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족도 높은 시드니 당일 투어
20개월째 여행 중인 우리 부부의 하루는 남들의 일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 청소하고, 빨래하고, 장을 보고, TV나 유튜브를 보고, 글을 읽거나 쓰면서 하루를 보낸다. 아, 물론 돈을 벌기 위한 활동과 양심상 약간의 운동도 곁들인다. 그래서 국내에서 지방을 돌 때나 해외에 나와 지낼 때에도 유명 관광지를 찾아다니는 편은 아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시드니에서의 시간이 고작 5일뿐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없다'는 압박감과 '이곳에 다시 올 수 없을지 모른다'는 조급함이 우리 안의 에너지를 끌어 모았다. 평소 같았으면 숙소에서 쉬며 이동의 피로를 풀고 새 동네와 천천히 친해질 시간이었지만, 시드니에선 그럴 여유가 없었다.
남편은 재빠르게 페더데일 동물원과 블루마운틴을 다녀오는 당일투어를 예약했다.
첫 코스는 동물원이었다. 입구를 들어서자 우리 안팎을 자유롭게 오가는 왈라비(캥거루과에 속함. 몸집이 작아 귀여운 인상을 준다)가 눈에 들어왔다.
“헉, 저 작은 녀석이 더 작은 아기를 배주머니에 넣고 다니네!”
사람들이 주는 먹이를 어미와 새끼가 함께 받아먹는 모습이 귀여워 한참을 바라보았다. 이어서 코알라를 만났다. 모두 잠들어 있었는데, 한 손으로 나뭇가지를 꼭 쥔 채 자는 모습이 사랑스러워 사진에 담아왔다.
이곳은 동물원이지만, 동물들을 철창 속에 가두어 구경거리로 만들지 않고, 사람과 동물이 공존하는 공간으로 꾸며져 있어 마음이 편했다.
1시간 정도 동물원에서 자유 시간을 가진 후 블루마운틴으로 향했다. 산의 이름은, 이 산에 가득한 유칼립투스 나무에서 증발한 오일이 햇빛에 반사되어 푸르게 보이는 현상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한숨 자고 일어나니 블루 마운틴의 Lincolns rock 앞에 도착하였다. 우리나라 가수 제니가 이곳에서 사진을 찍었다더니, 그곳엔 오로지 한국인 단체 관광객들만 있었다. 질서 정연하게 줄을 서서 본인 차례가 되면 제니가 찍었던 자리에 앉아 제니가 취했던 포즈로 사진을 찍고 있었다.
평소의 나였으면 그 줄에 끼지 않았을 것이다. 자다 일어나 정신이 없었던 건지, 무의식 중에 튀어나온 선생님 말씀 잘 듣는 학생 심리였던 건지,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줄을 섰다. 멍하니 남들 사진 찍는 걸 구경하다 어느새 내 차례가 와 버렸다.
몇 년 전 한 사건으로 생긴 고소공포증 탓에, 어마어마한 높이의 절벽 끝에 앉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전 못해요. 안 찍을래요. 못 할래요."
다리도 꼬이고 말도 꼬였다. 얼르고 달래는 가이드의 손에 의해 어느 순간 그곳에 앉혀졌다. 벌벌 떨다가도 가이드가 핸드폰을 들어 올리면 갑자기 방긋 웃으며 포즈를 취했다. 쩝, 카메라의 힘이란...
그런 내 모습이 재밌었는지, 투어 일행 중 20대 자매가 말을 걸어왔다. 그 계기로 서먹했던 일행과 대화를 트게 되었고, 저녁식사까지 함께 하였다.(* 참고로 제가 참석한 투어는 저녁 식사는 본인 부담, 식당은 자유 선택이었습니다.) 직장을 그만둔 후로 그 나이대 분들과 함께 할 일이 거의 없었는데, 오랜만에 청년들과 나누는 대화로 식탁이 더욱 풍성해졌다.
