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희귀난치성 질환 이분척추증으로 태어나다
1994년 9월 4일, 부천의 모 산부인과에서 나는 태어났다. 누가 꼭 장난으로 끼워맞춘 것 같은 생년월일처럼 나는 태어났을 때 남들과 다른 비범한 부분이 있었으니, 바로 혹을 달고 태어났다는 것이다.
이 혹은 전래동화 속 혹부리영감에 나오는 혹처럼 노래를 잘하게 해주는 혹이었을까? 당연히 그건 아니었다. 그 혹은 내 신경다발을 소중하게 감싼 것이었다. 어떤 연유에서인지 나는 안으로 잘 들어가 형성되었어야 했을 신경다발이 죄다 밖으로 새어나가 혹으로 태어났다. 이것을 딤플(Dimple)*이라고 한다. 한동안 나는 신생아실에 있다가 병명도 영문도 모르는 의사가 큰 병원으로 가보라고 해서 인천 모 병원으로 가게 되었다.
*척수나 신경다발이 피부 밖으로 나와 있는 상태를 의미하는 용어로, 일반적인 사람에게는 볼 수 없는 특이한 현상
힘깨나 쓴다는 큰 병원에서도 나의 정확한 질병명을 짚어내지는 못했다. 다만 이 혹을 그대로 내버려둘 수는 없으니, 포장지 풀듯 섬세하게 풀어 신경다발을 안으로 집어넣어야 한다고 의사는 설명했다. 그러면서 덧붙이기를 못 걸을 수 있다고 했다.
아빠는 금전적인 부분에서 고민을 많이 했다. 당시 천 만원이 넘는 수술비용을 두고 냉큼 그러시오, 할 수 없는 월급쟁이였기 때문이다. 엄마 말로도 자린고비였다던 아빠는 일단 생명부터 살리자는 생각으로 수술을 동의했다.
재왕절개 후유증이 남은 엄마는 봉고차에 누워서 외할머니와 함께 나를 기다렸다. 아빠는 교회에서 온 교인들과 목사님과 함께 복도에 앉아 초조하게 수술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수술실 복도에서는 죽어서 나가는 사람도 있었다. 그때마다 아빠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었다고 한다. 그 시간 나의 어린 언니는 혼자 남겨져 영문도 모른 채, 막 태어난 동생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휩싸여 떨고 있었다.
장장 아홉 시간에 육박하는 긴 수술을 마치고 의사는 말했다.
"우선 신경다발은 잘 집어넣었고 경과를 지켜봐야 합니다."
나는 중환자실에 두 달 동안 있었다. 상처가 아물어야 하는데 소변이나 대변으로 인한 오염 때문에 자꾸 염증이 나서 상처가 아물지를 않아서였다. 종국에 우리집 형편을 아는 과장이 넌지시 불러 퇴원을 권하며 아빠에게 드레싱 방법 등을 알려주었다.
두 달 동안 낫질 않던 내 상처는 퇴원하고 일주일도 안 되어 부모님의 섬세한 케어로 쏙 아물었다. 드레싱을 한 후 아빠가 나를 엎어놓고 수술 자국 위로 부채질을 했다고 한다. 이 부분을 엄마에게 들으며 나는 웃었다. 꼭 한약을 달이는 것 같아서. 두 분이 열심히 달인 한약이 나다.
상처가 아문 후에야 신생아 생활이 시작되었다. 부모님은 조심스럽게 나를 씻기고 중환자실에 입원해 있느라 먼지가 꼬여 엉킨 내 "돼지꼬리" 뒷머리도 쏠랑 잘랐다. 나란히 누워 낮잠을 청하기도 했다. 나는 아기 때 코가 아주 낮았는데, 이걸 보고 가족들이 "총알이 지나가도 지지만 살아남겠네!"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고 한다. 내가 태어나서 빚도 지고, 그렇다고 병명을 아는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나 때문에 너무 많은 걸 희생해야 했던 언니를 포함해 우리 가족은 그렇게 힘든데도 웃었다. 내 존재를 반겨주었다.
