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사: 아무런 일이 없음.
아들과 함께 지내면서 있었던 일들을 먼저 생각나는 대로 쭉 써봐야겠다 생각했다. 과연 얼마큼 쏟아낼 수 있을까 궁금했다. 도저히 이해하기 힘들었던 일, 그럼에도 이해하려고 노력했던 일, 결국엔 이해 못 하겠다 폭발했던 일 그리고 숨기고 감추어서 지우고 싶은 일들을 꺼내기로 했다. 주저하며, 지우고 다시 쓰던 글자가 모여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지다 갑자기 우두두 내리치는 소나기처럼, 순식간에 우리의 이야기로 가득 채워졌다.
하얀 화면 가득 쓰인 아들과 나의 이야기를 다시 읽으면서, 콩닥콩닥 빠르게 뛰는 심장소리가 들렸다. 매 순간 애를 쓰고, 용을 쓰는 아들과 나의 모습이 보였다. 힘들고, 외롭고, 지친 모습, 넘치도록 담긴 감정에 서로 발악하는 모습들이 보였다.
아들과 함께 보고 싶었다. 너를 내 이야기의 남자 주인공으로 캐스팅해도 되겠냐는 말이 먼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들은 스릴러나 판타지로 썼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유명한 작가의 이름을 늘어놓으며 엄마는 재미있게 잘 쓸 수 있을 거라고 반짝이는 눈으로 이야기했다. 진심 가득한 응원이었다.
몇 개의 이야기들을 보여주었다.
"너무 엄마만 좋게 쓰고, 나는 너무 낮춘 거 아니야?"라며, 씩씩거렸다. 짧게 내쉬는 숨 덕분인지 말은 평소보다 더 빠르고, 높았다. 간신히 높아진 목소리를 끌어내리며, 이어서 말했다.
"이건 좀." 고개를 가로로 내저으며, 공기만 가득한 소리를 뱉어냈다.
말을 하려다 말고 주저하며 조금 느리게 말했다.
"재미가 없어. 너무 어둡고, 심오해."
"너라면 어떻게 쓸 거야?"
아들의 입에서 그때 아들이 즐겨 듣던 노래에 나오는 단어들이 툭툭 튀어나왔다. 그중에서 "인생은 회전목마", "깐부"라는 말을 이야기에 써도 되냐고 물었다. 아들은 흔쾌히 좋다고 말했다.
화내고 씩씩대며 걱정 어린 눈으로 살피던 아들은 순식간에 다시 신나 하고, 즐거워졌다.
오빠와 엄마의 이야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아들의 동생이 보였다. 이번에는 아들의 동생에게 물었다.
"엄마가 오빠 이야기 쓸 건데, 괜찮겠어? 너 이야기 안 써도 괜찮아?"
아들의 동생도 흔쾌히 대답했다.
"응, 괜찮아. 왠지 오빠 안 좋은 이야기 쓸 거 같아. 그러니까 난 괜찮아."
매일 아들과 나의 이야기를 쓰며, 아들이 그날 했던 말이 불쑥불쑥 떠올랐다.
"재미없다."
내 말 한마디, 한 마디에는 다 의미가 있고, 이유가 있지만, 참 길고 재미없었다. 위트도 없었다. 아들과 엄마의 이야기 중에서도 엄마의 이야기 부분 즉 나의 이야기 부분을 비유하자면 요즘 인기 많은 유튜버의 느낌이 아니었다. 굳이 찾는다면, 공영방송에서 소개되는 음식 다큐멘터리 느낌이다.
반면 아들의 이야기를 쓸 때는 아들이 말하는 속도처럼 타이핑 속도가 빨라졌다. 빨리빨리 써지고, 웃겼다. 아들의 말, 행동 하나하나가 특별하고, 살아있었다.
그 글을 살아가는 내내 나는 "아들이 재미있다"는 것을 한 번도 느끼지 못했다.
눈물이 났다. 한 두방을 눈물이 맺혀, 찌릿할 때도 있었다. 주룩주룩 흐르며, 결국엔 꺼이꺼이 운 적도 있다.
