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20년 전)어린이의 눈으로 본 재활병동
재활병동에서 입원해 있던 일이 벌써 20년도 전의 일이다. 기억이 희미할 수밖에 없다. 사람들은 내가 어린 시절 치료를 위해 재활병동에서 약 1년 동안 머물렀다는 사실을 말하면, 안쓰럽다는 듯 눈썹을 팔자로 만들고 내게 물었다.
"어렸을 텐데 많이 힘들겠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어리둥절했다. 확실히 재활병동은 바깥에 비하면 좁고 놀 거리가 없어보인다. (그리고 그것이 사실이기도 하다.) 하지만 어렸던 나는 그런 것을 몰랐고 재활병동에서도 우리는 여기저기를 탐험하며 재미있게 놀았다. 오늘은 그 재활병동에 대한 추억을 상기하며 몇 가지 에피소드를 여러분께 소개시켜드리고자 한다.
1. 병원 내 도서관
당시 세브란스 병원에는 두 군데의 도서관이 있었다.
한 곳은 재활병원의 도서관으로 병원에 입원 중이거나, 통원치료하는 아이들 또는 보호자들을 위한 책들이었는데 나는 그 중에서도 만화책을 가장 자주 빌려보았다. 도서관이 크지는 않았고 어린아이였던 내게도 몹시 좁은 공간처럼 느껴졌었다. 책들은 정리가 안 되어 있어 서간이 제멋대로인 날이 많아 원하는 책을 보려면 마구 뒤져야 했다.
또 재활병원이 아닌 병원과 병원 통로 사이에 위치한 도서관도 있었는데 책 종류는 재활병원과 대개 비슷했으나 공간도 그곳이 더 넓고 책 종류도 훨씬 많았다. 재활병원 입원 후에는 재활병원 도서관만 가고 통원치료할 때만 이곳을 갔다. 그러나 병원이 새롭게 건물을 올리면서 이 통로의 도서관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통로 간 도서관에서 당시 내가 발견한 만화책 중 가장 좋아했던 건 <맑음X소년>이라는 타가오 시게루의 작품이었는데, 딱 1권밖에 없어서 그것밖에 빌려보지 못했는데도 제목을 꼭 기억해두었다가 다음을 읽어야지 기약할 정도였다. 나머지는 <두근두근 연극부>, <엘프사냥꾼> 이런 만화책이 있었는데 그때 어렸던 나에겐 좀 맞지 않는 책들이었던 것 같다. 아직도 기억나는 장면이 여자 엘프의 옷을 갑자기 찢는 남자였으니... (이세계에 떨어진 이들이 원래 세계로 가기 위해서는 문양이 있는 엘프를 찾아야 하는데 이를 위해 벗긴다는 만화였다... 괴랄하다.)
지금은 예약시간에 맞춰가면 대개 1시간 내외로 진료를 받을 수 있었지만 내가 통원치료를 받던 때에는 의사선생님이 오후든 오전이든 오라고 하면 가서 내내 기다렸어야 했다. 때문에 빌린 책을 읽고, 또 읽고의 반복이었다.
재활병원에도 통로 간 도서관에도 있던 만화잡지가 있다. <내친구들>이라는 카톨릭 계열에서 발행하는 잡지였는데 그거 한 권, 다른 만화책 한 권 빌려가서 대기실 의자에 앉아 내내 읽었다.
재활병원 도서관에서 주로 빌렸던 건 <천행기>와 <드래곤볼>이었다. 천행기의 경우 연재가 진행 중인 만화인 데다가 권 수가 들쭉날쭉하게 있어서 흐름을 파악하기 어려웠지만, 드래곤볼은 전권 다 있어서 완독할 수 있었다. 단 그것도 이제 언제 내가 몇 권을 읽었고, 이런 식으로 '있는 걸' 빌리고 기약 없이 다음 권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즐겁게 잘 찾아 읽었다.
수술을 위해 입원했을 때는 아빠가 만화책을 대여점에서 아예 통으로 빌려다주시기도 했다. (그 바람에 나는 입원=만화책으로 인식해버려서, 감기에 걸려 입원했을 때 만화책을 빌려다 달라고 했다가 한 소리 듣기도 했다.)
돌아보고 나니, 책을 좋아하고 만화를 좋아하는 것은 어릴 때 이러한 경험들로부터 태어난 것이구나 싶었다.
