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6 미군의 초토화 작전, 나바호족의 고난의 길

캐년드 쉐이(Canyon de Chelly), 디네(Dine) 대학

by Jaeho Lee

오늘 행선지는 캐년드쉐이(Canyon de Chelly)이다. 수백만 년에 걸쳐 흐르는 물에 사암이 깎여 깊은 계곡이 만들어졌고, 수십 킬로나 이어진 이 계곡에는 풍부한 물과 각종 동식물들이 존재하였기에 대략 5천년전부터 사람들이 거주하여 왔다. 기원전 200년경부터는 농사가 시작되었고 사람들은 절벽의 틈을 이용하여 주거지를 만들기 시작했다. 또한 절벽 면에 벽화를 그리기도 했다. 하지만 1400년경부터 이들은 계곡을 떠나 다른 곳으로 이동했고, 북쪽에서 이주해온 나바호족이 계곡을 차지하게 된다.

전망대에서 내려다 보이는 캐년드쉐이의 모습

캐년드쉐이는 나바호족에게 비극의 상징이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나바호족은 당시 아리조나, 뉴멕시코 지역을 지배하던 멕시코인들과 상호거래를 하면서 한편으로는 공격과 약탈을 주고받는 긴장된 관계를 유지해왔다. 멕시코와 전쟁에서의 승리로 해당 지역을 1848년에 영토로 편입한 미국은, 이제 자국 국민이 된 거주민과 나바호족 간의 갈등을 해결해야 했고, 나바호족을 견제하기 위해 나바호 영토에 요새를 세워 감시하게 된다.


이후, 요새에 배치된 군인들과 인근에 거주하는 나바호족간에 목초지를 둘러싸고 분쟁이 벌어진다. 미군은 요새 인근 초지는 군마를 위해 사용하겠다고 선언하고 나바호족 말의 출입을 금지시킨다. 당시 나바호족은 스페인 사람들을 통해 보급된 양들을 활발히 목축하고 있었는데, 방목되고 있던 양떼가 울타리도 딱히 없던 미군 요새 인근 초지로 넘어가자 미군들이 이 양떼를 모두 사살해 버리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에 대한 나바호족의 보복은 1860년 미군과 나바호족 간에 전쟁으로 이어지고, 화력에서 열세에 있던 나바호족은 미군의 추격에 게릴라전으로 맞서지만 1년 간의 소모전 끝에 양 측은 휴전에 합의한다.


남북전쟁이 발발하자 미국 정부(북군)는 캘리포니아와의 안정적인 연결로 확보를 위해 아리조나와 뉴멕시코 지역의 안정화를 추진하게 되고, 뉴멕시코 사령관으로 부임한 칼턴은 1862년 해당 지역의 아파치와 나바호족을 뉴멕시코 남동부에 위치한 Bosque Redondo 보호구역으로 몰아내기로 결정한다(이러한 과격한 정책의 배경에는 칼턴이 이들 부족의 땅을 탐낸 이유도 있다고 알려져 있다). 많은 나바호족은 미군에 쫓기고 붙잡혀 머나먼(480킬로) 신설 보호구역까지 고난의 행진(long Walk)을 시작하게 된다.


하지만 Bosque Redondo 보호구역의 환경은 너무나 열악하여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라는 정보를 접한 대추장 마뉴엘리토를 비롯한 일부 나바호족은 캐년드쉐이로 대피하여 항전에 들어간다. 이곳은 수십킬로의 계곡이 여러 갈래로 굽이치고 있어 숨어서 게릴라전을 펼치기에 더할 나위 없는 입지였다.


한때는 인디언들과의 대화를 우선시했던 현장 사령관 킷 칼슨은 칼턴장군의 강경진압 명령에 반대하며 사표를 내기도 했지만, 결국은 그의 지시에 따라 초토화 작전을 진행한다. 계곡입구부터 시작하여 계곡 내에 있던 나바호족의 모든 마을을 불태우고, 가축들을 도살하고 작물들을 태워버리고 과실나무들을 베어내는 방식이었다. 이 과정에서 발견되는 모든 나바호족은 사살됐다. 나바호족이 매우 자부심을 느끼고 아껴온 복숭아나무 수천 그루도 모두 베어졌다. 나바호족은 조상 대대로 소중히 내려온 복숭아 나무들이 베어지는 것에 너무나 슬퍼했고, 애꿎은 나무에까지 보복을 하는 미군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이러한 초토화 작전으로 먹을 것마저 떨어진 나바호족은 마지막까지 버티던 대추장 마뉴엘리토마저 항복함으로써 결국 1866년 미군과의 전쟁을 종료하게 된다.


