왜 죽자고 걷고 있는가
피스테라와 무시아의 교차점에 다다랐다. 왼쪽으로 가면 피스테라로 통하고 오른쪽은 무시아 방향으로 가게 된다. 여기까지 온 순례자들은 대부분 두 곳 다 가지 않을까 싶은데, 단지 어느 곳을 먼저 가고 어느 곳을 마지막 여정으로 삼느냐의 차이가 있다. 우리는 피스테라를 향해 먼저 가고 마지막 여정을 무시아로 정했다. 교차로에는 눈에 잘 띄는 노란 화살표 의자가 놓여 있다. 순례자들은 그곳에서 각자의 방향에 따라 양쪽으로 흩어진다.
이를 악물고 걷는다. 온몸이 아픈데 나는 왜 죽자고 걷고 있는가?
까미노 36일째, 이제야 처음으로 던지는 질문, 나는 왜 걷고 있지?
나는 여전히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 그치만 그런 거 몰라도 뭐가 문젠가? 나는 죽지 않고 살았으니 걷고 있는 거지. 왜냐니, 그런 공허한 질문이 다 어디 있을까.
오래전에 즐겨본 프로그램에서 사회자가 '우리는 왜 태어난 걸까요?'라고 스님에게 물은 적이 있다.
스님이 답했다.
"순서가 뒤바꿨어요. 이유가 있어서 태어난 게 아니고 태어났기 때문에 이유가 생기는 것입니다. 태어나고 사는 데는 이유가 없어요. 왜 태어났는지 고민하다 보면 빈 공간을 발견하게 되죠. 그럼 삶이 무의미하게 느껴져요."
(힐링캠프, 법륜스님 편)
순례길 그토록 바라던 바다
정오가 넘어가고, 22km는 걸은 줄 알았는데 실제 걸은 건 17km라니. 아놔 여보세요.
체감상 걸은 거리와 실제 걸은 거리가 너무 차이가 나서 현타가 밀려온다. 좌절스럽다. 주저앉고 싶다. 난 여기까진 가봐. 너무 힘들다.
오만상을 찌푸리며 땅만 보고 걷는 그 순간. 얼핏 고개를 들었는데 저 멀리 뭔가 반짝이고 있었다. 손톱만큼 보이던 것은 가까워질수록 잔잔히 너울거리는 바다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바다.
바다다.
.. 뭐라고? 어. 바다라고. 바다!
36일 순례길 처음 만난 바다. 눈물이 났다. 잠시 엉엉 울었다.
앞서 걷던 두 순례자 역시 가던 길을 멈추고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둘은 손을 꼭 잡고 있다. 그녀들 중 한 명은 한쪽 다리가 매우 가늘다. 아마 어떤 이유가 있을 테지. 손잡은 그녀들 사이로 바다가 넘실거린다. 서로 손을 꼭 잡고 바다를 바라보는 뒷모습이 저 바다만큼 아름답다. 너무 아름다워 마음이 주저앉아 내리는 것 같다. 나는 바보같이 계속 눈물만 났다.
경이로운 세상
친구들은 먼저 도착해 있었다. 체크인하는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쉰 목소리로 겨우 체크인하고 도미토리가 아닌 개인실에 짐을 풀었다. 순례길에서 처음 묵는 개인실. 파도가 거의 없는 잔잔한 바다가 보이는 오션뷰다. 샤워하고 나왔는데 컨디션이 나쁘지 않다. 몸이 호전되고 있었다. 제발.
이틀 동안 저녁도 못 먹다가 드디어 함께 마트에 갈 수 있을 정도로 기운이 났다. 가는 길에 오랜만에 셀카도 찍어본다. 아직 눈은 퀭하고 생기가 없다. 눈썹은 손질을 못 해 덥수룩하고 주근깨는 더 깊고 많이 올라와 있다. 원래 얼굴색이 어땠는지 기억도 안 날 만큼 푸석하고 그을린 피부에 입술마저 검다.
그래도 기분만은 좋았다. 살아있는 이 기분.
저녁에 까미노에서 만난 YS언니에게 카톡이 왔다. 산티아고에 도착했는데 누가 자기를 보고 나인 줄 알고 내 이름을 불렀다고 한다. 다름 아닌 까미노 첫날 생장에서 만난 JM언니였다. 그들은 처음 만났는데 나는 그 두 분을 알고 있으니 이게 무슨 인연인가. 그렇게 서로 오작교가 되어 나는JM언니와 드디어 연락이 닿았다.
그녀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까미노 7일 차 로그로뇨에서다. 물집 때문에 고생하던 그녀는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무사히 산티아고에 도착했다고 한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일들이 있었을까? 그녀도 나도.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얼마나 달라졌을까?
주사위 같은 삶에서 피어나는 모든 우연적 인연들에 대해 생각한다. 세상은 경이롭다.
해가 완전히 질 때까지 건물 앞에서 한참을 통화하는 스페인 아저씨의 진지한 목소리가 오래도록 들려온다. 내일은 컨디션이 돌아와 줘야 할 텐데. 개인실에 있지만 어째 잠에 금방 들어지진 않았다.
bonus!
+ 씨 알베르게 : Albegue Moreir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