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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르쯔 Aug 26. 2023

인생에서 처음으로 누군가를 지웠다

 10년을 넘게 친동생처럼 여기던 사람이 있었다. 20대 초반, pc방에서 처음 지인의 동생이라며 만난 것을 기억한다. 이후 몇 번을 더 지인들과 함께 놀았고 그와 친밀해졌다. 그렇게 2~3년 정도 자주 보는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다 어느 날 자연스럽게 연락이 뜸해졌고 1년 이상 연락을 하지 않았다. 사람을 좋아하지만 찾는 법은 익숙하지 않았던 나는 따로 연락을 하지 않았다. 1년 하고 몇 개월이 더 지나갈 때쯤 우연히 그와 연락이 닿았다. 카페의 매니저로 일하고 있었고 그를 찾아갔다. 1년 만에 만났음에도 그와 어색하지 않은 분위기가 좋았다.

 

 그는 늘 쓸쓸함 혹은 외로움이 있는 사람이었다. 실제로 그가 살아온 삶도 그랬다. 당시 상담을 배우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나는, 내가 그의 공허함을 채울 수 있을 거라 자만했다. 스스로의 삶과 인생도 책임지는 방법을 모르던 내가 좁은 지식으로 그를 돕기 시작했다. 이제 와서 회상해 보면 그는 어떤 분야가 되었건 자신보다 강한 자에게는 순종하고 약한 자에게는 화를 곧 잘 내는 사람이었다. 다행히 당시의 나는 그에게 상담분야의 '강자'로 보였었나 보다. 그는 내 조언을 따라 스승님에게 상담을 받고 상담과 심리학에 관심이 많아졌다.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고 또래와도 이야기하지 않았던 자신의 삶과 꿈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함께 교회도 나가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어울렸다. 간혹 익숙하지 않은 관계 속에서 삐그덕 거리긴 했지만 그는 곧 잘해나갔다.

 

 그가 스승님에게 상담을 받을 때, 그와 스승님의 동의하에 상담시간에 함께 할 수 있었다. 나는 옆에서 처음 듣는 그의 과거, 상처, 분노, 그리고 눈물을 보았다. 그의 옆자리를 내가 채워줘야 한다는 이상한 책임감까지 생겨버렸다. 그와 정말 많은 경험을 공유했다. 대부분의 내 지인들과 친해지고 어울리며, 많은 것을 먹고 마시고 이야기했다. 


 스승님에게 '겸손해야  함'을 귀가 닳도록 들으면서 자연스럽게 그를 향한 나의 조언은 없어졌다. 우리는 어떤 조언이나 충고보다는 동정, 걱정, 공감, 그저 듣는 것을 통해 함께 했다. 내 인생을 뒤흔들 정도로 충격적인 사건이 있을 때도 나는 고민 없이 그에게 이야기했다. 나에게 그는 친동생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너무 역할이 많았던 건지도 모른다. 이전에 내가 썼던 글처럼 그가 해달라고 하지도 않았음에도 나는 그의 선생이자 형, 친구, 동료 등의 평생을 함께 하고 싶은 사람이고 싶어 했다.

 

 그가 다른 지역으로 가고 내 기준에서 그와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과 친해지면서 충동적인 모습들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이 시점에서 나의 겸손은 더더욱 그에게 말을 아끼도록 만들었다. 스승님의 말처럼 '그가 물어보는 순간'만 나는 이야기해 줄 뿐이었다.

 

 그와 나는 한때 카페를 하자는 같은 꿈을 꾸었다. 생각보다 더 꿈을 경험할 수 있는 순간이 다가왔고 그를 믿었기에 고민 없이 대전을 떠나 청주로 갔다. 청주에서 그가 대표로 있는 카페의 직원으로 들어가 일을 하면서 정말 많은 것을 경험했다. 나 스스로의 책임감과 꿈을 좀 더 구체화시킬 수 있는 카페일을 경험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그와 나는 마찰이 생기기 시작했다.

