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 도시가 말하는 침묵, “너는 여기 들어올 수 없어”
벌써 몇 년 전의 일이다. 힐링캠프에서 만난 멘티 친구와 강남에서 만났다. 우리는 1층에 위치한 카페에서 만나, 1층에 위치한 식당에서 맛있는 점심을 먹고 영화관으로 향했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영화관이 복병이었다. 멘티 친구는 다리에 보조기를 하고 있고, 오래 걷는 것과 계단 오르는 것이 어려운데 하필이면 그날따라 영화관의 엘레베이터가 망가져있었다. 결국 에스컬레이터를 통해 올라가게 되었는데, 다행히 좁은 엘레베이터라 양쪽 난간을 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내 기분은 영 좋지 않았다.
영화를 보고 나온 후 우리는 다시 한 번 카페를 찾았다. 아까 갔던 카페 말고 다른 곳이 가고 싶었다. 그래서 걷기 시작했다. 대형 프랜차이즈 카페의 계단 턱 세 개를 넘고 올라서고 보니 1층에는 자리가 없고 2층으로 올라가야 했다. 탈락. 다음 대형 프랜차이즈 카페의 계단 턱 네 개를 넘고 올라서고 보니 역시나 1층에는 자리가 없고 2층으로 가야 한다. 탈락.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하고 나니 아까 갔던 1층이 넓던 카페가 기억났다. 하지만 우리는 아까 그곳을 갔었다.
결국 장소를 바꿔서 아예 노래방에 가기로 했다. 그런데 노래방은 2층이었고, 올라가는 엘레베이터도 없을뿐더러 계단 난간도 지저분한 철 난간이었다. 멘티 친구는 연신 괜찮다고 말하며 계단을 올랐다. 나는 그 뒷모습을 보면서 속으로는 낙담하고 있었다. 이토록 우리가 갈 수 있는 곳이 없다니. 강남. 그 화려하고 멋진 거리에서 보행장애를 지닌 사람은 어디도 쉽게 들어갈 수 없었다.
사실 강남뿐만이 아니다. 한국 어디든 그렇다. 일 년 전 제주도에 엄마를 모시고 갔을 때, 제주도의 카페는 대개 2층에 자리가 있고 뷰가 예뻤다. 그렇다보니 엄마와 나는 억지로 난간을 붙잡고 힘겹게 계단을 올랐다. 사실 포기하고 1층에 있겠다면 감수하지 않아도 될 피로다. 하지만 왜? 보행장애인은 왜 멋진 뷰와 쾌적한 자리를 누릴 수 없는가?
우리가 만약 휠체어를 탔다면 억지로 계단을 올라간다는 선택지도 불가했을 것이다. 아마 강남에서도 어느 식당도 들어가지 못하고 문전박대 당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1층에 있는 카페도, 식당도 무조건 턱 하나, 둘은 있었으니까. 식당에 휠체어가 진입할 수 있는지 여부를 묻는 전화를 하면 가끔 가게 주인들은 선한 마음으로 대답한다.
우리가 들어드릴게요! 오세요!
하지만 장애인이 원하는 게 이런 걸까?
많은 사람들은 장애인에게 배려와 시혜를 베풀고자 하지만, 장애인이 독립적으로 생활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데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장애인이 지하철을 타고 내리는 방식의 개선이라든가, 탈시설화를 위해 장애인들을 자립적인 생활이 가능하게끔 환경을 조성한다든가 하는 것에는 몹시 부정적이다. 그것들은 사회적 비용이 너무 많이 들 뿐더러, 누군가는 격한 표현으로 대화가 아예 통하지 않는 중증자폐스펙트럼 장애인을 애물단지처럼 말하기도 한다. 일례로, 커뮤니티에 종종 올라오는 '최중증장애인, 어떻게 해야 해?' 같은, 정말 고민이 되어서 하는 말이야. 라고 하는 글들이 그렇다.
장애인권을 염려하는 듯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그렇게 시혜적인 복지를 '퍼줄 수' 없다는 것이 몇몇 사람들의 주장인데, 장애인권을 위해서 사용하는 사회비용, 그 복지는 장애인에게만 한정되고 전체적으로는 해악을 끼치는 행위임이 자명한 것일까? 정말 그럴까?
정답은 당연히 '아니다.'
그놈의 사회비용을 고리타분하게 읊어도 내 논리가 이긴다. 복지는 권리다. 단기간으로 보면 당연히 손해를 보는 기분이 들 수도 있겠으나 장기적으로는 사회 전체의 이득이 된다. 장애인 고용 환경이 좋아지면 생산가능 인구가 늘어나고 복지 지출도 따라서 줄어들게 된다. 지금처럼 고령화로 인해 나날이 노동 인구가 줄어드는 현 시점에서, 이는 정말 적극적으로 생각해봐야 할 부분이다. 장애인 고용 환경은 장애인에게만 한정되지 않는다. 고령화된 노인들에게도 해당될 것이며, 그들의 오랜 경험과 지식을 토대로 한 고급 노동력은 또다른 순환이 되어 나라의 이익이 된다.
장애인이 노동하고, 스스로의 '자립'이 가능해지면 시설 유지 비용과 장기 보호 비용이 줄어든다. 또한 장애인을 전담하고 케어하느라 그간 노동하지 못했던 노동력이 다시 시장에 복귀하여 일을 할 수 있다. 우리 사회는 고령화와 더불어 기대수명이 길어지고 있는 추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병든 몸이 최소한의 도움으로 스스로 자립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필수불가결한 사항이다.
결국 문제는 턱 하나, 계단 몇 개가 아니다. 이 사회가 장애인을 걸러내는 구조적 장치다. 비장애인은 쉽게 말한다. 들어드릴게요, 도와드릴게요. 하지만 장애인이, 질병인이 원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는 비장애인의 도움 없이도 독립적으로, 존엄하게 스스로를 지키며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원한다.
건물은 말이 없다. 하지만 턱 하나, 문 하나, 엘레베이터 하나 없는 그 구조가 조용히 말한다.
당신은 환영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나에 맞서 이렇게 말하고 싶다.
용인될 수 없는 건 내가 아니다.
용인될 수 없는 건 이해와 존중 없이 설계된 이 무지한 사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