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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러기퐝 Oct 17. 2020

나는 왜 기자가 됐는가

기자질1

  내가 왜 기자를 하려고 했는지, 솔직히 이젠 기억이 불확실해지기 시작한다. 아내는 알콜성 치매가 아니냐고 했다. 이 글을 쓰기 시작한 이유도 그중에 하나다. 나이가 40세를 넘어가면서 이젠 내가 나비인지 사람인지, 호접지몽(胡蝶之夢)처럼 헷갈리기 시작했고, 기레기인지 기자인지, 사람인지 술인지 더 헷갈리기 전에 하루라도 빨리 기록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100년쯤 지나 이제 기자라는 단어가 없어지고 기레기라는 단어만 남을지도 모를 일이다.
  기자수필을 쓰려면 나 먼저 이 질문에 답해야 한다. 알랭드 보통의 책 제목처럼 ‘나는 왜 너를 사랑하는가’와 같은 질문부터 시작해야 된다. 나는 왜, 어찌하다 기자가 됐는가.
  한 가지 확실한 건 재수 때인지 삼수 때인지 한 방송사에서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기록, 독일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본 영향이 있다는 것이다. 힌츠펜터 씨는 나중에 영화 ‘택시운전사’에서도 다뤄졌다. 그가 목숨을 걸고 찍은 영상으로 인해 광주의 실상은 국내외로 알려졌고 현재까지도 당시 사진과 영상이 남아 참상을 전하고 있다.
  두 번째는 더 이상 시험에 내 인생을 몇 년씩 소비하고 싶지 않았던 점도 사실이다. 첫 수능에서 고교 졸업 후 괜찮은 대학에 들어갔지만 뒤늦게 마음먹고 공부를 한 터라 시험에 아쉬움이 남았고 '반수'를 시작했다. 그러나 수능 성적은 첫 수능과 거의 비슷하게 나왔고 결국 원하던 대학과 전공에서 떨어졌다. 결국 어찌하다보니 삼수를 선택하게 됐다. 그렇게 친구들보다 2년 늦었다보니 대학에 들어와서 더 이상 고시를 보기도, 그냥 남들이 얘기하는 '정해진 길'대로 가긴 싫었다.
  기자라는 직업이 진실을 추구하며 사회적 기여를 할 수 있고 고고한 지식인, 선비, 지사 행세를 할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 선배들 이야기를 들어보니 어떤 선배는 그냥 아무 준비 안하고 쉽게 언론사에 들어가기도 했고 어떤 선배는 몇 년씩 준비하다 안 되는 경우도 있었다. 일단 전자의 길을 따라간다는 전제 하에 책을 꾸준히 읽고 다양한 경험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 번째는 대학에 들어온 뒤 글에 관심이 많아진 이유였다. 전공인 정치학 외에도 철학과 문학, 예술에 관심이 많았다. 자칭 문학소년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알베르 카뮈도 기자였고 기형도 시인도 기자였다. (금연을 결심할 때마다 담배를 문 카뮈와 김수영 시인이 멋있는 사진이 생각나 금연에 성공하지 못했다는 핑계를 대기도 한다.) 글로 먹고 사는 직업 중 가장 현실적인 선택이었다.  
  솔직히 낮술을 마실 수 있는 직업이라는 이유가 그때 들었는지 모르겠다. 오전이면 마감이 끝나는 석간 시절도 있었고 이제 거의 없어졌지만 일부 낮에도 반주를 하는 출입처들이 조금은 있다. 어쨌거나 저 이유는 낮술이 허용될 만큼 직종 자체가 좀 자율적이라고 해야 할지, 자유분방이라고 해야할지 리버럴한 측면이 있다고 비춰졌고 실제 그랬다.
  수직적 피라미드 구조지만 그렇다고 글쟁이들이 모인 기자 사회는 리버럴하고 수평적이어야 한다. 후배가 선배에게 언제든 의견을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회사에서도 ‘차장님’ ‘부장님’ ‘국장님’이라고 부르지 않고 ‘님’자를 빼고 부르는 이유는 그러한 의미와 전통이 있다고 본다.
  어찌됐든 대학 3학년 마치고 군대를 2년 다녀왔고 본격적으로 입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만약 안 된다면 대학원에 적을 걸어두거나 적을 건 김에 석사를 할 생각도 있었다. 입사 준비 첫 해 10개 정도 치른 시험에서 1개 회사에서만 필기시험을 통과했다. 역시 나는 안타깝게도 ‘그냥 시험 쳐서 붙는 유형’은 아니었다. 좌절은 컸다.
  2007년 2월 말 졸업식이 끝나고 백수가 된 직후 나는 대학원에 가기보다는 다양한 해외 경험을 쌓겠다는 명분으로 미국에 두 달 다녀오고 5월부터 몇 달 본격적으로 시험 준비를 했다. 그러자 논술과 작문으로 이어진 필기시험은 절반 이상 통과가 됐다. 한 군데는 최종면접만 남았지만 가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우리 회사 최종면접과 다른 유력 언론사 실무평가가 날짜가 겹쳤는데 더 가고 싶던 우리 회사를 선택했다. 우리 회사는 내가 지원한 대학생 인턴에서 두 번 떨어졌고 첫 해 필기시험에서 낙방했고 둘째 해 합격했다.
  현재를 살고 싶어서 역사의 현장을 지키고 싶다는 게 유치한 자기소개서에 써있었을 거다.  
  가끔 ‘아 진짜 못 해먹겠다’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으면 어떻게 들어온 회사인지, 입사시험에 몇 번이나 떨어졌는지, 누군가 간절히 이 자리를 원하는 다른 사람들이 있었다는 걸 생각해야 된다. 근데 안타깝게도 빡이 쳤을 때는 13년이 지나 그 또한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래서 적어놓고 계속 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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