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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헉죄송 Oct 26. 2019

나는 농장에서 쓸모 있는 존재일까..? 下

우프, 우프코리아, GG_105

어느 순간부터 '내 삶의 쓸모'라는 개념에 천착하게 되어 버린 나에게 2017 대선 후보 토론은 아주 인상 깊었다. 토론 내용이라든가 후보자의 자질, 경력이 아니라 후보자들의 자신감이 인상 깊었다. 대통령이라는 어마어마한 직책을 두고

"내가 바로 적임자다, 나야말로 잘 해낼 수 있다"

라고 하는 자신감이 참 신기했다.

'내가 농장에서 쓸모 있는 존재일까?'

우프를 시작하며 했던 이 고민은 농장이라는 구체적인 장소만 더해졌을 뿐 이전부터 줄곧 가져온 의문이었다.


그리고 이전의 나는 이 의문 앞에서 나는 스스로가 어디 써먹을 구석이 없다고 생각을 했었다.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다고 느껴졌었다.

일의 영역은 물론이고 일상생활마저 쉽지 않았다. 곧잘 사람들 앞에서 위축됐었다. 일상적인 얘기를 하다가도 재미도 없고 아는 것도 없는 내가 상대방의 시간을 뺏고 있는 것 같이 느껴졌고, 얼른 사라져 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나는 이 세상에서 쓸모 있는 존재일까? 어디다가 써먹을 수 있을까? 쓸모가 없다면 살아 있을 명분도 없는 것 아닐까?'

이 고민은 늪 같은 고민이었다. 한 걸음 한 걸음 착실히 벗어날 수 있는 고민이 아니었다. 벗어나려고 애를 써도 결국 빠져나오지 못했다. 나의 쓸모, 무가치함이란 주제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었다. 이 주제에 사로잡혀버린 것이야말로 나의 '인간 실격'을 완성시키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은 고민을 벗어나게 해 주지는 않았지만 잠시나마 온전히 집중하며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었다. 다만 이 소설을 읽으면서도 어떠한 고통을 이렇게 문학으로 승화해내는 능력이 너무도 대단하게 느껴져 그냥 고민만 하고 있는 스스로가 한층 더 쓸모없이 느껴지기도 했다.)

오랜 기간 끝끝내 벗어나지 못했던 이 고민을 GG_129에서 농사일을 하며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었다. 내가 하는 일은 농장에 도움이 되는 듯 했다. 내가 좀 쓸모가 있는 듯 했다. 묘한 충족감을 느끼며


'이게 바로 그 자존감이라는 걸까!'


싶었다. 하지만 이 행복함은 또 다른 불편함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호스트님은 참 친절하셨다.

'왜 이렇게까지 잘해주시는 거지..?' 싶기도 했다. 일을 그럭저럭 열심히 하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잘해주실 정도는 아니었다.

GG_129에서는 아침저녁을 호스트님이 준비해주신 재료로 알아서 해 먹는 형태였는데 호스트님은 재료를 엄청 잘 챙겨주셨음에도 필요한 게 더 없는지 꼭꼭 확인하셨다. 이렇게 꼼꼼히 챙겨주셨는데도 저녁을 따로 챙겨주시는 경우가 많았다.


일하는 중간중간 간식도 엄청 잘 챙겨주셨다. 클라라의 떡, 연 핫도그 등등 남양주에서 맛있는 건 다 먹어보았다. 한 번은 내가 초코파이가 맛있다고 하니까 60개들이 초코파이를 사다 주셨다; 원 없이 먹었다. 정말 감사했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내가 한 '밥값' 이상인 것 같아서 불편했다.

호스트님으로부터 비롯된(?) 이 불편함은 결국은 호스트님 덕분에 넘어설 수 있었다.

호스트님은 나를 꼭 재성 씨라고 존칭으로 부르시고 우퍼로서 당연한 일을 할 뿐인데도 고맙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가끔 농장에 온 지인들한테 나를 소개할 때도 좋게 말씀을 해주셨다.


지낸 지 한 달이 넘어가면서 서로 많이 편해졌을 때, 호스트님은 가끔 무의식적으로 나를 "재성이"라고 칭하셨다가 "아이고 미안 재성 씨"라고 말을 고치셨다. 말씀 그냥 편하게 하셔도 전혀 상관없지만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은 참 좋은 느낌이었다.

호스트님의 이런 깊고 넓은 친절함은 처음에는 낯설고 불편했지만, 점점 편안하고 따뜻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불편하고 감사해하며 지내던 어느 평범한 날, 문득


 '그냥, 그냥 잘해주시는 걸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럭저럭 일을 열심히 하는 우퍼였다는 것만으론 호스트님의 친절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호스트님은 나보다 일 훨씬 못하는 외국인 우퍼한테도 참 친절하셨다.

