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바탕 위 깜박이는 커서 같은 엄마
단 한 사람이 있을까?
삶은 직접 선택하고 책임지는 것이다. 선택에 대해 책임지는 것이 두렵고, 무서웠다. 언제나 칭찬 받고 싶고, 비난 받기는 싫어 피하려는 어리고 나약한 내가 보였다.
무조건적인 사랑과 지지를 해 주는 사람, 세상에 단 한 사람이 있다면, 세상은 살 만하다고 한다. 그 한 사람을 찾고 싶었다.
엄마가 미울 때는 내 억울함, 속상함을 잘 들어주는 친구를 찾아서 한없이 외로운 마음을 털어놓았고, 신랑 때문에 화가 날 때는 또 다른 누군가를 찾아서 분노를 토해냈다. 아이가 고달프게 할 때도 누군가를 찾아야 했다. 마음, 감정을 토해 놓는 그 순간은 시원하고, 후련했다. 함께 장단 맞춰 주는 사람이 있어 감사했다. 하지만 매번 상대만 바뀌어 반복되어지는 원망, 신세한탄이 부끄러워졌다. 언제까지 못 살겠고, 힘들 것 인가.
힘든 이야기, 처리하지 못한 감정들을 가까운 사람에게 던져 버리는 내 모습이 부끄러웠다.
그나마 힘들 때 마다 연락을 했던 몇몇 친구들에게도 더 이상 하소연하기 위해 연락하지 않았다.
힘들고 상처 받은 날이 어김없이 찾아왔고, 노트북 뚜껑을 열었다. 온갖 욕을 쳐댔다. 나중에 지워 버리면 되니,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조용한 곳에서 나의 들끓는 분노, 슬픔, 아픔들을 적기 시작했다. 하얀색 종이 위에 깜박이는 커서만 보였고, 그 커서는 까만색 작은 세로줄일 뿐이었다.
묵묵히 쳐 내려가는 말을 옮겨주기만 했다. 미친 듯이 쳐 대다가 주루룩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는 임시저장 버튼을 눌렀다. 글들이 쌓여 갔다.
워킹맘으로, 엄마로, 여자로, 딸로, 며느리로, 부인으로 다시 읽기 싫은 글들이 쌓였지만, 그 글을 쳐대는 순간 만큼은 온전히 나였다. 글 속의 나는 어떤 생각을 해도, 어떤 말을 해도 괜찮았고,자유로웠다.
나는 아이의 단 한 사람이었나?
아이는 가정 내 감정의 하수구였다. 피곤할 때, 지치고 힘들 때, 힘겹고 버거울 때, 불편한 감정들이 쌓이면 아이에게 흘러간다. 그러면 아이는 마침 그때 딱 적당한 소재를 제공했다. 제일 힘없고, 틈이 나기 쉬운 가장 낮은 곳, 하수구에 아이가 있었다.
아이는 진득이 있지를 못했다. 한시라도 지루한 것을 싫어했고, 재미있는 거리들을 찾아 돌아다녔다. 언제나 그랬다. 하지만 유독 피곤하고 힘든 날 그 행동들을 문제 행동이라 생각하고, 버럭하며 고치려고 했다.
더 이상 아이를 감정의 하수구로 대하지 않겠노라 맹세했다. 아이의 행동 때문에 내 마음이 짜증나거나, 원망스러울 때, 화가날때 그래서 다시 알려줘야 겠다는 생각이 들 때는 나를 먼저 본다.
‘내가 지금 피곤하구나. 그래서 예민하구나. 아이 방은 어제도 더러웠어. 다음에 이야기하자.’ 그리고 푹 자거나, 맛있는 음식을 먹거나, 하고 싶은 일을 하며 기분이 괜찮아 지면, 이야기한다.
“먹었던 음식 봉지들 방에 있으니 냄새 나더라. 호두가 방에 들어가서 자꾸 떨어진 거 주워 먹어. 지금 바로 치워줄래?”
그러면 아이도 쿨하게 이야기 한다.
“네.”
판사 검사 말고 변호사
부모가 아이에게 분석하고 따지고 평가하고 판단하는 판사나 검사 역할로 다가가면 아이의 불안감과 두려움 같은 부정적 감정이 더 증폭된다. 오히려 아이를 방어해주고 보호해주는 대변해주는 변호사 역할로 다가야 한다.
2020년 시작부터 신종코로나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로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아주 많았다. 그러다 보니, 심리적 거리두기가 필요할 만큼 나는 사소한 일에 과민 반응을 보였다.
