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헤르쯔 Jan 26. 2021

아버지를 용서하고 소설을 썼다

 내가 처음 상담을 경험한 건 대학교 4학년 때였다. 스승님을 찾아가 상담을 배우기로 결심하고 '무릇 상담자라면 가장 먼저 상담을 받아야 한다'는 말을 따라 스승님에게 상담을 받기 시작했다.


 사실 처음에는 좀 막막했다. 나는 우울증이 심하다던지 인간관계에 어려움을 느낀다던지와 같은 호소문제가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아무 문제없는걸?

라고 생각했다.


비의식에서 나를 건져 올린다


 스승님은 평균적인 상담사들보다 놀라울 정도로 모든 이론과 방법에 깊이가 있는 분이셨다. 나를 상담하실 때는 주로 정신분석을 많이 사용하셨는데, 막연한 나에게 처음 과제를 주셨던 것이 '내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부터 현재까지 떠오르는 모든 사건, 기억 등을 적어 오는 것'이었다.


 이 과업은 상담을 시작하면서 나도 애용하고 있는 과업이다. 프로이트가 이야기한 '자유 연상' 기법을 응용한 방식인데, 보통 전통적인 방법으로는 쇼파나 카우치에 누워 눈을 감고 기준 없이 떠오르는 것들을 이야기한다.

그렇게 비의식 속에 가라앉아 있던 것들을 하나씩 잡고 내려가다 보면 핵심적인 사건, 단어, 인물 등을 발견하게 된다.


 내 경우는 이 과정에서 발견할 수 있었던 건 어느 순간 내가 '~하는 척'으로 인생이 도배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물론 이런 척들이 도움이 되는 것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억지로 옷을 입고 있느라 나도 모르게 정신적인 에너지를 쓰고 있었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여전히 이런저런 나에 대한 탐색 수준일 뿐이었다.


 핵심은  '나를 부끄럽거나 수치스럽게 만드는 것들'에 대한 목록을 작성할 때 발견되었다. 14가지 정도를 작성했었는데, 충격적인 사실은 13가지 정도가 모두 아버지와 연결되어 있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아버지에 대한 원망, 수치심, 비난, 분노들은 마음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상담을 진행하면서 왜 아버지에 대한 부정적인 마음들이 자리 잡았는지 탐색하고 이해하며, 과거가 아닌 현재로 사건들을 가져와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보면서 아버지를 용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소설을 썼다


학부 시절, 소설 창작 시간에 교수님이 이런 말을 하셨다.


 '소설가들은 사람에 대한 연구와 이해가 필요하다. 그래서 소설가들도 심리학을 해야 한다.'


'작가는 소설 속에서 공개되지 않더라도 인물들의 습관, 취미 등의 세세한 요소들을 알고 있어야 한다.'


 나는 이 두 문장이 잊혀지지 않는다. 특히 소설에서 드러나지 않더라도 인물의 숨겨진 습관, 점 위치, 지병 등을 설정하고 알고 있어야 살아있는 인물을 창조할 수 있다는 말은, 그저 그런 가상의 인물을 만들어 소설을 쓰던 나에게 큰 변화를 주었다. 이후 상담을 받고 아버지에 대한 용서와 아버지라는 인물을 다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던 대학교 4학년 시절, 아버지에 대한 소설을 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를 용서하고 소설을 썼다.


필사


 아버지가 실종된지 사흘이 지났다. 실제로 아버지가 집을 떠난지는 일주일 정도 됐을까. 아버지란 존재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는 가족들 중 지민이만이 아버지의 부재를 알아차렸다. 갓 대학생이 된 지민이의 유흥비는 어머니에게서 받은 용돈만으로는 부족했다. 어릴 때부터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이십년을 고생 없이 자란 지민이에게 아르바이트라는 수단보다는 아버지에게 또 다른 용돈을 받는 것이 편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지민이는 종종걸음으로 온 집안을 뒤져봤지만 늘 원고지 앞에서 씨름을 하던 아버지는 보이지 않았고 우리 가족은 용돈을 받기 위해 아버지를 찾던 지민이의 분주함 덕분에 아버지가 사라졌다는 걸 알았다.


