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왜, 무엇 때문에
어쩌면 우울증이 너무 늦게 찾아온 것일지도 모른다.
2019년 7월, 나의 큰아이가 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한참 큰아이 등교준비에 둘째 아이 어린이집 등원에 바쁠 시간 언니한테서 전화가 왔다.
"엄마 잠깐 모시러 올 수 있어?"
일단 전화를 끊었다. 아이들을 모두 등교시키고 우리 집에서 차로 20분 거리의 엄마네 집으로 갔다. 현관문을 열었다. 엄마는 멍하니 소파에 앉아있었다. 그새 몸이 수척해지셨다. 언니는 엄마의 몸상태에 대해 설명했다. 몇 끼를 굶으셨고, 구토증상까지 있다고 한다. 억지로 밥을 먹어서 구토까지 하더란다. 언니가 출근 전 엄마가 걱정돼 와 봤는데 이런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엄마의 멍한 모습에 언니도 놀라고 나도 놀랐다.
왜, 갑자기?
엄마를 혼자 둘 수 없었다. 몇 가지 옷만 싸서 우리 집에 모셔왔다. 엄마는 입맛이 없다며 이것저것 모두 거부하셨다. 그러더니 우리 집 거실 소파에 힘없이 누우셨다. 낯선 모습이었다. 엄마는 한 번도 우리 집 소파에 누운 적이 없으셨다. 항상 식탁에 앉거나 여기저기 둘러보고 청소를 하거나 반찬을 만들어줬었는데, 뭔가 잘못되고 있음이 확실했다.
바로 병원에 예약을 하고 진료를 받았다. 엄마는 노인성우울증이었다.
"할머니, 너무 착해서 그래요."
할아버지 선생님이 엄마와 몇 마디를 나누더니 그렇게 말했다. 내가 딸이라고 하니깐
"성질 고약한 사람들은 기분 나쁘면 옆에 사람들에게 화내고 풀면서 살거든. 엄마는 착해서 참고 살아서 그래."
착해서? 착하게 살면 복을 받아야 하는 거 아니었던가. 할아버지 의사 선생님과 일주일에 한두 번씩 상담을 했지만 딸로서는 조바심만 났다. 조급한 마음이 앞서니 약이고 상담이고 모두 효과가 없어 보였다. 사실 엄마가 착해서 우울증 걸렸다는 그 한마디가 나를 화나게 했다. 엄마는 착해도 너무 착했기 때문이다. 지금이 아니라 30년 전에 엄마가 이랬다면, 아니 20년 전에라도 이랬다면 엄마는 지금 웃고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