사람을 쓸모의 관점으로 보는 내 세계관과는 달리 호스트님은 사람을 그냥 사람으로 본다는 생각, 그렇기에 호스트님의 친절함을 불편해할 것이 아니라 그냥 한 명의 사람으로서, 감사해하며 받아들이면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별한 사건이 벌어진 건 아니었지만 이런 생각이 떠오른 게 나로서는 굉장히 큰 일이었다. 이전에 '나는 이 세상에서 쓸모 있는 존재일까?'라는 질문을 곱씹을 때에, 이 의문이 한 명의 인간으로서의 나의 기본권을 완전히 무시하는 의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알면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쓸모라는 관점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이전에도 주변에 나를 생각해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고마웠지만, 미안하게도 큰 도움이 될 수는 없었다. 그 마음을 받기에는 내 마음이 너무도 꼬여있었다. 평범한 의사소통 속에서도 결국

 '나는 상대방에게 쓸모없는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나였지만, GG_105에서 우프를 하면서는 나도 모르게 마음이 열려재껴졌다. 나를 한 명의 인간으로서 존중해주면  불편해하고 무서워할 게 아니라 그냥 감사해하고 받아들이면 되겠다는 마음이 자연스레 생겨났다.

농장에서 일을 하는 내가 쓸모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을 때, 좀 편해지는 느낌이었다. 쓸모가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떠올렸을 때는, 자유로워진 느낌이었다. 한 꺼풀 벗어던진 느낌이었다.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자면 임금 없이 노동과 숙식만이 교환되는 우프라고 하는 특수한 상황이었다는 것 등을 고려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때에는 그냥 전에 없던 자유로움을 그냥 그대로 느끼고 싶었다. 그래서 이후로는 별생각 없이 그냥 호스트님께 감사하며 무난한 마음으로 지냈다.

참 감사했고, 이대로 더 지내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다른 농작물들도 궁금했고 다른 농부분 들도 궁금했다.

그리고 그때의 나는 '민물장어의 꿈'이라는 노래를 즐겨 들었었는데

'익숙해 가는 거친 잠자리도 또 다른 안식을 빚어
그 마저 두려울 뿐인데 부끄러운 게으름'

이라는 가사가 내 마음을 후볐다. 일과 시간은 참 충만히 보냈었지만 사실 쉬는 시간에는 계속 유튜브만 봤다. 공부를 하려 들다가 도 책상에 앉으면 일기만 썼다. 일기를 쓰는 건 나쁜 일은 아니지만 일기만 쓰는 건 좀 이상했다. 무언가 쇄신할 필요가 있다고 느껴졌다. 그래서 다른 농장으로 우프를 가기로 결정했다.

농장에는 나 말고 또 다른 외국인 우퍼가 있었는데 그 사람이랑 나랑 농장을 떠나는 날이 비슷했다. 호스트님이 환송회 겸 회식을 해주겠다고 하셨고 한정식집으로 가기로 했다.

예전의 나는 '쓸모도 없는 내가 요청을 할 자격이 있을까..?' 싶은 마음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내가 원하는 바를 잘 요청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때의 나는 많이 달라졌었고 또 짜장면이 먹고 싶었다. 그래서 호스트님께 중국집을 가면 안 되냐고 물었다. 호스트님은 외국 사람들 한국 문화 체험 겸하는 거라 항상 한정식집에서 해왔다고, 그냥 한정식집에서 하자고 하셨다.

원하던 바는 쟁취하지 못했지만 이렇게 담담히 물은 스스로가 참 만족스러웠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양 선생님이랑 다 같이 점심때 밖에 나가서 중국집에 갔다. 호스트님이 내가 중국집 가고 싶어 한 걸 신경 써 주신 것이었다. 중국집에 갔다가 북한강 경치가 보이는 이디야에 가서 밀크셰이크도 먹었다. 행복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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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개인적인 기록이기도 하지만, 누군가 우프에 관심을 갖고 해보려고 할 때 참고가 되길 바라는 마음도 있다. 나는 우프에 대해 찾아볼 때 후기가 하도 없어서 의심을 좀 많이 했었다.

GG_105는 정말 좋은 곳이었다. 내 첫 우프가 GG_105였던 건 나에게 큰 행운이었다.

하지만 사람에 따라서 불편함을 느낄 수 있는 부분도 있다. 나는 늦겨울에 지내서 잘 몰랐는데 봄, 여름 등 날이 풀리면 양계장 특유의 냄새가 좀 힘들 수도 있다. 냄새가 아니더라도 양계장에는 먼지가 많이 날리기도 한다. 물론 농장에서 마스크를 제공해주신다.
또 화장실과 샤워실이 멀리 떨어져 있다. 나는 늦겨울에 있을 때 샤워할 때 좀 불편했다. 화장실이 친환경 식이기도 하다.

혹시나 누군가가 이 글을 참고해서 갔다가 당황하게 될까 봐 이렇게 적어두지만, 이런 점들은 아무래도 상관없을 만큼 좋은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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