 

 나는 경계를 지키지 못한 사람이었다. 카페의 직원과 형이라는 관계의 어중간한 곳에 위치해  카페를 위한 조언들을 했다. 내가 아무리 좋은 의미로 포장한다 한들, 그에게 조언과 충고는 직원의 월권이었고 의도치 않게 그의 열등감을 자극했다. 우리는 처음으로 다투기 시작했다. 서로 소리를 지르거나 욕을 하지는 않았지만 마음과 표정으로 서로를 죽여갔다. 터놓고 이야기하는 순간에도 그의 모든 행동은 열등감과 연결되어 있었다.


  내가 하는 모든 말은 그에게 일종의 '공격'이었다. 혹자는 '그래서 함께 사업을 하면 안 되는 거다', '같이 일하면 싸우게 되어있다'라고 이야기했지만 이런 수준의 말로 그를 향한 내 마음과 10년의 추억과 경험은 가볍지 않았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나는 청주에서 대전으로 돌아왔다.


 누군가의 잘잘못을 따지자고 쓰는 글은 아니다. 그에게 고마운 부분도 많다. 서로를 잘라내는 과정에서도 다툼이 있었고 원망이 있었으며 끝에는 서로에 대한 나름의 배려가 있었다. 자연스럽게 사람들과 연결이 끊기는 경험은 많았지만 누군가를 의식적으로 내 마음에서 지워내기로 결심한 것은 서른세 살 인생에 처음이었다.


 오늘은 서론이 너무 길었다. 인생에서 처음으로 한 무거운 일에 대해서 이야기하려다 보니 길어졌다. 상담을 하다 보면 사람들을 놓지 못하는 순간을 자주 본다. 어떤 사람을 놓지 못하는 데에는 많은 이유가 있다. 아직 그 사람에 대한 분노가 해결되지 않아서, 그에 대한 집착을 놓지 못해서, 여전히 그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가 내 세상의 전부이기 때문에(그렇게 느껴지기에), 혼자가 된다는 두려움 혹은 외로움 때문에 사람들은 사람을 놓지 못한다. 전반적으로는 관계를 회복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맞다. 나에게 괴로움과 불편함을 준다고 매번 사람을 끊어낸다면 종국에는 혼자가 된다. 


 스승님의 가르침과 경험에서 배워온 확실한 사실이 있다.

 '내가 붙잡고 있는 그 사람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오지 못한다'는 것이다. 내가 붙잡아야만 하는 그 사람이 전부인 것 같아도 그를 놓아주는 순간 나에게 오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수 없이 많다. 내 두려움이 그들을 막고 있을 뿐이다. 내가 변했음에도 상대가 변하지 않는다면 과감하게 놓는 것도 필요하다. 당신이 상처받고 희생당하면서까지 그 사람을 옆에 둘 필요는 없다. 


 쉽게 사람을 놓으라는 말이 아니다. 충분히 고려하고 숙고하며 나 자신을 수없이 돌아봤음에도 그와의 관계에서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생각되면 놓으라는 말이다. 혹은 잠시 떨어져 있어야 하는 시간이 필요할 수도 있다. 나는 수없이 그에게 내 마음에 대해서 표현했다. 표출하지 않았다. 윽박지르지 않았으며 차분하게 내 마음과 생각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에게는 그런 시기였을 뿐인 거다. 누가 맞고 틀린 것이 아니다. 이렇게 충분히 당신이 관계에 에너지를 후회 없이 쏟고 나서 그 사람을 놓아준다면 당신을 사랑해 줄 수 있는 사랑하고 있었던 사람들이 보이거나  온다.


 인생에서 누군가를 지우는 일에 대해서 두려워하지 말아라. 그 과정은 손이 덜덜 떨리고 무섭겠지만 한 걸음만 용기를 내고 실천하면 새로운 만남은 필연적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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