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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CRET SUNSHINE

<密陽, 밀양> 고향

by CHRIS Jan 27. 2025
[밀양, 이창동 2007][밀양, 이창동 2007]


 지금 살던 곳에서 조금씩 걸어 나갈수록 내가 살아왔던 터전이 얼마나 협소했는지를 돌아보게 된다. '햇빛이 깃드는 비밀한 고장'이 밀양의 어원이었던가? 나는 꿀과 젖이 흐르는 양지바른 곳이리라 생각했었다. 삶이 수단이 되어버린 우리네 사람들에게 땅의 뜻과 의미는 그렇게 큰 의미로 작용하진 않을 것이다. 생각의 전환이 필요한 여행객이나 사회사에 호기심이 남다른 어린이나 땅투기에 열성을 가지고 있는 지리학자 정도가 의미풀이에 관심이 있을지 모르겠다. 어디서 살든지 간에 인간적인 소외감은 가슴속에 떡밥이 되어 머물러있다. 소일을 하거나 혼잣말로 허공을 응시하면서 마음에 붙은 거북한 외로움을 조금씩 줄여나가는 과정은 공상과 잡념을 이웃처럼 불러들인다. 새롭게 살게 된 보금자리가 편하다고 느끼는 이유는 호기심의 대상이 될지언정 과거를 폭로하지 않아도 부담이 없기 때문이겠지.


 고향을 가진다는 것은 여러모로 유용하다. 현재에서 도피할 위안거리가 될 뿐 아니라, 일상의 시간이 흥미를 잃어버렸을 때 회귀할 곳을 제공한다. 그곳에는 사랑하는 사람이 살아야 한다. 단순하게 ‘아는 사람’이 아니다. 가서 만나고 싶다가도 만나면 다시 나의 삶으로 튕겨오게 만드는 가족 같은 일상감을 가진 지인이 살고 있어야 한다. 고향이라고 불러도 만날 사람이 없다면 단순히 그리움 때문에 텅 빈 공간을 방문하진 않을 테니까. 나는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이곳을 고향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서울은 이방인들을 위한 도시이다. 고향으로 불리기엔 아주 가깝고 낯선 느낌이다. 이주를 마음먹고 외국에 몇 년 눌러앉아 있으면 그때쯤이나 이곳이 살만했다고 추억하며 다시금 가보고 싶은 곳으로 생각이 되려나.


 <밀양>은 불편하고 거북하고 소박하고 지루하고 장난스럽고 밋밋하고, 종교에 관한 부분에서는 종종 공감하는 부분이 잔재한 영화였다. 이창동 감독의 이상적인 유토피아가 지금까지의 빙빙 돌던 문제적 현실에서 벗어나서 사랑이라는 구체적인 실천을 한층 비밀스럽게 드러내며 드라마의 중심에 자리하는 뻔뻔한 작품이랄 수 있다. 상처받은 영혼들이 머물 자리는 바로 네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심장이리라. 육신이 얻어맞고 터지던 외압으로 변질되던 선천적으로 고장 나든 간에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에게 다시 돌아갈 장소가 주 예수를 부르짖는 십자가나 자비를 호소하는 목탁이나 살벌한 전능을 호소하는 코란이 아니라 방황하는 정신을 치유할 편안하고 안락한 당신의 마음 속이라는 말을 긴 시간에 걸쳐 표현하는 밀양. 아직까지도 현재의 현실을 그리는 영상은 당면한 현실을 보여주는데 비현실적이라 믿는 나 자신에게 세부적인 스토리는 정제되지 않은 거칠고 이질적인 냄새를 풍기곤 했다. 용서는 마음먹는다고 쉽게 되는 일이 아닌가 보다. 팔뚝 위에 매달린 솜털처럼 바람이 불 때마다 하나하나 솟구쳐 오르는 어떤 날의 기억들은 용서의 과정에서 이뤄진 미흡한 설명들을 거부하게 만들었으니까. 그래도 고난하고 슬픈 날들에 둘러싸여 있기에 볕은 너무 따스하다. 따스하다 못해 후끈 달아오른다. 