2. 경사로 폭주기관차
재활병동의 대다수의 어린이 환자들은 다리 수술을 하고 다시 걸음마를 배우는 환자들이 많다. 그래서 복도마다 휠체어도 많다. 대개는 파란색의 일반 휠체어지만 딱 두 개. 캐릭터 휠체어가 있다. 초등학생 어린이를 기준으로 만든 건 아닌 것 같고, 그보다 더 어린 유아들을 위한 휠체어였다. 두 가지 중 하나, 갈색 곰돌이 휠체어는 뻑뻑하고 잘 나가지 않아 인기가 없었다. 그래서 늘 복도에 널브러져 있었고, 나머지 하나 개구리 휠체어는 쌩쌩 잘 나가고 특이해서 인기가 많았다. 하지만 병동에서 가장 나이 많은 6학년 남자애가 그 휠체어를 독점하고 다녔다. 왜소한 체구를 어떻게든 구겨넣어 그 휠체어에 앉아있던 기억이 난다.
재활병동 대다수 아이들은 걸을 수 있다. 걸음이 서툴기는 하지만 재활병동은 '재활병동' 답게 난간이 잘 되어 있어 잡고 천천히 걸어가면 된다. 하지만...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아이들은 유모차를 타고 싶다며 응석을 부리기도 한다. 아마 서툴고 힘들기 때문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 병동에서도 걸을 수 있음에도 휠체어를 타는 아이들은 많았다. 나도 그 중 한 명이었다.
병동에는 경사로가 있어 엘레베이터 대신 그곳을 통해 아래층 혹은 위층으로 갈 수 있었다. 나를 포함한 몇몇의 아이들은 그 경사로에서 휠체어 달리기 시합을 벌이곤 했다.
운동회에서 늘 꼴찌만 하던 나는 경사로에서는 휠체어를 타고 붕붕 날아 1등을 차지하기 일쑤였다.
엄마에게 걸리기 전까지는 말이다.
경사로에서 높은 속도로 휠체어를 타고 노는 것이 당연히! 위험한 일이기 때문에 이 달리기는 어른들과 간호사 선생님들의 시선을 피해서 진행해왔다. 그런데 하필이면 1등으로 내가 쌩쌩 내려가며 잔뜩 신이 났던 어느 날 도착이다! 하고 소리를 지르자마자 1층에서 경사로로 통하는 입구를 열고 엄마가 들어온 것이다. 엄마는 나를 보자마자 정색했다.
나는 타고 왔던 휠체어에서 일어나 두 손으로 손잡이를 잡고 병동으로 돌아가 한참 혼났다. 혼을 내는 내내 엄마는 말했다.
"어쩐지 내가 경사로로 가고 싶더라니!"
3. 가장 인기 있던 재활 운동용품은 '짐볼'
지금이야 짐볼을 다이소에서도 살 수 있는 시대지만, 당시 내가 어린이였을 때는 재활용구를 파는 코디네이터가 병원에 찾아와 팜플렛을 주고 전화해서 주문해서 샀었다. 인터넷 쇼핑이라는 개념이 다소 희박할 때였다. 코디네이터는 가끔 샘플로 재활용구를 가지고 왔었는데, 그 중 가장 인기 있는 것은 통통 튀는 커다란 짐볼이었다.
당시 어린이병동은 5층에 위치했는데, 다 같이 모여서 놀 수 있는 공용휴게실 같은 공간이 있었다. 그곳에서 누군가 한 사람이 제 몸만한 그 공으로 놀고 있으면 다들 입을 떡 벌리고 부러워했다. 그 전까지 봤던 공은 커봐야 비치볼이었으니까. 나도 그 모습을 보고 부러워서 엄마한테 사달라고 졸랐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가격이 무섭도록 사악했으니, 대충 2000년대 초반 가격으로 6-70만원이었던 것 같다. 엄마는 당연히 사주지 않았다. 우리 엄마만 그런 건 아니었다. 다른 아이들의 부모님도 물론 사주지 않았다.
결국 짐볼은 물리치료실이나 작업치료실 구석에서 만날 수 있었다. 막 만지고 놀 수는 없었다. 시간마다 정해진 운동을 했어야 했기 때문에 짐볼을 그림의 떡처럼 바라보던 기억이 난다.
지금에 와서 나는 재활병원의 생활을 다 퉁쳐서 즐거웠다, 라고 말하지만 당시의 어린 나는 얼마나 놀 거리가 없었는지 생각하게 된다. 아래의 일화는 '바깥'에서 자란 친구와 '병원'에서 자란 나의 차이를 확연히 느꼈던 일화다.
4. 아트박스보다 작잖아
퇴원하고 나서 혼자 힘으로 병원에 찾아간 적이 있다. 그것도 친구를 데리고.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나는 생긴 지 2년도 채 되지 않은 소규모초등학교에 다니게 되었는데 그곳은 한 학년당 반이 두 개뿐이었다. 반에 배정된 학생도 많아봐야 25명이어서 합동으로 체육수업을 진행한 적도 많았다.
