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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Hz 오즈 Aug 29. 2023

모든 탐험의 끝은

Fisterra - Muxia

피스테라 - 무시아


보통의 마지막 날

보통의 순례길 아침. 익숙하게 배낭을 꾸리고 아직 어두운 세상에 발을 디딘다.

비가 조금 내려서 숙소 입구에서 주섬주섬 우비를 꺼내 입었다. 우비를 걸친 두 친구가 다가온다.

올라, 부에노스 디야스!


워밍업이 덜된 아침은 늘 힘들다. 마지막 날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날씨 탓인지 더욱 축 늘어지고 무거운 몸을 이끌고 다른 날들처럼 말없이 걷는다. 아침 커피를 마시고 다시 걷다 보면 조금씩 컨디션이 올라오는 법이다. 비는 어느새 거의 내리지 않아 출발한 지 30분도 안 되어 우비 없이 걷기 시작했다.


피스테라에서 무시아까지 실제 걷는 거리는 약 28km. 보통 같으면 까미노 비석에 남은 거리가 표기되는데 이 길의 비석에는 거리표기 없이 화살표와 지명만 표기된다. 피스테라와 무시아 모두 0km 포인트 지점이기 때문이다.


산티아고에 도착하던 날처럼 오늘도 우리는 나란히 걸었다.





해변을 따라 걷다가도 마을 안쪽으로 돌아 산을 넘기도 한다. 울창한 숲길이었다가 포근한 산길이었다가, 무시아로 향하는 길은 다채로웠다.


산속에 꽤 팬시한 바에 들어가 아침 식사를 했다. 또르띠아를 시키고 오렌지 주스를 시켰는데, 작은 크로와상과 브라우니를 그냥 먹으라고 인원수대로 내어 주신다.

신발에 묻어있던 흙들이 자꾸 떨어져 깨끗한 바닥을 더럽히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어디쯤 온 걸까? 바다는 언제쯤 다시 보일까?

기약 없는 산속을 걷는데 저기 노란 옷을 입은 익숙한 얼굴이 손을 흔든다. 그가 손을 듬과 거의 동시에 우리도 그를 발견하고 소리를 질렀다. 두 팔을 벌려 다가서는 그와 우리는 부둥켜안았다. 많은 대화를 하진 못했지만 틈틈이 여러 곳에서 만나왔던 친구 모건. 한국 풀네임을 딱 한 번 말해주었는데 단번에 그걸 기억하고 다음에 그 이름으로 나를 불러주던 사람.

프랑스 길의 친구를 무시아 길에서 만난다는 건 거의 없는 일, 특별한 일이다.

그는 무시아에서 피스테라로 향하고 있었다.


"피스테라 어땠어?"

"사람이 많았고 바람이 많이 불었어. 무시아는 어땠어?"

"굉장했지!"





천사를 만난 적 있나요

무시아에 가까워질수록 놀랍게도 날이 개고 있었다. 점점 맑아지는 날씨에 멀리서도 투명한 바다가 눈이 부셨다.


오후 2시가 조금 못되어 숙소에 도착, 배낭을 내려놓고 다시 나왔다. 바다의 끝, 또 다른 0km 지점까지 걸어가기 위해서다.

길 따라가면 해변 끝에 무시아 성당 (Santuario da Virxe da Barca)이 보인다. 성당을 지나쳐 조금 더 올라가면 사진으로만 보던 커다란 기념탑(Miradoiro Jesus Quintanal)이 우뚝 서 있다. 유조선 침몰 사고를 기억하고자 세워진 것이라고 한다. 거친 파도 앞에서 우뚝 선 모습이 자연을 대변하는 듯 강인하고 크게 보인다. 누구라도 이 앞에 서면 세상을 다 가진 자가 되지 않고, 세상의 일부임을 받아들이게 되리라.


무시아는 피스테라보다 더 낮고 바다 가까운 곳까지 갈 수 있었다. 날은 더욱 화창해져 파란 하늘이 바다와 쌍을 이루고 있었다. 길의 끝에 서서 힘찬 파도를 보고 있으니 눈도 귀도 마음도 웅장해진다.


연출하지 않은, 지금 자연스럽게 나오는 내 표정이 궁금해져 셀카를 찍어본다.

볼살이 빠졌던가. 덥수룩하고 까만 얼굴에 기미가 볼을 뒤덮은 촌스러운 맨얼굴. 환한 표정과 반짝이는 눈빛 모두 언젠가 사라질 테지. 혹시 이 사진을 볼 때마다 되살아날까? 오늘 여기 이 순간, 이 모든 것들이.


