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에서 청주로 이사를 오게 되면서 미용실을 새로 알아보게 되었다. 완성된 헤어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따지기 쉽지 않은 남자들에게, 새로운 미용실을 고른다는 건 굉장히 신중한 일이다. 차량으로 30분 이상 걸려도 마음에 드는 미용실만 찾을 수 있다면 얼마든지 간다는 마인드로 청주의 미용실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수십 곳을 찾아 헤매다 마음에 드는 미용실을 찾았다. 남성 혼자 운영하시는 1인 미용실이며 20년 이상의 경력에 자신의 대표 사진은 누가 봐도 대충 셀카로 찍은 사진을 등록해 놓으신 것을 보니 확신이 들었다.
'이 사람은 진짜다.'
그렇게 지금의 미용실 선생님과 알게 된 지 다섯 달이 지났다. 처음에 미용실에 가서 두 가지에 놀랐다. 생각보다 더 고급스럽고 깔끔한 분위기에 일차, 대표사진(분명히 셀카)과 다르게 어깨까지 오는 테리우스 머리를 하고 계셔서 이차로 놀랐다. 선생님은 과묵하신 편이었다. 아니다 다시 생각해 보니 과묵하다기보다는 신중하다는 편이 맞는 것 같다.
처음에는 별로 대화를 즐기시지 않는 분이라고 생각했는데 몇 번 가다 보니 짧게 툭툭 던지시지만 끊임없이 이야기하시는 걸 보고 말을 신중하게 하려고 노력하시는구나 싶었다. 본인이 좋아하시는 주제가 나와도 얼굴은 웃고 있지만 목소리의 빠르기와 톤은 거의 변화가 없는 분이었다. 처음에는 그런 점이 차가워 보이기도 했는데 나중에는 그 일관성이 편안하고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늘 짧게 대화를 나누다가 어느 날 상담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처음으로 선생님이 자신의 이야기를 길게 풀어놓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아버지에 대한 분노였는데, 나 역시 처음 스승님께 받았던 심리상담의 주제가 '나도 몰랐던 아버지에 대한 분노'였기 때문에 공감할 수 있었다. 서로 신나게 얘기하다 보니 누가 더 아버지에게 어린 시절 고통받았었는지 자랑하는 자리가 되어버렸고 웃기게도 우리는 서로의 아버지가 가족에게 행했던 '만행'에 대해 대단하다고 감탄하며 칭찬했다. 그러던 와중 선생님이 한 마디를 하셨다.
"저희 아버지도 너무했다고 생각했는데 고객님 아버님은 더 심했네요"
참 그렇다. 고통이라는 건 육체적이든 심리적이든 상대적이다. 누군가에게는 나의 어린 시절 괴로움이 자신의 경험과 비교했을 때 행복했을 수 있고 선생님에게는 더 심한 고통이었을 수도 있다. 수치로 따진다면 누구에게나 100중 70을 넘는 고통 하나쯤은 분명히 있다.
이 대화의 끝에서 선생님과 나의 차이점은 단 하나였다.
'아버지를 용서할 수 있었는가'
나는 운이 좋게도 심리상담을 받고 이 분야를 연구하면서 스스로를 변화시키고 아버지를 진심으로 용서할 수 있었다. '그랬었지' 정도의 수준이 아닌, 아버지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 문화, 그의 삶, 열등감, 표현하지 못했던 것들, 어린 나는 이해하지 못했던 당시 우리 가족의 상황 등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이해하고 그로 인해 경험한 나의 고통에 대해서 새로운 해석과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내 마음속에 있는 아버지에 대한 분노를 털어버릴 수 있었다.
선생님은 여전히 아버지를 용서할 수 없다고 하셨다.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가슴으로는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선생님에게 용서를 강요할 수는 없다. 그의 방식이 틀린 것도 아니다. 다만 우리는 선택할 수 있다. 마주하는 혹은 마주했던 고통스러운 경험들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정말 어렵겠지만 내가 봐왔던 사람들은 고통과 마주하기로 결심하는 순간 휘둘리지 않게 되었다.
고통과 마주한다는 것은 다리가 후들 후들 떨릴 정도로 두렵고 무섭지만, 상자 속에 깊숙이 넣어두었던 경험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표현하면서 다시 경험하는 것이다. 다시는 옛날처럼 고통스러운 경험에서 도망치기 위해 고통을 떠올리게 만드는 사람, 상황, 단어로부터 도망가거나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야기하고 그 경험으로 인해 느꼈던 수많은 상황, 정서들을 안전함 속에서 절절하게, 충분히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새로운 해석과 의미들을 발견하면 통찰을 경험하게 되고 나를 당장이라도 깨물듯이 으르렁거리던 고통은 순해진다.
맞다. 당신은 그 고통스러운 경험에 대한 피해자다. 당신은 죄가 없다. 억울해하는 게 맞다. 그저 우연히 일어난 사고였을 뿐이다. 하지만 삶의 사건들은 늘 예상치 못하게 온다. 그 어떤 대비를 하더라도 절망하고 무너지게 만드는 순간과 사건들이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절망 속에서도 새로운 의미를 찾아 기어올라가는 것이다. 그렇게 몇 번 올라오다 보면 또 구덩이에 빠질지언정 이전보다는 더 쉽게, 빠르게 올라올 수 있다. 그렇게 외부 자극에 대한 자아강도를 올리는 것이 마음의 근육을 키우는 방법이다.
고통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지만 정말로. 정말로 새로운 의미들을 찾을 수 있다. 나 역시 여기에 쓸 수 없을 정도로 그 누가 듣더라도 심각한 사건과 트라우마를 경험했다. 예측할 수도, 겪어보지도 못했던 그 절망 속에서 충분히 표현하고 보물을 찾듯 새로운 의미들을 발견했을 때 이겨내고 탈출할 수 있었다.
누구에게나 사연 하나쯤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