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의 시드니
호주 한달살이를 준비하면서 이곳의 입국 심사가 까다롭다는 이야기를 여러 번 들었다. 음식물은 물론이고 목재 제품, 흙이 묻은 신발, 약 등을 입국 시 신고해야 한다고 했다. 난 매일 복용해야 하는 약이 있어, 혹시 처방약이 문제가 되면 어쩌나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우리가 지닌 상비약 목록을 영어로 작성하고, 처방약은 병원 홈페이지에서 영문 처방전을 발급받았다. 할 수 있는 만큼 미리 준비했으니 부딪혀 보잔 마음으로 시드니 공항의 입국 심사 줄에 섰다.
심사는 예상보다 순조로웠다. 심사관은 약에 관해선 묻지도, 보지도 않았다. 다만 그의 관심을 끈 게 있었으니, 바로 참깨였다.
"이게 뭐죠? 씨앗인가요?"
그의 질문에 순간, 참깨가 열매인지 씨앗인지 헷갈렸다. 내가 우물쭈물거리자 그는 말없이 참깨를 쓰레기통에 쏟아버렸다.
* AI가 답하길, 참깨는 식물의 열매로 분류된다고 합니다. 참깨과 식물의 열매에서 맺히는 씨앗(참깨 씨)이라네요.
뭔가 하나가 걸려야만 했다면 참깨가 버려진 게 오히려 다행이라 생각하였다. 호주에서의 한 달간 음식에 깨를 뿌리지 않으면 그만이다. 옆 라인의 어떤 이는 수하물까지 전부 열고 탈탈 털리듯 검사를 받고 있었기에, 불평할 여지가 없었다. 심사관이 누구냐에 따라 심사의 난이도가 다른 모양이다. 참깨만큼의 무게를 덜은 짐을 메고 공항을 빠져나왔다.
아침에 도착하는 비행기를 탈 땐 반드시 확인해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숙소가 얼리 체크인이 가능한가' 하는 점이다. 그것을 놓친 우리 부부는 숙소 체크인 시간이 될 때까지 좀비처럼 거리를 돌아다녔다. 비행기 안에서 잠을 못 자 자꾸만 내려오는 눈꺼풀을 필사적으로 끌어올리며 다리를 끌다시피 떠돌았다.
시드니에 도착한 날, 난 여름 남방에 조끼를 겹쳐 입고 간절기 재킷을 입고 있었다. 아침 기온에는 딱 맞는 옷차림이었지만 한 시간이 지나며 재킷을 벗고, 다시 한 시간이 지나자 조끼까지 벗어야 했다. 10월의 시드니는 생각보다 훨씬 더웠다. 피곤과 더위에 지쳐 '그 좋은 가을의 한국을 두고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건가.' 자괴감이 들 때가 되어서야 체크인을 할 수 있었다. 찬물 샤워 후 기절하듯 잠이 들며 호주에서의 첫날이 지나갔다.
다음 날은 밤에 내린 비 때문인지 전 날보다 기온이 10도 이상 떨어졌다. 외출 준비를 하며 긴팔 티를 잡았다가, 전 날 더워 고생했던 일이 생각 나 반팔 니트에 간절기 야상재킷을 걸쳤다. (긴팔을 선택하지 않은 것을 나중에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마침 토요일이라, 주말에만 열린다는 록스 마켓으로 향했다. 마켓이 끝나는 지점에는 하버브리지 아래 시드니 오페라하우스를 감상할 수 있는 뷰 포인트가 있었다. '잔디밭에 앉아 하얀 오페라하우스 실물을 감상하며 마켓에서 산 주전부리를 먹어야지.' 마음속으로 야무지게 계획을 짰건만 이 날도 날씨가 말썽이었다. 어젠 더워서, 오늘은 추워서. 안 그래도 날이 쌀쌀한데 바닷바람까지 더해지니 추워 견딜 수가 없었다. 재킷 깃까지 세우고 버티다 10분을 못 채우고 결국 숙소로 돌아왔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시드니(지금 머물고 있는 브리즈번도 마찬가지)는 일교차뿐 아니라 하루 사이의 기온 변화가 심한 곳이다. 그러니 곧 호주 여행 계획이 있으시다면, 반팔을 기본을 하되 간절기 카디건이나 바람막이 점퍼 등을 챙겨 오실 것을 권한다.
도착 후 이틀은 날씨 때문에 고생했지만, 지금은 일기예보를 꼼꼼히 확인하며 적응 중이다. 더운 날엔 낮 외출을 삼가고, 추운 날엔 단단히 껴입으며 호주의 변덕스러운 날씨에 적응 중이다.
호주에 와서 생전 처음 보는 동식물들을 자주 마주한다. 그중 가장 눈에 띈 것은 보라색 꽃나무였다. 이 나무의 이름은 자카란다로, 남미 고산지대가 원산지이며 호주에서는 봄을 알리는 대표 꽃나무라 한다. 꿈속에서나 볼 듯한 보라색 꽃을 가득 매단 나무가 길에 서 있다니! 신비롭다.
숙소 마당에선 노란 벼슬을 가진 커다란 흰 앵무새가 아무렇지 않게 모이를 쫀다('유황앵무'로, 호주의 상직적인 새다). 왜가리처럼 생긴 새가 도심 광장을 거닐고, 사람 웃음소리와 비슷한 소리를 내는 새도 있다(이 새의 이름은 '쿠카부라'라고 한다). 동네 산책 중 황홀한 라일락 향기에 홀려 향이 나는 곳을 찾아가 보니, 본 적 없는 거대한 사이즈의 라일락 나무가 어느 집 정원 한편에 서 있었다.
또한 놀라웠던 게, 달의 모양이다. 내가 알던 초승달은 오른쪽에 손톱 모양으로 생긴 달을 뜻했는데, 호주에 와서 본 초승달은 아래쪽에서 접시처럼 생기기 시작했다.
호주에 와서 태어나 처음 보는 것들을 만날 때마다 우리 부부는 "저것 좀 봐!" 소리를 지르고, 다른 한 사람은 "우~~~ 와-!" 탄성을 지르며 과장 섞인 반응을 한다. 나이를 먹을수록 재밌는 것이 덜해졌다 느꼈던 게 나이 탓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만큼 익숙해서 그랬던 거였다. 호주에 오니, 생소한 것이 많아 어릴 적처럼 모든 게 신기하고, 재미있고, 호기심이 살아난다.
호주에서의 한 달은 대자연 속에서 즐기는, 동심으로 돌아가는 시간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