전학생의 신분이었던 나는 무리지어 다니는 친구들 사이에 어떻게든 껴서 자연스럽게 섞이고 싶었다. 내가 친해지려고 노력 중인 무리에 있던 여자애 중 한 명은 문구를 좋아했다. 그 중에서도 필기구를 좋아했는데, 나는 내가 아는 제일 큰 문구숍에 데려가주겠다고 그 친구에게 호언장담을 했다.
내가 막 퇴원하고 통원치료를 받을 무렵 세브란스는 새 건물을 세웠다. 옥상정원부터 로비에 들어서면 보이는 커다란 색색의 물고기 모형, 편의점, 푸드코드, 카페, 그 안의 기프트샵. 사실상 나에게 세상은 학교, 집, 병원이 전부였기에 내가 아는 가장 크고 화려한 문구점은 그 기프트샵이었다. 커다란 인형부터 시작해서 다양한 물건들이 진열된 그곳을 단 한 번도 작다거나 초라하다고 생각해본 적 없었다.
우리는 부천역에서 출발했다. (내가 표를 끊었다. 중증 장애인이었기 때문에 보호자 동반으로 두 장을 뽑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신도림에서 2호선으로 갈아타고 신촌역에 도착해서 열심히 걸어올라갔다. 친구는 지쳐했지만 나는 드디어 내가 아는 제일 큰 문구점을 보여줄 수 있다는 생각에 들떠 있었다. 그러나 기프트숍에 도착한 친구는 실망했다.
"이게 뭐야?"
나는 친구의 말에 당황했다. 누가 환상을 깨부수기라도 한 것처럼, 나에게도 갑작스럽게 그 기프트숍이 작아보였다. 친구는 '아트박스'보다 작고 초라하다고 기프트숍을 힐난했다. 나는 부끄러워져 세브란스병원 본관의 옥삭정원도 소개시켜주려 했으나 친구는 너무 지쳐서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했다. 그리고 우리는 어색하게 전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5. 지지는 삼겹살이 너무 먹고 싶어서
재활병원에 입원 중이었는지, 수술 직후였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 전자일 것이다. 그때 나는 걷지 못하는 상태였다. 그런데 삼겹살이 너무너무 먹고 싶다고 엄마와 언니에게 졸랐다고 한다. 냄새가 심한 삼겹살을 어떻게 병원에 들여온단 말인가? 들여와도 전자레인지에 돌려 먹으면 그 맛이 나지 않을 것이다. 고민하던 엄마와 언니는 나를 데리고 삼겹살 집에 가기로 했다.
휠체어는 병원 밖으로 가지고 나갈 수 없다. (당연하다) 그래서 나는 언니의 등에 업혔다. 나는 이때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언니 말로는 내가 그때 한여름에 너를 업고 가느라 정말 힘들었다고 했다. 그랬을 것 같다. 나는 아무리 깡말랐어도 키가 있었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언니도 성인이 아니었다. 나와 나이차이가 많았다지만 언니도 학생이었는데.....
세브란스 병원을 가본 사람은 알겠지만, 병원에서 식당이 있는 신촌역쪽으로 가려면 꽤 걸어야 한다. 무더위에 그 길을 나를 업고 걸었을 언니의 사랑을 떠올리면 마음이 따뜻해진다. 언니가 보고 싶다.
내가 재활병동에서의 시간들을 허비했다거나, 사회에 뒤쳐지게 갇혀있었다거나 하는 식으로 부정적으로 회상하지 않는 이유는 위처럼 아름다운 기억들이 있기 때문이다. <터미네이터>로 유명한 아놀드 슈왈제네거는 대학의 한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자신은 자수성가를 믿지 않는다." "사람은 누군가에게 도움받으며 살아가는 존재다." "이걸 깨달아야 당신도 누군가를 도우며 살아갈 수 있다."고. 나는 이 말을 보고 격하게 공감했다.
얼마 전 고흐 전시회가 열려 다녀오면서 엄마에게 내 오래된 동화책을 선물로 주었다. 그 동화책은 고흐의 삶을 어린이의 시선에서 볼 수 있도록 그린 그림책인데, 오래전 재활병동에서 친했던 "지희 이모"가 선물해주었다. 책 맨 앞 장에는 지희 이모가 사랑을 가득 담아 내게 적어준 메시지도 있다. 지금은 오래되어 기억나지 않는 지희 이모. 이모를 비롯해 얼마나 많은 이들이 내 삶을 지탱해주고 있는지.
자칫 어두울 수 있었던 내 어린 시절을 고흐처럼 아름다운 색채로 칠해준 많은 사람들께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