“뛰지마!”
“목소리 낮춰!”
“이 닦아!”
“과제 확인했어?”
내가 주로 하는 말은 명령이나 금지어였고, 이런 말들이 쌓이다 보니 결국 싸움이 벌어졌다. 아이들의 행동을 비판하는 나의 이 말들은 결국 나조차 흥분하게 만들었다. 잘못을 저지른 아이들을 대할 때, 부모는 숙달된 정비공이 고장 난 자동차를 다루듯이 다루어야 한다고 책 “부모와 아이사이“에서는 말한다.
매일 처음 만나는 고객을 대하듯 아이를 대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정비공은 자동차 주인에게 창피를 주지 않고, 어디를 어떻게 수리해야 하는지 지적한다. 소음이 들리고 덜컹덜컹거리고 삐걱거리는 소리가 난다고 해서 자동차를 탓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소리를 이용하여 자동차의 상태를 파악한다. 아이의 말이나 행동을 탓하며, 불안해하는 대신 아이의 말이나 행동이 아이의 마음을 읽어주는 좋은 신호가 될 수 있다는 인식이 필요하다.
아이가 하는 말들이 대신 해결해 달라는 메시지로 들렸다. 그래서 아이가 말을 하는 순간 아이의 감정을 읽기 보다는 어떻게 도와줄 수 있을까만 생각했다. 그러다보니 아이의 말들이 많아지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아이가 하는 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 부모는 아이가 하는 말과 행동에 감춰진 감정을 비춰주는 거울로 느끼는 감정을 그대로 보여주기만 해도 충분하다고 한다. 정말 아이가 뭔가 요구를 하는 상황에서도 아이의 마음을 읽어주고, 바로 그 요구를 들어 주는 대신 아이의 요구를 인정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넌 내게 중요해. 네 기분을 이해하고 싶어.”
“기분이 편안할 때 가장 좋은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 거야.”
이런 분위기를 느낀 아이는 자기가 바라는 것을 얻지 못하더라도, 엄마가 자기를 지지해주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불쾌한 이야기를 할 때도, 아이의 감정을 인정해주라고 한다. 인정이라는 말이 “나도 너와 같은 생각이야.”와 같은 찬성이 아닌, 아이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주는 태도인 것이다. 감정, 우리의 몸은 정직하다. 하트매쓰 연구소는 심장 박동 간 속도 변화율을 HRV(Heart Rate Variability)라 부르며 이는 감정, 정서에 아주 민감하게 반응함을 발견하였다. 짜증이나 좌절감을 느낄 때는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고, 감사와 편안함을 느낄 때는 규칙적인 리듬을 보인다. 심장의 파장은 직경 1.5m까지 느낄 수 있는 것으로 의식을 하든 안 하든,자신의 생각과 감정의 질은 같은 환경 속에 있는 존재에게 에너지적 파장으로 심장의 자기장에 영향을 미친다. 부모의 편안한 마음 안에서 아이는 안전함을 느낀다.
‘부모와 아이 사이’ 책의 본문 중 등장한 어느 부모가 한 말이 와 닿았다.
“영리한 사람은 구덩이에서 나오는 방법을 알고 있지만, 현명한 사람은 아예 구덩이에 빠지지 않는다고 하잖아요. 나도 현명한 사람이 되기로 했어요.”
아이들의 감정을 보호하면서 아이들의 행동을 바꿀 수 있는 그 기술이 현명한 부모가 되게 해준다. 아이와 같은 편에서, 마음을 전해주는 언어로, 분위기를 바꿔주는 대응 방법을 터득하는 대화기술 연습 그리고 내 안에 들어있는 존중하는 마음을 보여주는 대화를 해야 할 것이다.
하얀 바탕 위 깜박이는 커서 같은 엄마
아이에게 하얀색 종이 위에 깜박이는 커서 같은 엄마가 되고 싶다. 어떤 말을 쳐대도 어떤 행동을 해도 그대로 받아들이는 존재가 되고 싶다. 깜박 깜박이는 커서 앞에서 아무 말을 못하고 있어도 같은 속도로 계속 깜박이는 존재가 되고 싶다. 말이 많아져도 손이 빨라져도 마침내는 그대로 온전히 옮겨주는 존재가 되고 싶다. 지금 나는 아들, 딸의 중요한 사람이다. 아들, 딸이 힘들 때, 즐거울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나였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