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을 관계란 갑은 주고 을은 받는 관계다. 네덜란드 반도체 장비업체 ASML은 을이면서도 갑과 같은 슈퍼 을이다. 이 회사가 만든 장비를 사기 위해 세계 반도체 대기업들이 줄을 서고 있다. 최근 삼성전자의 이재용 회장이 코로나 경계가 높아진 가운데 출장을 다녀온 곳이 이 회사다. 작년에는 폼페이오 국무장관이 방문한 바 있다. 삼성은 장비 공급을 부탁하기 위해서, 폼페이오는 장비 공급을 막기 위해서였다. 화웨이는 이 회사의 장비를 받지 못하고 있다. 금년에는 중국 내 파운드리 1위 기업 SMIC도 추가로 제재 대상이 되었다. 대당 1억 5천만 불 대의 가격으로 F-35보다 비싸다고 알려진 이 회사 장비는 반도체 공정 중 노광공정에 필요하다. 노광공정은 웨이퍼에 회로를 그리는 과정으로 반도체 8개 제조 공정 중 가장 중요하다. 시간상으로 60%, 비용상으로 35%를 차지하는 핵심공정이다. 노광 장비 생산 기업은 일본의 니콘, 캐논도 있지만 최근 이 회사가 개발한 극자외선 (EUV) 장비는 일본 경쟁사들이 기술을 따라오지 못하고 있다. 세계 시장 점유율이 100%다. 비결은 무엇일까.
상생과 개방 경영
보통 ‘지마에’로 알려진 일본의 자전 주의(폐쇄적 개발 방식)와는 달리 이 회사는 개방과 협업 방식을 취하고 있다. 900여 개에 달하는 파트너 기업 및 기관과 협력을 통해 기술을 개발한다. 특히 중요한 프로젝트는 공동 개발 방식을 취하는데 몇 년 전 EUV 장비 개발 시에는 거액의 필요한 자금을 주요 파트너들로부터 투자받았다. 지분 25% 범위 내에서 인텔, TSMC, 삼성이 참여했다. 삼성은 당시 3% 지분만큼 투자했다. 그중 절반은 그 사이 매각하고 1.5%를 보유하고 있으며 이것만으로도 막대한 이익을 실현하고 있다. 공동 리스크, 공동 이익의 원칙은 독일의 렌즈업체 칼 자이스와의 관계에도 적용된다. 노광장비에서 렌즈는 중요한 부품이다. ASML은 극자외선 장비 개발 시 칼 자이스의 연구비 충당을 위해 10억 유로를 투자했다. 지분으로 24.9%를 취득했다. 별도 연구비 2.2억 유로를 투자하고, 6년간의 개발과정에도 5.4억 유로를 더 투자했다. 이익 공유, 리스크 공유 원칙의 예이다.
또 협력업체 지정에 있어서 제품당 한 파트너를 선정한다. 경쟁으로 인해 품질이 낮아질까 염려되기 때문이다. 협력업체와의 신뢰가 있어 부실 공급 걱정은 없는 편이다. 진행과정을 확인하는 절차는 있다. 품질, 물류, 기술, 비용 즉 QLTC라고 불리는 점검 시스템에 의해 1단계에서 5단계까지 등급 평가를 한다. 내부 인사 정책 역시 자율적인 신뢰관계를 중요시한다. 주 40시간 근로시간이지만 탄력적으로 운영한다. 바쁠 땐 48시간, 덜 바쁠 땐 32시간 근무를 하고 급여는 변동 없다. 시간 저축제를 운영하기 때문이다.
혁신을 소싱한다
연구개발은 독일의 아헨대학, 벨기에의 반도체 연구기관 IMEC 등 국내외 다양한 기업 및 기관과 협력관계를 유지한다. 일본의 두 경쟁사가 쫓아오기 힘들 정도의 높은 시장 점유율은 개방적 협력관계에 크게 기인한다. 필요한 부품의 80%는 아웃 소싱한다. 자사는 설계 공정에 집중하고 나머지는 외부 소싱한다. CEO 베닝크는 이에 대해 ASML은 부품이 아니라 혁신을 소싱한다고 말한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