 회사 회의실에서 나와 지민이의 문자를 확인했을 때까지만 해도 늘 소설을 쓰기 위한 원고지와 눈싸움을 하던 아버지가 오랜만에 외출했던 것이라 생각했다. 아버지는 늘 그런 사람이었다. 가족과 상의하는 법을 잘 몰랐고 가족 행사가 아니라면 함께 행동하는 법을 잘 모르는 사람이었다. 어느 때부터였는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아버지는 한 가정의 기둥이 아니라 그림자처럼 살아왔다. 집안의 모든 통제권은 어머니가 쥐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나와 지민이는 사소한 일부터 대학 전공을 선택하는 문제까지 어머니를 통해서 해결했다. 단 한번도 왜 어머니하고만 상의해야 하는가라는 의문을 던져 본 적은 없었다. 여느 딸들이 하는 “아빠는 엄마를 처음 봤을 때 어땠어?”라는 질문에도 “으응 이뻤지”라는 대답 한마디가 끝이었다. 아버지는 그렇게 조용하고 스며들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내가 막 중학교에 들어갔을 때 기술-가정 선생님께서 부끄러운 과제를 하나 내주셨었다. 부모님의 연애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간략하게 요약하는 과제였는데 그때도 아버지는 담담하게 연애사를 늘어놓았다.


 아버지는 서른살에 화려한 주목을 받으며 소설가로 등단했다. 당시 어머니는 제법 잘 나가는 사업가 집안의 장녀였는데, 우연히 서점에서 아버지의 소설을 보고 아버지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른바 ‘있는 집 딸’ 이다 보니 몇 다리 건너 인맥을 동원해 자연스럽게 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고 몇 번의 만남과 2년의 연애 끝에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을 올리던 그해 봄. 아버지는 서른둘 어머니는 스물여섯의 나이였다.


 아버지의 등단 작품 ‘봄의 정원’에 등장하는 부부처럼 아름답고 여유 있는 부부를 어머니는 꿈꿨지만 둘째 지민이가 태어날 때쯤, 외할아버지의 사업이 완전히 무너지면서 어머니의 꿈도 함께 무너져 내렸다. 사실상 어머니 집안의 지원을 받아가며 작품을 써내던 아버지는 돈을 벌어야 하는 상황에 놓일 수밖에 없었다. 등단은 화려했지만 그 이후 특별한 작품이 없었던 아버지에게 문학으로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없었다. 어머니는 그녀만의 충격에서 벗어나는 수단이었는지 취미로 수집하던 고급 식기들을 가족을 위해 팔기는커녕 더 악착같이 모으기 시작했다. 후에 아버지는 평범한 출판사에 취직했지만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어머니는 마치 집안이 무너져 내린 것이 아버지의 탓인 양 모든 가정의 선택권을 통제했고 그때에도 아버지는 작은 저항조차 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그런 일상을 십몇년간 반복했다. 퇴근 후 기계처럼 책상 앞에 앉아 펜을 들었다. 그 누구도 탓하지 않고 마치 성자라도 되는 것처럼 묵묵히 원고지에 글을 써 내려갔다. 간혹 몇 개의 작품을 완성시켜 출간을 하기도 했지만 반응은 좋지 않았고 등단만 화려했던 소설가라는 수식만이 아버지를 따라다녔다.


 이런 아버지가 일주일 전 아무 말도 없이 집을 떠난 것이다. 솔직히 한순간 이제까지 쌓여있던 가족에 대한 아버지의 작은 저항이라고 생각했다. 그래. 기계처럼 살아오던 아버지가 드디어 저항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왜 이제 와서?” 라는 질문이 꼬리를 물었다.


 어머니는 바로 경찰서에 실종 신고를 했고 나는 퇴근 후 방 한구석 아버지 대신 덩그러니 남아있는 스마트폰을 뒤적였다. 스마트폰은 아버지를 닮아 있었다. 스마트폰의 배경에는 내가 몇 년 전 설정했던 ‘봄의 정원’ 표지가 여전히 자리 잡고 있었다. 특별한 문자도 없었다. 정기적으로 출판사에서 오는 문자와 문학 관련 모임 공지사항 정도의 내용이 전부였다. 원고지 앞에만 자리 잡고 있던 아버지는 어디로 간 걸까. 스마트폰을 내려놓으려다 나도 모르게 “아”하는 감탄사를 뱉으며 통화기록을 하나하나 확인했다. 혹시나 싶었는데 문자들과 별반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하던 찰나 ‘문익수’라는 낯익은 이름을 발견했다. 아버지의 오랜 친구였는데 몇 년 전 다니던 회사를 관두고 펜션을 운영한다는 얘기를 들었던 기억이 났다. 마지막 통화기록이 친구라면 아버지가 간 곳은 그분의 펜션일 확률이 높았다. 아버지는 왜 떠나야만 했던 걸까.