 슬픔을 게워내려고 숨었던 동굴의 방은 상처를 치유할 힘이 땅 위에서 자라고 있음을 보여준다. 멀찍이 들리는 논밭의 풀벌레 소리와 밤마다 귓가를 울리는 맹꽁이 소리. 주말이면 찾게 되는 엄마의 집에서 새롭게 사는 의미를 배우고 있다. 뿌리지도 않았던 씨가 자라 한적히 길가를 장식한 꽃이 되었을 때 새삼 생명의 질김에 감탄하고 잠이 오지 않아 뒤척이며 듣게 되는 오월의 밤바람 소리에 누군가와 이별하며 맡았던 붉은 장미향을 기억해 내었다. 다시금 새침해지는 입술은 지난날들을 지워나가는데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고 끔찍했던 시간이 쉽게 잊히지 않으리라 예고하지만 모두 훌훌 털어내고 살리라 다짐하며 잠들곤 한다. 자신이 발 디디고 서 있는 곳에서 상대방에 대해 믿음을 가지는 것만큼 더 굳건한 자세가 어디 있을까? 자신을 찾지 못한 사람에게 용서란 말은 너무 가혹한 형벌이다. 다른 누군가를 믿으라는 권유도 어설픈 참견이다. 따뜻한 햇살을 가리키면서 보이는 것 이상을 요구하기보다 재 너머 묻힌 누구를 기억해 보라고 하는 것이 낫겠다. 슬픈 이에게 점잖은 침묵은 고급스러운 선물이 될 수 있고 호들갑스러운 상복보다는 묵묵히 동행을 자처한 인사가 기억에 남는 배려일 거라 생각이 드는 영화였다. 삶은 사람의 인상과 마음의 주름을 나이에 걸맞게 바꾼다. 그 중심엔 시간이 흐르고 있고 사람들이 살고 있다. 사람과 삶 중에 어느 것이 먼저일지는 나에겐 그리 중요하지 않다.


2007. 5. 27. SUNDAY




 봄날과 같은 겨울 햇살이 눈부셨다. 추위가 가셨나 싶어서 서둘러 일을 마치고 돌아와서 안에 입은 옷들을 벗어던지고 가벼운 차림으로 나섰다. 현관문 밖으로 나가면서 갑자기 밀려드는 한기에 대학 입학식 때가 떠올랐다. 삼월이면 의례 햇살이 따뜻하고 꽃피는 봄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나는 소매 없는 터틀넥에 모직 재킷을 입고 냉기가 가득한 교실에 앉아 있었다. 온기가 사라진 까칠한 모직의 감촉이 맨살을 감싸며 감기에 걸린 듯 기분이 스산해지기 시작했다. 재치기를 몇 번 하고선 옷을 잘못 입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리에 깁스를 풀면 바로 평소처럼 걸을 줄 알았던 기대와 달리 석고 덩어리가 내리누르던 습관에 저항하려 몇 달간 힘차게 공중으로 들려있던 다리는 땅 아래로 내려 붙이는 시간이 필요하다. 한번 부서져버린 현실은 예전의 매끈함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고향을 찾아가는 사람들과 명절을 기념하는 사람들 사이로 고향의 기억은 즐겨 부르던 [고향의 봄]처럼 정겹지가 않다. 부모님을 도와 기름냄새를 풍기며 명절 내내 음식을 만드느라 쉼 없이 음식을 들고 나르고 음식을 먹고 음식을 대접하는 행위와 함께 했던 시절. 먼 친척집을 전전하며 선물을 주고받고 덕담을 나누는 것이 의무이며 예의라고 알았던 날들이 지나갔다. 알던 사람들은 흩어지고 관계는 희미해졌으며 모든 것이 깨져버린 시간을 거치면서 고향과 명절에 의미를 두던 특별한 시간은 글 속의 배움과 삶 속의 경험 사이에서 이질적인 의문을 남겨놓았다. 한해를 마감하기 위해 목욕탕에서 돌아오는 길, 편의점에서 김밥과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타인들과 시간을 나누기보다 소중한 시간을 앗아가는 것으로 느껴졌던 어린 날의 명절과 고향의 기억까지 가볍게 이별을 고했다.


 안녕, 햇빛이 깃들었던 비밀한 시절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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