장소를 옮겨 블루마운틴에서 일몰을 감상하고, 날이 완전히 어두워지길 기다렸다가 캄캄한 숲 깊숙이 들어갔다. 아무도 없는 숲 속, 커다란 바위 위에 우리 일행 여섯 명은 나란히 누워 하늘을 바라보았다. 남편이 틀어둔 잔잔한 음악이 배경으로 깔리고, 까만 밤하늘에 별들이 하나둘 선명해지며 하얗게 빛을 냈다. 별에 집중해서 보다 보니 하늘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기도 하고, 드넓은 우주라는 공간 안에서 유영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일행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밤하늘 별빛 아래 아마도 각자의 생각에 잠긴 듯했다.
'우주에서 보면 지구 역시 저 수많은 별 중 하나겠지. 하물며 사람은? 그럼 나는?'
생각이 꼬리를 물며 이어지다, 스스로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새삼 깨달았다. 그 인식만으로도 마음이 정리되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이 선명해지는 듯했다. 삶에 대한 걱정과 고민, 아직 남은 마음속 찌꺼기들이 한순간에 하찮고 부질없게 여겨졌다. 쓸데없는 생각들을 뺀 마음의 빈 공간을 아름답고 좋은 것들로만 채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일정을 마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함께 별을 보며 열린 마음만큼, 우리 일행은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 부부가 20개월째 국내외를 오가며 한 달 살기를 하고 있다고 하자, "우와~" 탄성이 터지고 질문이 날아왔다. 뒷 좌석의 신혼부부가 먼저 물었다.
“부부 여행 유튜버세요?”
“흐흐, 아닌데요~.”
이번엔 가이드가 본인이 마이크를 달고 있다는 사실을 잊고 목소리를 높였다.
“혹시 두 분, 로또 맞으셨어요?”
와— 차 안에 웃음이 터졌다. 투어 내내 점잖고 침착했으며, 동굴 저음 목소리를 가진 가이드가 오늘 하루 냈던 소리 중 가장 높은음이었다. 그의 반응과 질문이 우스워 우린 웃느라 아무런 대답도 못했다.
"맞지요? 맞네요! 왠지~로또 맞은 냄새가 나는데요?!"
남편은 우리가 이 여행을 시작한 계기를 짧게 설명했다. 봉고차 안에는 또다시 “아~~” 하는 공감이 메아리쳤다. 그때부터 가이드는 도착할 때까지 "너무 멋있으십니다.", "정말 부럽습니다." "저도 두 분처럼 살고 싶습니다." 진심이 느껴지는 찬사를 몇 번이나 반복하셨다.
일행의 부러움과 찬사를 받으며 남편의 얼굴은 살짝 벌게졌다. 한껏 올라간 그의 광대는 내려올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런 남편을 바라보다, 그의 손등 위로 내 손을 포개며 소망했다.
'로또를 맞진 않더라도 우리 로또 맞은 듯이 살자.'
밤 10시가 훌쩍 넘은 시간, 시드니 시내의 한 호텔 앞에 차가 멈췄다. 함께 식사했던 자매가 쪼르르 달려오더니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식사 감사했어요. 정말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젊은 분들이라, 저녁식사를 우리가 샀는데 그게 고마웠던 모양이다.
"아니에요. 저도 어릴 때, 여행하며 만났던 분들에게 도움을 많이 받았었거든요. 두 분도 나중에 40대쯤 되면 2~30대 젊은 청년들한테 그렇게 해주세요."
그 말을 하며, 나의 20대 시절이 떠올랐다. 여행지에서 낯선 이들에게 받았던 조건 없는 따뜻한 마음들. 그때 받았던 것을 이젠 다른 이들에게 돌려줄 수 있어 감사했다.
비록 몇 시간 함께했을 뿐이지만, 같은 것을 보고 비슷한 감정을 나눈 우리 일행은, 악수와 포옹으로 작별의 아쉬움을 달랬다. 다시 만날 일은 없겠지만, '오늘'이 서로의 인생에서 ‘아무것도 아닌 하루’로 잊히지 않기를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