 다음 날 펜션으로 향하는 운전대를 잡았다. 나 역시 어릴 때는 자각하지 못했지만 우리 가족을 일반적인 시선으로 볼 때 정상적인 느낌의 가족이 아니라는 사실은 입사할 때쯤에 깨달았다. 생각해보면 나는 그 흔한 부부싸움 한번을 보지 못했다. 외가의 사업이 무너진 후 아버지는  묵묵히 가정을 위해 충실하게 사셨다. 어머니가 여전히 고급 식기와 비싼 옷들을 사 나르는 동안 집에서는 늘 정해진 옷을 입으셨고 출근할 때도 정장 두어벌이 전부였다. 우스운 얘기지만 28년의 세월 동안 아버지가 왜 그렇게 조용히 살았는지 지나치는 말로도 물어보지 못했다. 어린 나에게 그는 문학이 전부인 사람처럼 보였고 실제로도 소설을 창작하는 일 외에는 뚜렷하게 하는 일이 없었다. 어머니에게 치장을 위한 것들이 삶을 충족시키는 것이었다면 아버지에게는 고집스럽게 써 내려간 원고지들이 전부였다.


 대전에서 펜션이 있는 무주까지 한 시간 채 걸리지 않았다. 풍경에서 도시들의 모습이 점점 사라지고 산들로 둘러싸일 때 쯤 아버지가 있으리라 생각되는 펜션에 도착했다. 펜션은 그리 크지 않았다. 한적한 곳에 자리 잡은 펜션은 프랑스풍으로 건축되어있었고 지은 지 몇 년 안 된 건물들은 말끔한 모습이었다. 이른 봄이라 제법 쌀쌀했지만 펜션의 마당은 여기저기 초록으로 뒤덮이고 있었다. 자동차 엔진 소리를 들었는지 펜션 입구에서 아버지 또래로 보이는 남자가 슬며시 문을 열고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예약하고 오셨습니까?”


 그가 입고 있는 황토색 개량 한복이 희끗한 흰머리와 잘 어울렸다. 막연히 아버지와는 절친한 사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직접 만나보니 풍기는 분위기가 아버지와 제법 비슷했다. 다만 늘 무표정한 아버지와 달리 자연스러운 미소를 짓는 사람이었다.


“저.. 아버지를 찾으러 왔습니다.”     

      

 큰 기대를 하고 온 것이 아니었는데 운이 좋았다. 친구분 이야기를 들어보니 아버지는 집을 떠나 이틀 정도 됐을 때 펜션에 오신 것 같았다. 아버지는 방을 하나만 내어달라고 하시고 들어가시더니 4일째 얼굴 한번 보지 못했다고 했다.


“원래 특이한 친구였지만 이런 적은 또 처음이라..”


 사람이란게 그렇다. 28년을 한 지붕 아래에서 살아온 가족도 아버지의 때늦은 반항을 이해하지 못하는데 친구라고 쉽게 알 수 있을까. 나는 집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상황, 아무런 말 없이 집을 떠나셔서 경찰에 실종 신고한 이야기를 친구분에게 설명하고 마스터키를 받았다.


 아버지가 있는 방으로 가는 3층 복도는 조용했다. 나도 모르게 숨어든 도둑처럼 조용히 발을 땠다. 방문 앞에 섰을 때 묘한 괴리감이 들었다. 문 하나만 지나면 이어질 수 있는 곳이지만 아버지가 있는 방이 마치 SF영화에서 나오곤 하는 다른 공간처럼 느껴졌다.


 조심스레 마스터키를 꺼내 문을 열었다. 

    

 방은 원룸 형태였는데 문을 열자 정면의 커다란 창문 두개가 있고 책상이 하나 있었다. 그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 끝에 아버지는 책상에 앉아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주무시고 계신 것 같아 차마 소리 내어 부르지 못하고 아버지께 다가갔다. 아버지의 얇은 두 팔 사이로 삐져나온 원고지가 보였다.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가족에게 반항 한번 하지 않던 아버지가 기껏 말도 없이 집을 나와 하고 있는 것이 결국 집에서 수십 년을 반복하던 일이라니. 어쩌면 나는 차라리 아버지가 도박이나 다른 여자와 눈이 맞아 도피했다거나 하는 일들을 기대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아버지께 일탈을 바라고 있었다.