해질 때 다시 이곳을 오기로 하고 숙소로 돌아서는데, 거짓말처럼 아는 얼굴이 보였다. 한동안 나의 인사를 받아주지 않아 내가 잠깐 나쁜 사람이라고 오해했던, 낯가리는 유럽 아저씨였다. 이름도 모르고 언어도 안 통하는 그는 역시 혼자서 작은 가방을 들고(이번엔 손에 들지 않고 어깨에 멘 채) 환하게 웃으며 나에게 인사했다. 처음으로 그와 허그를 했고, 같이 사진을 찍었다.


까미노 천사를 만나 본 적 있나요?

까미노에서는 누구나 한 번쯤 천사를 만난다고 하는데. 만나보니 도움을 주기 때문에 천사가 아니었다. 나에게 천사는 이유 없이 와서 작은 깨달음을 주는 사람이었다.

그들은 늘 적절할 때 온다. 마치 신이 보낸 메시지처럼.





이걸로 되었어


그곳을 떠나 다시 숙소로 돌아가는 길목에서 우리는 운명처럼,

포를 마주쳤다.

늘 마음으로 함께 걷던 포.

순례길 마지막의 날, 세상의 끝 무시아의 작은 골목에서 또다시 그녀를 기적처럼 만나게 되었다.


운명이라고밖에 할 수 없었다. 처음부터 서로 연결된 느낌을 강하게 받았지만 그래서인지 더더욱 서로를 만나려고 일부러 애쓴 적은 없었다. 늘 때가 되었다는 듯 자연스럽게 만나고 헤어지다가, 레온을 마지막으로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이제 만나기 힘들겠구나 생각했고 마지막 날 마주친다는 건 감히 바랄 수도 없었다.


그녀를 만나는 순간 흩어져 있던 모든 퍼즐이 맞춰진 기분이었다. 까미노의 모든 파편적 순간들이 맥락이 되고 이야기가 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 이제 됐다. 이걸로 되었어.

더 이상 바랄 게 없다.

이것으로 우리의 까미노는 끝이 났고, 완성되었다.





모든 탐험의 끝은

포는 바다로 가는 길이라 해 질 녘 그곳에서 만나기로 하고 우리는 숙소로 돌아왔다. 샤워를 했고 빨래를 했다. 각자 기호에 맞게 점심을 먹었다. 나는 언제나처럼 맥주와 마트 음식들로 차분한 오후를 즐겼다.

평소와 다름없어 보였지만 사실은 아니었다.

우리에겐 내일이 달랐다.

매일 할 일이 있었고 단순한 루틴이 있었지만, 내일은 조금 다르다. 아침 일찍 버스를 타고 산티아고로 돌아갔을 땐 순례자가 아닌 여행자로의 첫날을 맞이할 것이다.


알베르게 창밖에 어렴풋하게 비친 내 모습을 바라본다.

나는 준비가 되었을까?

여전히 알 수 없고 두렵다. 20년 전 스무 살의 내가 내일 저편에 있을 것만 같다.





금방 저녁이 되어 우리는 바다로 달려갔다.

바위에 앉아있는 포의 뒷모습을 단번에 알아봤고, 그 옆으로 나란히 앉았다.

까미노의 마지막 순간.

한 달이 넘도록 매일 해 뜨는 순간을 보다가

마지막 날, 오늘 비로소

끝이자 시작인 무시아에서

바다로 지는 태양을 바라본다.


이보다 더 완벽한 마무리는 없을 것 같다.


9월 초 프랑스 생장에서 시작해 산티아고를 거쳐 세상의 끝 무시아에 오기까지 38일, 걸은 거리 약 900km. 멀고 긴 길을 걸었지만 결국 내가 향한 곳은 저기 세상 끝이 아니라, 출발했던 그곳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지구가 둥근 것처럼 내 발걸음은 원을 그리고 있었다.


힘들었고 즐거웠고 행복하고 불행했던,

때로는 외롭고 비겁했고 아프고 경이롭던

까미노의 모든 순간을 사랑한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살아가는 중이다.


"우리는 탐험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탐험의 끝은 출발했던 그곳에 도달하여

거기가 어딘지를 처음으로 알게 되는 것이죠."


<리틀 기딩 중>  T.S. 엘리엇


"We shall not cease from exploration

And the end of all our exploring

Will be to arrive where we started

And know the place for the first time."


<Little Gidding>  T.S. Eliot






bonus!

+ 무시아 알베르게 : Albergue Bela Mux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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