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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Hz 오즈 Sep 25. 2023

살아서 숙소에서 만나 (2)

Negreira - Lago

네그레이라 - 라고


태풍이 정말 오려나

아침 컨디션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회복했다기보다 걸을 수 있겠다 싶을 정도? 어제저녁보다는 나아진 것 같았다. 여전히 기운은 없지만 비타민, 프로폴리스와 감기약을 먹고 출발해 본다. 친구들에게는 혼자 천천히 걸을 테니 속도대로 먼저 가라고 당부해 두었다. 가다가 힘들면 택시 타고 갈 테니 걱정 말고 먼저 가.


마침 가는 길에 택시 전화번호 광고판이 유독 눈에 띄었다. 그래. 여차하면 여기 전화해서 택시를 타자. 사진을 찍어 두니 조금 든든한 마음이 되었다. 여기서 걷다가 죽을 일은 없을 거야. 그럼.


어제와 달리 날이 흐리다. 스페인에 태풍이 오는 중이라는 예보가 있었다. 예보대로라면 우리가 피스테라, 무시아에 도착할 때쯤 태풍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정말로 태풍이 와서 성난 파도를 볼지, 아니면 비껴갈지. 아니면 내일이라도 와서 걷기 힘들어질지,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기에, 오늘 할 일을 한다. 





바에서 화장실을 먼저 갔다가 나와 앉아 차를 마시고 있는데, 자리를 뜨기 5분 전에 식당 주인의 긴급한 스페인어가 들려왔다. 뭐라고 하는 거지? 하고 안쪽을 보니 무슨 가방을 들고 주인을 찾는다.

헉. 순간 나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동안 피부처럼 지니고 다니던 내 보조 가방이 아닌가?!


여행의 전 재산이 다 들어있는 가방을 화장실에 걸어두고 그냥 나온 것이다.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지금 정신이 없긴 하구나.. 다행히 모든 것은 그대로였다. 아..  가방을 발견해 무사히 전해준 사람들 모두에게 말할 수 없이 고맙다. 정말 행운이 따랐다. 그 어느 때보다 정신이 바짝 들었다.


앞에서 걷는 소은의 종아리에 어설프게 테이핑이 되어 있다. 제대로 한 게 맞는지 모르겠다. 몸이 아프면, 물론 힘은 들지만 걸을 수는 있는데, 다리가 다치거나 아프면 걷지 못하게 되니 사실 지금 가장 힘들고 아픈 사람은 소은이다. 자기도 모르게 산티아고까지로 맞춰져 있던 몸의 시계가 5일이 늘어나니 탈이 나기 시작하는 걸지도 모른다. 앞으로 3일. 딱 3일만 소은의 다리가 버텨주길.


나는 무슨 정신으로 걸었을까? 여전히 잘 기억나지 않게 걷는다. 무슨 생각 따위 별로 없었다. 몸이 힘드니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거의 다 온 거 같은데 후반에 오르막길을 만났을 때는 진짜 절망스러웠다. 보기엔 너무 예쁜 길인데 막상 그 앞에 서니 정말 절망적이었다. 

나한테 왜 이래? 길 진짜 원망스럽다 너.. 눈물이 다 핑 돈다. 

그러나 어쩌겠나. 걸어가는데 다행히 보이는 오르막길을 다 올라갈 필요는 없었다. 중간에서 더 오르지 않고 오른쪽으로 우회하도록 길은 나 있었다. 휴.. 뻘쭘해진 나머지 혼자 배시시 웃었다. 


언덕을 지나자 곧 마을이 나왔다. 결국 택시는 타지 않고 목적지까지 왔다.





67살과 76살

흰둥이 한 마리 꼼짝도 안 하고 잠자고 있는, 알베르게로 들어간다. 시설이 훌륭해 보였고 호스트는 친절했다.


그리고 나는 또다시 아프기 시작했다.


왜인지 걸을 땐 차라리 나았다. 숙소에서 씻고 난 이후에 늘 열이 오르고 컨디션이 급격히 저하되었다. 메그도 꼭 샤워 후에 고열이 났었는데, 나도 타이밍이 비슷했다. 짐작건대 샤워 후 내 젖은 긴 머리가 체온을 많이 뺏어가는 것 같다. 다음에 까미노를 오면 헤어드라이어를 챙기는 걸 진지하게 고려해 봐야겠다.


정말 태풍이 오려나.. 습하고 축축해서 한기가 더 느껴졌다. 힘들다. 아프면 정말 힘들구나. 숙소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내일 숙소는 고민할 것 없이 개인실로 예약했다.


그 와중에 영어권 사람들의 대화가 재밌게 들려왔다. 한참 수다를 떨던 두 아저씨가 대화 마지막쯤 나이를 오픈했는데 거기에 약간의 반전이 있었다. 


"나는 나이가 많아서 까미노에 다시 올 수 있을지 모르겠어."


"그래? 실례지만 몇 살인데?"


"나 67살이야."


"오, 정말? 나랑 숫자가 같은데? 나는 76살이야!"


이불 속에서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쿡쿡 혼자 웃었다. 까미노는 정말 모든 사람을 위한 길임에 틀림없다. 누구나 걸을 수 있는 길임이 틀림없다.


태풍이 정말 오려나.

태풍은 모르겠고 어느새 비는 내리고 있었다. 






bonus!

+ 알베르게 : Albegue Monte A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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