4년간에 걸쳐 1만명이 넘는 부족원들이 눈물의 행진을 하게 되는데, 이들 중 상당수가 행군 도중에, 그리고 보호구역에서의 열악한 환경으로 사망한다. 이후 나바호족의 열악한 처지에 대한 탄원이 받아들여져서, 1868년 나바호족은 원래 살던 곳으로의 귀환이 허락된다. 수많은 부족민이 희생되었지만 자신들의 땅으로 돌아오게 되고 넓은 지역이 보호구역으로 인정된 점을 감안하면, 나바호족은 다른 부족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혜택받은 부족이라고도 볼 수 있다.


North Rim Drive를 따라 가다 보면 계곡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전망대들이 나온다. 대부분의 전망대에서 계곡의 모습이 한 눈에 들어오고 계곡 중턱이나 하단 바위틈에 위치한 고대인들의 주거지 유적들을 바라볼 수 있다. 어떤 전망대의 이름은 Massacre Cave Overlook이다. 나바호를 쫓던 미군이 동굴에 은신해 있던 나바호족을 발견하고 학살한 데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20190717_115739.jpg


직접 계곡 아래까지 내려가보려면 몇 가지 옵션이 있다. 이 지역은 나바호부족 영토인 관계로, 계곡 아래로의 진입은 나바호부족의 승인을 받은 가이드가 동반해야만 가능하며, 제대로 된 도로가 없어 하이킹을 하거나 승마 혹은 4륜 구동차를 이용한 방문만 가능하다. 다만, White House Overlook이라는 곳에서 White House 유적지까지의 트레일 구간만 유일하게 아무런 제약 없이 방문할 수 있다. 이 트레일은 왕복 두 시간이 소요된다고 되어 있다. 다리 상태가 좋지 않은 아내 상황을 고려하면 계곡 밑바닥까지 오르내려야 하는 트래킹은 무리일 듯 하다.


비지터센터를 방문했는데, 가이드 투어에 대한 설명은 따로 없고 다만 투어제공자들의 전화번호 리스트만 준다. 문제는 핸드폰을 사용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이틀 전 주니족 보호구역에 들어선 이후로 아리조나주와 뉴멕시코주의 접경 지역을 오가는 3일 내내 로밍 신호가 거의 잡히지 않는다. SK텔레콤에서는 T모바일과 AT&T 두 개 회사의 망을 로밍으로 연결해 준다는데, 아무래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어쨌거나 전화를 사용할 수 없으니 직접 부딪혀볼 수 밖에.


South Rim Drive를 들어서자마자 예상했던 대로 투어 간판들이 나타난다. 말과 사륜 구동 사이에서 잠시 고민하다가 사륜 구동을 선택했다. 시간이 많지 않은 우리는 4시간 기본 투어 프로그램 대신 1시간 투어를 부탁하고 가격도 조정하려는데, 가이드는 요 며칠 손님도 없었다며 내가 오케이도 하기 전에 신이 나서 차 키를 들고 나선다.


계곡 입구에서부터 바닥은 미세한 흙이 모래처럼 쌓여있다. 사륜 구동이 필요한 이유이다. 차는 부드러운 흙모래 위를 마치 배가 물위를 달리듯 미끄러지며 나아간다. 계곡 바닥은 생각보다 더 넓다. 그리고 곳곳에서 고대 주거 유적지들을 좀 더 가까이서 볼 수 있고 고대인들이 남긴 벽화들도 관찰이 가능했다. 일부 벽화는 도대체 어떻게 그곳에 접근했을지 의아할 정도로 높은 곳에 위치해 있다.

우리의 나바호 가이드 이름은 빅토리아이다. 차를 엄청 터프하게 몬다. ‘I’m crazy woman!’이라고 소리친다. 도저히 갈 수 없을 것 같은 곳도 마구 몰고 들어간다. 한 벽화를 가리키더니 나바호족이 그린 것이라 한다. 어떻게 고대인 벽화와 구별해서 알아 보는지 물으니 말을 그렸기 때문이라고. 미국 인디언들이 말을 처음으로 목격한 것은 1500년대 스페인인들의 진출 때였고, 그 즈음에는 나바호족이 기존 원주민을 대신해 이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으니, 이 지역에서 말을 그릴 수 있었던 자들은 나바호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계곡 바닥에는 물이 전혀 없다. 지금이 가장 건조한 시기란다. 9월부터는 비도 좀 오고해서 가을에는 물도 흐르고 겨울에는 얼음위로 운전해 간단다. 이곳은 고원지대라 여름에는 이리 뜨거워도 겨울에는 얼음이 얼 정도로 추운 곳이다. 이런 날씨에서 미군에 쫒기던 나바호족은 연기로 위치가 탄로날까봐 불도 지피지 못하며 겨울을 나다가 얼어 죽어갔다. 빅토리아의 거친 운전솜씨와 계곡 경치에 반해서 반환점까지 왔을 때 ‘한 시간 더!’를 외쳤다. 더욱 신이 난 빅토리아는 트레일 지역인 화이트하우스 유적지를 지나 더 깊은 계곡까지 들어갔다.