이야기 속 아들의 마음이 이제야 보여서 흘리는 눈물이었다. 이야기 속 아들에게 표현하지 못한 감정과 진짜 마음이 글을 쓰면서 보이기 시작했다. 아들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었다.
과연 아들도 그럴까?
아들에게 얼른 내 마음을 보여주고 싶었다. 글을 보면, 아들도 느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조금씩 보여 주었다.
너와 나의 이야기.
역시나 아들은 재미없다, 지루하다는 말을 반복적으로 했다. 말을 하면서, 글을 읽는 능력은 매번 놀라웠다. 소재에 특별한 매력이 없다고 이야기를 하다가 너무 지루하다고 다시 말했다.
마침내 아들의 흥분된 목소리가 뱉어졌고, 배반감에 가까운 감정이 쏟아졌다. 사전을 읽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자신의 이야기가 나오는 부분에서는 "피리"가 아니었다, "마법주스"가 아니었다, 이런 적이 없다고도 말했다.
놀림받는 기분으로 글을 읽는 듯했다. 문체도 딱딱하고, 노골적으로 자신을 비하하는 문서라며, 가시를 세웠다. 너무 적나라하게 적지 말고 무게 잡을 것은 확실하게 잡으라고 너무 어중간하다고 조언했다. 나를 모르면서 안다고 하는 것 같아서 짜증 난다며, 정확하게 자기의 기분을 말로 표현했다. 놀리려고 쓴 글이라고도 직접 말했다. 결말도 안 궁금하다고, 읽다가 덮어버릴 이야기, 의미가 없는 이야기라며 격양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아들은 끝까지 다 읽었다. 그리고는 휙 방으로 가버렸다.
이불 속에 들어가 있는 아들에게 이야기할 수 있냐고 물었다.
"왜?"라고 툭 말을 던졌다.
"내 글 읽어줘서 고마워. 그리고 이야기해 줘서 고마워. 네가 원하지 않으면 엄마 이 이야기 그만 쓸 거야. 그냥 5학년까지 너랑 지금의 네가 많이 다르잖아. 엄마는 그래서 그냥 그걸 써두고 싶었어. 자랑하고 싶은 마음, 뽐내고 싶은 마음은 아니야. 당연히 너를 놀리려는 마음도 아니야. 네가 원하지 않으면 그만 쓸게."
"맞아, 엄마. 6학년 때는 친구들도 내가 달라진 거 아는 거 같아." 언제 그랬냐는 듯 아들은 다시 명랑해졌다.
"엄마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단어들로 글을 쓰다 보니까, 너는 사실이 아니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아."
"글 내용이 지금처럼 재미가 없으면 아무도 안 읽어. 좀 재미있는 글을 써야 돼, 엄마. 빨주노초파남보로 색을 다르게 해서 재미있게 쓰라고. 어중간하게 색칠도 꼼꼼하게 안 되어 있는 회색 느낌 그리고 군데군데 빨간색 피 느낌이 나. 전혀 안 다듬어졌다고."
회색 빛깔 이야기를 하는 아들에게 놀랐다.
순간 아들이 그리던 그림에 등장하던 날카로운 가시, 뾰족한 이빨, 선명한 빨간빛도 생각났다.
"엄마가 회색 빛깔이라 괜찮아. 엄마가 엄마 색깔 그대로 쓴 거 같아서 그 부분은 성공한 것 같아."
할까 말까 망설이다, 결국 하지 못한 말을 다시 삼켰다.
'네가 빨주노초파남보라 괜찮다고.'
마지막으로 아들에게 말했다.
"이야기 쓰면서... 나는 참 재미없게 사는구나 생각하며 썼어. 네가 말했던 마음이 딱 내 마음이야. 근데 정말 지루하지만 자꾸 눈이 가고, 마음이 들썩들썩거리고 눈물이 나는 거야. 너도 어쨌든 끝까지 읽었고, 읽으면서 뭔가 마음이 간질간질하지 않았어? 그러면 된 거 같아. 느낌이 좋아."
아들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