 연극의 조명처럼 아버지를 비추는 햇살과 은은하게 떠다니는 먼지들. 책상에서 졸고 있는 아버지의 뒷모습은 한 폭의 풍경화처럼 느껴졌다. 너무 평화로운 모습에 긴장이 풀려 버렸다. 특이하게도 아버지는 펜을 쥔 채로 엎드려 졸고 있었는데, 나에겐 그 모습이 삶을 향한 집념으로 다가왔다. 무방비 상태가 될 수 있는 졸음 앞에서도 끝까지 펜을 놓지 않는 그의 모습은 한편으로 안쓰럽기까지 했다. 무엇이 그에게 펜을 강요하는 것인지 궁금했다. 아버지의 수많은 원고지 중 마지막으로 펜촉이 향해있는 곳엔 “그렇게 겨울이 끝났다.” 라는 문장이 굳어 있었다. 또 소설이구나. 나는 마치 죽은 사람처럼 졸고 있는 아버지를 흔들었다.     



  

 몇 시간 뒤 펜션에 경찰들이 모여들었다. 형사로 보이는 사람들이 몇몇 보이고 어떻게 알았는지 기자들이 몇 명 찾아왔다. 아버지의 친구는 넋이 나간 표정으로 현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순식간에 아버지의 사체는 병원으로 옮겨졌고 형사들은 타살인지 자살인지에 대한 여부를 가리기 바빴다. 졸고 있는 아버지를 깨우는 그 순간 이미 아버지는 숨을 거둔 뒤였다. 아버지는 줄곧 방에 혼자 계셨고 타살은 불가능 하거니와 타살당할 만한 이유를 만들 수도 없는 분이었다. 그렇다고 자살이라고 하기에는 그 어떠한 외상도 존재하지 않았다. 죽은 아버지의 곁에는 오직 원고지들만이 흩어져 있었다.

     

 몇 달 뒤 사건 현장에 왔던 기자들 때문인지 아버지의 사망 소식이 문학계에서 화두가 되었다. 문학계를 넘어서 SNS로 아버지의 소식은 일파만파 뻗어 나갔고 몇몇 네티즌이 만들어낸 그럴듯한 이야기와 해석으로 아버지의 작품들이 재조명을 받기 시작했다. 특히 아버지가 죽는 순간까지 펜을 잡고 있었던 사실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화려하게 등단했지만 이후 아무런 주목도 받지 못했던 비운의 소설가는 죽는 순간까지 마지막 작품을 완성 시키고 펜을 잡은 채로 세상을 떠났다. 잊혀졌던 그의 작품들은 죽고 나서야 서점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세간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우리 가족들에게로 향했다. 여기저기서 인터뷰 요청들이 들어왔다. 우리 가족은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그 누구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한 인터뷰 기사에서는 “아버지의 죽음 이후 재조명받는 작품들 때문에 가족들이 눈물 흘릴 시간조차 없다.”라고 표현한 것을 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우리 가족에게 아버지란 존재는 결국 이웃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죽음에 대해 동정을 할 수 있지만 그 누구도 진심으로 슬퍼하지 못했다. “슬퍼하지 않았다”라는 표현보다는 “슬퍼하지 못했다”라는 표현이 정확한 것 같다. 한평생 자신을 희생하고 가족만을 위해 묵묵히 살아온 그였지만 그의 행위는 결국 가족들을 사랑했기 때문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나는 아직도 실제로 아버지가 우리를 사랑해서 그랬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는 문학인이자 한 명의 소설가로서 모든 것을 견뎌냈다. 조용한 불꽃같은 집념에 타오르고 있던 그는 비명 한마디 내지르지 않았던 거다. 결국. 조용하게 타오르던 화마는 아버지의 안쪽 깊숙한 곳까지 태우고 마지막 작품의 마침표를 찍고 생을 마감할 수 있었던게 아니었을까. 우리는 이미 봄을 맞이하고 있었음에도 아버지는 홀로 겨울을 걷고 있었다. 그의 마지막 작품의 문장처럼 겨울이 끝났을 때 그는 필사(必死)한 것이었다.






이전 08화 사건은 잊혀져도 감정은 잊혀지지 않는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