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서른아홉에 날 낳았다. 엄마가 날 낳고 펑펑 울었다는 이야기는 뒷집 친구 엄마에게 처음 들었었다. 굳이 알고 싶지 않은 말을 친구 엄마는 왜 했을까. 엄마가 날 낳고 울었다는 사실은 마치 출생의 비밀을 알게 돼 충격에 빠지는 드라마의 주인공이된 기분이었다. 아들이 아니란 이유로 난 엄마에게 슬픔이 되었다니. 하지만 난 재미나게 자랐다. 고추 달고 태어나진 않았지만 난 여자아이라서 행복했다.시골엔 할 수 있는 놀이가 참 많았다. 소꿉놀이는 혼자 해도 즐거웠다. 병뚜껑 주워 밥그릇으로 쓰고, 납작한 돌은 도마가 되었다. 옥상 벽돌에 밥그릇을 조르륵 진열하고, 풀 잎사귀 뜯어 갖가지 반찬도 만들었다. 난 엄마 도움 없이 잘 노는 아이였다.
엄마는 여느 농촌 아낙네처럼 낮에는 논, 밭에서 살았다. 늦은 저녁이 되면 엄마가 보고 싶어, 초저녁이 되면 눈물이 나곤 했던 시간도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내겐 동네 친구들이 있었다. 동네 언니, 오빠들, 동생들 우린 전우애와 비슷한 감정을 가졌는지 똘똘 잘 뭉쳤다. 그들의 부모님도 농사일로 부재중. 우리는 집과 집 사이에 있는 빈 공간이나, 어느 집의 넓은 마당에서 숨바꼭질에 얼음땡 놀이를 하며 오후 시간을 보냈다. 저녁 5시에서 6시가 되면 경운기 소리, 트랙터 소리가 크게 들렸다. 이젠 집에 들어가야 한다는 시골 동네의 수신호. 부모님들이 논에서, 밭에서 돌아오면하루가 끝나는 시간이다.
낮동안 지칠 법도 한데, 엄마는 저녁밥을 맛있게 차려줬다. 늘 다른 반찬에 국과 찌개. 엄마가 차린 동그란 밥상에 둘러앉으면 행복했다. 엄마의 품이 그립기도 했지만 갓 지은 밥과 맛있는 반찬들로 충분한 보상이 됐다. 그래, 엄마의 밥은 내게 따뜻한 사랑이었다.
결혼 후에도 엄마는 멸치볶음, 진미채볶음, 시금치나물, 콩나물무침까지 넉넉히 만들어 일주일에 한 번씩 반찬을 싸주셨다. 주말에 집에 간다고 하면 사위 좋아하는 고등어김치찜에 아이들 먹을 생선구이며 갈비까지 진수성찬을 만들어 놓고 우리를 반겼었다. 엄마의 밥상은 늘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주었었다.
맛은 그냥 그랬지만 이젠 내가 엄마를 위해 전을 부친다.
또 내가 큰아이를 출산했을 때는 본인이 직접 산후조리를 해주겠다며 만반의 준비를 마치셨던 분이다. 다만 내가 힘들어서 조리원에 들어가게 돼 오히려 섭섭해하시던 사랑 많고 부지런한 친정엄마였다.
그랬던 엄마였는데, 이젠 더 이상 엄마는 밥을 하지 않는다. 맛있는 반찬 만들기 위해 장도 보지 않고 하루 종일 소파에 누워계셨다.
자주 하던 전화도 안 하고, 전화를 해도 잘 받지 않았다. 그리고 주말에 우리가 가면 귀찮아했고, 맛있는 반찬이 하나도 없었다. 그렇게 엄마는 모든 게 귀찮아지고 있었던 거다.엄마가 점점 변하는 것 같아 속상할뿐 엄마가 우울증이라고는 눈치채지도 못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