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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멜로드라마 Oct 23. 2023

초저녁의 공허함처럼 엄마가 내게 왔다

  1. 이야기에 앞서서....

 엄마의 이야기를 하기 앞서 엄마 하면 떠오르는 내 기억 속 첫 번째 이미지에 대해 글을 써보았다. 어린 시절 엄마에 대한 내 기억은 왜곡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타인을 바라보는 나만의 '시선'이란 것이 생기기 이전의 어린 나에게 각인된 엄마의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엄마를 바라보는 딸인 나의  주관적인  마음이 누군가에게 슬픔으로 닿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2. 어린 시절 엄마는 초저녁의 색이었다.

 어스름이 마을을 덮을 무렵 언니는 빨랫줄에서 하루를 달군 옷가지를 걷어왔다. 누가 시키지 않았어도 나보다 열 살 많은 언니는 늘 그 시간이면 빨래를 갰다. 빨래에선 불에 탄 무언가의 연기 냄새가 묻어있었다. 그 냄새를 맡으며  이유 없이 울곤 했었다. 이유를 묻는다면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니라, 이유를 모른다는 표현이 맞겠다.


  어렴풋 그때 난 일곱 살로 기억된다. 일곱 살에 초등학교에 입학한 난 아침 일찍 등교를 해야 했다. 내가 살던 곳은 시골이었고 학교는 옆 마을에 있었다. 학교까지는 걸어서 40~50분 걸렸고 그 당시에는 아이들이 대부분 걸어 다녔었다. 성인이 돼 생각하니 작은 체구의 아이가 걸어 다니기엔  힘들었을 것이다.

 하교 후 지쳐서 집에 오면 아무도 없었다.  비어있던 집. 빈 집을 향해  일곱 살 꼬마는 엄마의 대답을 기대하며 '엄마~'하고 불렀었다.

메아리로 돌아온 '엄마~'란 두 글자가 내게 준 공허의 시간, 텅 빈 유년의 시간이었다. 

 

 엄마를 기다리다 잠이 든 꼬마는 언니가 틀어 놓은 티브이 소리에 눈을 떴고, 여전히 엄마가 돌아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엄마가 보고 싶었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언니가 그만 울라며 다그쳐도 계속 소리 내어 울었다. 얼마쯤 울었을까, 하루 종일 일하고 돌아온 엄마. 엄마에게 폭 안기며 울음을 그쳐 보지만 엄마의 머릿수건에서는 무심하게도, 언니가 개던  빨래에서 맡았던 연기 냄새가 났다. 무언가를 애타게 태웠을 불, 난 애타게 엄마를 기다렸는데. 나의  비어있는 시간들이 어떤 보상도 연기처럼  

 사라진 느낌이었다.


 이런 기억이 내재돼 있다 보니, 엄마에 대한 기본배경은 늘 초저녁의 쓸씀 함이다. 눈물이고 외로움이다.

엄마는 나를 사랑해 주었다. 타고나길 따뜻한 사람인지라 막내딸을 잘 보살펴 준 기억도 많다. 그런데 왜 난 엄마를 떠올리면 늘 이 장면일까, 모르겠다.


 서른아홉에 나를 낳았던 엄마는 이제 여든두 살이 되었다. 4년 전(2019년 7월), 우울증을 진단받은 엄마는 삶 전체가 흔들렸다.

 2009년에 결혼하고, 같은 해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혼자 남은 엄마가 가여웠다. 첫 아이를 낳자 엄마는 손주 봐주시는 재미에 남편을 잃은 것을 위로 삼아 많이 웃었었다.

 그런 엄마와 주말마다 얼굴 보고 가깝게 지냈다.  그렇게 10년을 보내다 보니  사실 지치기도 했었다. '그래 10년이면 한결같았다... 이만하면 됐어'하고 딸의 의무감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 엄마는 우울증에 걸렸다. 엄마를 보살펴야 하는 또 다른 책임이 찾아왔다. 엄마를 온전히 품을 자신이 없었다. 엄마를 부담스럽게 여기는 내 마음을 들켜 불편했었다. 엄마가 내게 사랑을 주었지만, 엄마의 머릿수건 냄새처럼 나도 무심하고 싶었다. 하지만 난 엄마의 딸이다. 그것도 사랑받은 막내딸. 그래서 엄마를 돌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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