그 힘 덕분이었을까? 나는 걸었다. 그냥, 잘만 걸었다. 달리는 속도가 느려서 술래잡기를 하면 깍두기를 도맡아 했다. 운동회에서도 맨날 꼴찌를 했지만 어쨌거나 뛰었다. 열심히 달리고 도장을 받지 못했지만, 엄마를 졸라 문구점에 들러 공책을 몇 권 샀다. 만족스러운 시간들이었다. 갑작스럽게 수술을 하게 되기 전까지는!
엄마 말로는 아빠가 텔레비전을 보고 나와 비슷한 케이스를 발견했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세브란스병원에 갔고, 그제서야 내 병명을 할 수 있었다. 당사자인 나 빼고.
내 병명은 희귀난치성 질환 이분척추증이었다. 이분척추증은 척수가 벌어져 신경다발이 새어나온 경우를 말하며, 이를 갖고 태어난 아이들은 보행장애 또는 배변장애가 생길 가능성이 높다. 나 또한 그래서 걸을 때 다른 애들과 다른 방식(다른 애들이 뒤꿈치를 들면 나는 앞꿈치를 들었다)으로 걸었다. 소변은 짜내듯 해야 겨우 나왔고, 대변은 도리가 없으니 수지관장하는 경우(손가락으로 배변을 파내는 것)가 많았다.
나는 진료실에서 그 자리에 있었지만 초등학교 3학년에게 설명하는 어른은 없었다. 나는 걸으라면 걷고 앉으라면 앉아서 얌전히 있는 어린이였다. 다리 수술은 일사천리로 양발 동시에 하는 것으로 결정이 났다. 양발이 많이 틀어져 있었으므로 걷기 위해서는 이를 교정하는 수술을 해야 했다.
수술 날짜는 정확히 기억 나지 않지만, 수술 후 깁스를 하게 되는 기간에 크리스마스가 포함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가 혼자 철철 울었기 때문이다.
생각만으로도 슬펐다. 어떻게 크리스마스에 누워서 보낼 수 있어. 그런 지루한 크리스마스가 어디 있어? 나는 그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내 수술을 배웅하는 어른들은 다른 생각으로 마음이 어지러웠을 것이다. 수술이 잘 되어야 할 텐데, 걸을 수 있어야 할 텐데 하는 그런 걱정들. 그러나 아이였던 나는 그 속도 모르고 수술이 가지는 위험성을 하나도 몰랐다.
수술은 나 모르는 사이에 끝났다. (당연하다. 나는 마취해서 잠이 들었으니까!) 그래서 나에게 수술은 아프다는 기억보다는, 그냥 하는 것으로 남아있다. 나는 그 뒤에 실밥을 뽑는 게 제일 아팠다. 누가 물어보면 수술보다 아프다고 했다. 새까맣게 굳은 상처 위로 실밥을 투두둑 뽑아내는 그 장면을 보고 엄마는 드라마처럼 아아아, 하며 빈혈을 일으켰다. 따가워죽겠는 건 당사자인 난데 너무한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었다. (부모님 속도 모르고!)
그렇게 퇴원 후 오매불망 기다리던 크리스마스가 왔다.
나는,
또 걸었다.
나만의 베드로가 있었던 것일까? 자꾸만 나는 일어서서 걸을 수 있음을 증명했다. 양 다리에 깁스를 한 채로, 거실에 있는 전자피아노를 붙잡고 일어나서 친구들과 신나는 크리스마스를 보냈다. 왜 일어났는지는 모른다. 춤이라도 추려고 했던 걸까? 어릴 적 나는 라디오의 동요에 맞춰 혼자 공연하기를 좋아했다. 진지하게 생각해보면 친구들과 시야를 맞추려고 했던 것 같다. 나도 할 수 있어! 보여주고 싶었던 것도 같고.
하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누워서 보냈다. 가끔 깁스한 종아리 안쪽이 간지러우면 쇠로 된 귀이개를 넣어 박박 긁었다. 그러면 때 같은 게 나왔다. 나중에 깁스를 풀고 보니 내 다리는 반양말이라도 신은 것처럼 새까맣게 되어 있었다. 그게 다 때였다. 휠체어에 앉아 병원 복도를 빠져나가며 내가 창피하다 툴툴거리자 부모님은 집에 가서 깨끗하게 닦으면 된다고 얼러주셨다. (가끔 내가 귀이개로 쑤셔댄 부분은 하얗더라.)