캐년드쉐이를 떠나 디네대학(Dine College)으로 향했다. 이 학교는 1968년에 나바호족이 자체적으로 설립한 미국 내 최초의 인디언 부족 대학이다. 디네대학이 모델이 되어 이후 37개의 인디언부족 대학이 설립되었다. Dine는 나바호말로 사람들이라는 뜻이고 나바호족이 자신들을 지칭하는 말이기도 하다. 우리로 따지면 ‘한국대학’ 혹은 ‘국민대학’에 해당할 것이다.


사일리(Tsaile)라는 마을에 위치한 아담한 대학 캠퍼스에는 나바호 전통 가옥인 호간(Hogan)의 형태를 본 따 팔각형으로 만들어진 강의동들이 들어서 있다. 학교에 대한 설명을 듣고 싶어 지나가는 학생에게 안내센터 위치를 물으니 5시에 문을 닫는다 한다. 시계를 보니 4시 57분. 전속력으로 달렸다.

대학 소개를 받고자 들렀다고 하니 담당직원 데이블린이 친절하게 맞아준다. 원래 2년제 대학으로 설립되었는데 최근에 4년제로 바뀌었으며 현재 재학생 수 1500명, 교수는 68명. 미국 인디언만 입학하는지 물으니 그건 아니란다. 아프리카와 일본에서 온 경우도 있었단다. 정말? 혹시, 한국은? 아직 없었다고. 90% 이상이 미국 인디언부족 출신이고, 또 90% 이상이 나바호부족 출신이라 하니 아직은 나바호족 대학이라 보는 것이 타당할 듯 하다.


한국 얘기를 꺼내니까 옆에서 퇴근 준비를 하던 남성이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하며 인사를 한다. 해군에서 복무했을 때 진해에 근무한 적이 있었는데 10년 전 일이라 한국말은 많이 잊었다고. 이름을 물으니 켄이라며 종이에 무언가를 적는다. ‘나니니’… 그리고는 자신없어 한다. 자신의 성을 적은 것이었다. 쓰고자 했던 말은 ‘나타니’. 그래도 이 정도면 대단하다.


학교에서는 일반 대학의 커리큘럼을 제공하는데, 나바호족 대학이다보니 나바호 역사, 문화, 언어에 대한 과목들이 추가로 개설되어 있다. 한가지 특이한 점은 Public Health 프로그램으로 여기에는 우라늄 노출로 인한 건강 영향 과정이 포함되어 있다. 1940년대에 나바호 보호구역에서 우라늄 광산이 발견되고 미국은 나바호부족과 별도의 협의나 승인 없이 이곳에서 대규모로 우라늄 채굴을 벌였다. 안전조치 없이 진행된 채굴로 인해 많은 나바호족이 방사능 노출 피해를 입었다. 이후 부족의 항의로 광산은 폐지되었지만 나바호족에게는 아직 남아있는 상처이다.


마지막으로 나바호족 관련 한가지 더. 2차 세계 대전에서 나바호족은 code talker라고 부르는 암호병으로 큰 활약을 펼친다. 약 400명 정도가 해병대에서 암호병으로 활약했다고 전해지는데, 나바호 언어를 조합해서 만든 이들의 암호는 일본군이 결코 해독해낼 수 없었고, 특히 이오지마 전투에서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영화가 ‘Wind Talker’이다. 아,그리고 유명한 골프선수 리키파울러 외할머니도 나바호 부족인이다..

오늘은 유타주로 진입했다. Monticello라는 곳에서 1박을 한 뒤 내일은 Newspaper Rock과 Mesa Verde를 방문할 예정이다. 오늘 캐년드쉐이에서 볼 수 있었던 인디언 암벽화와 절벽 주거지의 끝판왕들을 만나보는 일정이다.

몬티셀로에서 우리가 묵었던 농가 주택을 개조한 숙소
keyword
이전 06화Day 5 흙집 마을이 황금의 도시로 불린 사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