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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잔향 13화

큰 그림? 아니, 작은 그림은...

by 이제이

가끔은
미래를 펼쳐놓고
지도 위에 발을 디딘다
아직 오지도 않은 먼 나라의
태양까지 상상하며

그러다 갑자기
양말 한 짝이 보인다
세탁기 속에 남겨졌던 것

하루는 그렇게
한 발은 달리고
한 발은 멈춘다

나는 큰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라,
머릿속은 아득한 전개도로 가득하다



그런데
계단 모서리에서 넘어진 날
바닥의 금이 눈에 들어왔다
그건 오래된 균열이었다
내가 자주 밟았던 자리였다

나는 때때로
작은 그림을 살아내고 있는 나를
인식하기도 한다
한 번에 그릴 수는 없어
자주 잊고,
그래서 자주 그렸다



큰 그림은
언제나 거창하지 않다
작은 그림은
언제나 소소하지 않다

나는 자주
평균대 위에 선 기분이었다
왼발엔 계획, 오른발엔 우연
팔을 벌려 중심을 잡고
앞으로 갔다가
잠시 뒤로 물러섰다가

균형은 늘 찰나였고
그 찰나들이 이어져
내가 걸어온 하루였다

때로는
놀이공원에서의 하루로
정신과 마음과 몸의 모든 긴장을 풀고
미친년 꽃밭같이 놀다가도

내 삶이 지속될 수 있게 하는
단조로운 일상도 사랑하는
지루하게 성실한 나는 귀하다



그러니까 오늘도
작은 그림 옆에
큰 그림을 세워두고
비틀거리며
걷는다

그건 그냥
사는 법이다...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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