지난한 과정을 거쳐 으레 그렇듯 이제 걷기 위해 재활병원에 입원했다. 학교를 다녔어야 할 시기, 학교 대신 나는 재활병원에서 재활과 동시에 친구들을 사귀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돌이켜보면 부모님은 참 고생하셨겠다 싶은데 당시에는 자각이 없었다. 간이 병상에서 자는 엄마에게 아빠가 아이가 작으니 같이 자라고 했을 때도 야멸차게 "싫어! 내 자리가 좁잖아!"라고 했다가 이기적이고 못된 아이라고 혼이 났었다. 나는 그런 애였다.
언제 걸을까 계속 걷게 하려는 엄마의 노력과 반대로 나는 휠체어가 너무 좋았다. 신기했으니까! 애들도 다 그랬을 거다. 우리 재활병동에는 특별한 휠체어가 두 대인가 있었다. 다 파란색 휠체어인데 그 두 대만 캐릭터가 그려진 귀여운 휠체어였다. 하나는 개구리, 하나는 곰. 근데 곰 휠체어는 바퀴가 뻑뻑해서 별로였고, 개구리 휠체어는 6학년 남자애가 자기 것처럼 매일 타고 다녔다.
재활병동에서의 생활은 나름 귀여운 일들이 많았다. 우리는 그때 보조기를 거의 다 맞췄었는데, 어린이들을 위해 보조기에 입힐 수 있는 캐릭터나 색을 선택할 수 있었다. 그때 가장 유행이었던 건 1위가 빨간색에 잠자리(내 착각일 수도) 그 다음으로는 살색이었다. 사실 1위니, 2위니 해도 나머지는 잘 못 봤다. 거의 빨간색에 잠자리로 보조기색을 입히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서로의 보조기를 보며 네 건 이렇구나 저렇구나 떠들던 기억이 난다.
재활병동의 하루는 규칙적이다. 아침 7시에 밥이 들어오고, 8시에 물리치료, 9시에 작업치료, 화목 11시에 전기치료, 수요일 두 시에 수치료, 이런식으로 다 시간이 정해져 있었다. 오후 시간에는 작은 도서관에 가서 드래곤볼, 천행기 같은 만화책을 빌려봤다. 가톨릭 계열 만화잡지 내친구들도 재밌게 봤다. 볼 때마다 호수가 제멋대로여서 결국 끝까지 끝을 모르게 된 만화 황금사과가 아쉽다.
나는 모든 치료를 좋아했다. 물리치료사 선생님과는 너 흉터 위에 장미 문신을 해라, 같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깔깔 웃었다. 실습 온 학생들을 위해 내 임상을 설명하시는 걸 듣고 다 외워서 내가 대신 줄줄 말할 때도 있었다. 아킬레스건이 뒤에 있는데, 그걸 앞으로 옮기는 수술을 해서..... 이제는 이 정도만 기억 난다. 작업치료사 선생님께는 너무 편했던 나머지 선생님을 울린 적이 있었다. 다시 생각하니 죄송스럽다. 이 자리를 빌려 그 분은 못 들으시겠지만... 그때 말 안 듣던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 성인이 되었습니다. 감사해요 선생님. 인사를 전합니다.
수치료실은 수영치료인데 말만 그렇지 신나게 놀다가 마지막에 한 번 선생님께 가서 자세를 교정받는 것으로 끝나는 수업이다. 아이들 모두가 그 수업을 좋아해서 수요일만 기다리곤 했다. 발과 종아리에 전극을 흘리는 전기치료를 받을 때는 만화책을 읽으며 시간을 때웠다.
수술 후 재활병동에서 1년 정도 있었다 말하면 사람들은 고생하셨네요, 내게 말하지만 그 말은 내가 아니라 우리 부모님께 가야 맞다. 나는 행복했다. 휠체어를 타고 경사로에서 1등으로 내려와 내가 이겼다!를 외치고 때마침 경사로로 들어온 엄마한테 걸려서 혼이 많이 났던 기억만 해도 그렇다. 사람들도 좋았다. 옆 자리의 아기가 엄마라고 했다며 기뻐하던 보호자 이모도, 내가 퇴원할 때에 나의 행복을 빌어주며 반 고흐 동화책을 선물해준 이모도 모두 좋은 사람들이었다.
퇴원 후, 사회에 나가서가 진짜 고난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