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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속노화를 위해, 필사적으로 기계와 친해질 것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엔 사람대신 키오스크가 있다

by 윤슬

쿠알라룸푸르 두달살이의 마지막 지역, 체라스에서의 시간은 평온했다. 가끔 호수 공원을 산책하고, 이틀에 한 번꼴로 수영과 헬스를 했으며, 하루에 한두 번 숙소 앞 먹자골목을 여유롭게 탐방했다.

체라스 주변에 유명한 관광지가 없어 오히려 좋았다. ‘이까지 왔는데’, ‘여기까지 온 김에’, ‘이건 꼭 봐야 해’ 같은 의무감 없이, 그저 그곳의 오랜 주민처럼 잔잔하게 시간을 보냈다.


어느덧 출국일이 다가왔다.

KLIA(Kuala Lumpur International Airport) 터미널 2의 3층에 도착했다. 입구부터 레스토랑과 커피숍, 기념품 가게들이 늘어서 있어, 공항이라기보다는 대형 쇼핑몰에 들어선 느낌이었다. 전광판에서 인천행 항공기의 체크인 카운터를 확인하니 ‘U-V’로 표시되어 있었다. 그런데 인천행뿐 아니라, 앞뒤의 다른 항공편 7~8곳이 모두 같은 구역으로 지정되어 있었다. 시작부터 뭔가 낯설었다.


V 카운터로 이동하여, 입구의 안내요원에게 온라인 체크인을 이미 마쳤고 여기서 줄을 서면 되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않고, 키오스크로 가서 탑승권을 출력하라고 매우 빠르고 성의 없이 대답했다.

“네? 키오스크요? 그럼... 수하물은요?”

다시 한번 키오스크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는 고개를 돌려버린다. 많이 바쁜가 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쿠알라룸푸르 공항 시스템을 좀 더 찾아보고 올 걸. 공항엔 기존의 방식처럼 직원이 있는 체크인 카운터가 매우 적었고(그만큼 줄은 무지하게 길었고), 그 자리를 여러 대의 키오스크가 대신하고 있었다. 처음 보는 기계라 당황스러웠지만, ‘우린 IT 강국에서 온 코리안이다.’ 정신무장을 하고, 앞선 사람들을 빠르게 곁눈질하기 시작했다.

KLIA 셀프체크인 키오스크, 안내직원이 있었음 좋았을텐데

키오스크에서 예약한 항공권 정보와 개인 정보를 입력하니 보딩패스와 수하물 태그 스티커가 차례로 출력되었다.
'오! 별것 아니었네.’
해보면 아무것도 아닌데, 처음이 어려운 법이다. 얇은 영수증 같은 종이에 인쇄된 탑승권을 조심스럽게 받아 들고, 스티커는 캐리어 손잡이에 감아 붙였다.

'그런데... 짐은 어디서 보내지?'

역시, 안내해 주는 이는 없었다. 눈치껏 사람들의 동선을 살펴, V카운터에서 ‘Baggage Drop’이라고 적힌 구역을 찾았다.

사람이 있던 곳에 이젠 빈 의자와 기계만 있다

짐을 부치는 절차는 이러하다.

1. 키오스크에서 받은 탑승권의 바코드를 스캔한다.

2. 캐리어를 올려 무게를 잰다.

3. 캐리어에 부착한 수하물 스티커의 바코드를 인식시키면,

4. 컨베이어 벨트가 움직이며 가방이 굴러간다.


그런데 인천행 뿐 아니라 다른 목적지 분들도 이곳에서 짐을 부치던데, 수하물이 목적지별로 구분되는 거겠지? 멀어져 가는 우리의 가방을 보면서 이렇게 하면 다 된 건지, 제대로 한 게 맞는지 100% 확신이 없어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가방아, 우리 서울에서 만나자, 꼭 만나기야.'

가방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눈으로 좇으며 불안한 마음을 토닥였다.


공항의 키오스크 앞에서 어리바리한 건 우리뿐만이 아니었다. 20~30대 청년들도 허둥거리는 것은 마찬가지였고, 일행끼리 토의(?)를 하며 천천히 화면을 눌렀다. 하물며 연세 있으신 분들은 어떠했겠는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키오스크 앞에 서 있다가, 그들을 도와줄 직원을 찾지 못하자 결국 다른 승객들에게 물었다. 그들도 잘 모르는 것 같아 보였지만 “I guess...”하며 최대한 도와주려 애썼다.


'Future Airport'라고 쓰인 공항 홍보 포스터를 원망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미래지향적인 것도 좋지만 사람에 대한 배려가 부족해 보였다.


6시간 반의 비행 후, 3개월 만에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기내에서 심히 불편했던 꼬리뼈와 허리도, 걱정했던 우리의 짐도 무사히 입국하였다. 처음 해보는 셀프 체크인 시스템이었지만, 모든 게 잘 마무리되어 다행이었다.


40대인 우리 부부는 비교적 어릴 때부터 인터넷을 접했던 세대라, 낯선 기계 앞에서도 그럭저럭 익숙하게 대처할 수 있다. 하지만 연세가 있는 분들은 어떨까? 영어가 익숙하지 않고 기계와 친하지 않다면, 그들이 자유여행을 하기는 점점 더 어려워질 것이다. 결국 패키지여행이나 자식들과 함께하는 효도관광 외에는 선택지가 없을 테다.


어디 여행뿐인가? 요즘 식당들도 대부분 키오스크나 QR코드로 주문을 받는다. 기계를 다루기 힘든 어르신들은 원하는 식당에서 밥 한 끼 사 먹기도 어려워지고 있다. 다행히 친정아버지는 스마트폰도 잘 쓰고, 인터넷도 능숙하신데, 인터넷을 다룰 줄 모르는 시부모님이 걱정스러웠다.

우리 시부모님은 여전히 현금만 쓰시고, 우리나라에서 2G 폰을 가장 늦게까지 사용한 것으로 추측되며, 생각과 생활이 아날로그 시대에 머물러 계신다. 그래서 인터넷 뱅킹을 할 때나 스마트폰으로 국가 지원금 등을 신청할 때면 1시간 반 거리에 사는 아들을 부르곤 하셨다.


그런 모습을 보며, 지금 세상에서 ‘어른’을 ‘노인’으로 만드는 건 노안이나 굽은 등이 아니라, 기술의 변화를 얼마나 받아들이느냐에 달렸다는 생각을 하였다.

마음은 여전히 자립적이고 몸은 건강하나, 기계를 사용하지 못하는 이유로 '의존적인 늙은이'로 만들어 버리는 세상이 야속하진 않으시려나.


쿠알라룸푸르 공항 키오스크 앞에서 당황하던 60대 후반 부부의 모습에서 우리네 70대 부모님이 떠올라 마음 한편이 묵직했던 귀국길이었다.


미래를 향해 빠르게 나아가는 세상에서, 누군가는 원래의 자리에 홀로 남겨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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