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 지금 하신 말씀이 장애인 차별적 발언입니다.
실용음악학원에서 일을 할 때였다. 밤 열 시, 일을 마치고 선선한 바람에 기분 좋게 발걸음을 옮기며 집으로 돌아가던 내게 누군가 시선을 던졌다. 그 사람은 경악스러운 듯, 입을 벌리고 자전거를 멈춘 채 나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부지런히 걷던 나 역시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당시 스물다섯이던 나는 불쾌하게 나를 훑는 시선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대개는 내가 눈을 마주치고 바라보면 흠흠, 헛기침을 하며 아닌 척 고개를 돌렸는데 그녀는 달랐다. 여기서 나는 다음 단계로 돌입했다.
왜 쳐다보세요?
그녀는 왜 자신에게 그런 물음을 하는지 알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순진하고 선한 얼굴로 내게 물었다.
오른쪽 다리가 불편하세요?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화가 났다. 아니나 다를까 하는 생각이었다. 내가 다리가 불편해서 좀 이상하게 걷는다고 한들 누구한테 피해를 준 것도 아닌데, 왜 이런 시선을 받고 이런 말을 들어야 하지? 나는 끓어오르는 속을 꾹 누르며 최대한 정중하게 말했다.
그런 걸 물어보는 게 실례라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빠르게 쏘아붙인 나는 다시 내 갈길을 향해 등을 돌리고 당당하게 걸었다. 허리를 꼿곳이 펴고, 비틀거리거나 다리가 엇갈리지 않도록 신경쓰며 걸었다. 그러니까, '비장애인'처럼 보이기 위해 애를 쓰며 걸었다는 것이다. 그래보았자 어딘가 이상했을 것이다. 나는 잘 모르는 방식으로.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내 걸음을 내가 잘만 걷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타인의 한마디로 인해 나는 내가 오른쪽 다리가 이상한가? 생각하게 되었다. 그 순간부터 나는 똑바로 걸으려 의식적으로 애썼지만 온몸이 삐걱거리는 것 같았다. 내 스스로가 부끄럽고 우스꽝스럽단 생각이 들었다. 내게 자연스럽던 내 몸을 타인의 시선에 맞춰 검열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건널목에 서서 신호를 기다리는 나의 곁으로 여자가 따라와 다시 말을 걸었다.
도와주려고 그러는 거예요.
이 글을 다시 쓰면서도, 그때의 황당함이 생생하게 떠올라 심장이 두근거린다. 나는 앞서 여자에게 쏘아붙였을 때, 그녀가 부끄러움을 깨닫기를 바랬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녀는 도리어 나를 가엾이 여기고 있었다. 나는 그 순간 내가 도리어 수치스러움을 느꼈다. 나는 한국에서 내로라하는 큰 대학병원인 세브란스병원을 다니고 있지만 사실 난 선진의료를 접해본 적이 없나? 혹 이 사람 눈에는 내가 구석기인으로 보이나? 같은 현대를 살고 있지 않는 건가? 수치스러움은 참을 수 없는 분노가 되어 터졌다.
그러니까, 당신이 뭔데 날 돕냐고요.
왜 나는 이런 대화를 나눠야 하는 건지. 왜 내가 미개한 사람 취급을 받아야 하는 건지. 나는 이미 내 건강을 위해 노력하며 살고 있었다. 장담컨대 내 건강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 중 제일은 나다. 나 자신이다. 내 말을 듣고도 여자는 죄송합니다, 같은 사과는커녕 탄식하며 말했다.
아... 그렇구나...
신호가 떨어지고 나는 횡단보도를 빠르게 걸어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아니, 본인이 신이야 뭐야? 동시에 엄마를 생각했다. 파킨슨병이 생기고 난 후로 엄마는 사람들이 자신을 비웃고 무시한다며 속상해했다. 나는 그때마다 엄마의 편을 들며 그들이 나쁜 거라 말했다. 혹 엄마도 이런 황당한 일을 겪었을까? 그녀가 나에게 한 일은 친절이나 배려 따위가 아니었다. 그건 무시와 조롱을 넘어선 '약자 멸시'였다.
사실, 내가 이런 '말 걸림'을 겪은 것은 처음이 아니다. 이미 그녀 이전에 많은 이들이 나의 계몽을 시도했다. 아르바이트처에서 만난 누군가는 나에게 구체적인 지명을 언급하며 그곳에서 기적처럼 일어나 걸은 사례를 이야기해주었고, 어르신들은 내게 도라지나 산삼 같은 걸 꾸준히 달여 먹으라고 했다.
그 앞에서 나는 선의로 해주는 말씀이시니 그냥 하하 웃었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굳이 분위기를 나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새로운 가르침에 불편해하는 건 장애인 당사자인 나뿐이었다. 하지만 선의는 어디까지나 선의(善意)일 뿐, 의료(醫療)가 되지 못한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선의가 사람 잡는다는 걸 도대체 사람들은 얼마나 더 무례해져야 알 수 있을까.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정색'이 필요하다고. 이런 말은 사회성이 부족해보일 수 있다. 아니 좋은 마음에 지나가면서 한마디씩 얹는 거, 그게 뭐라고 그렇게 정색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냐? 하지만 사람들은 알아야 한다. 장애를 개선시키고 싶은 의지가 가장 강한 사람은 장애인이지 지나가다가 말 얹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날 나는 돌아가 속상한 마음을 친구에게 말했고, 친구는 아무래도 그녀가 사이비인 것 같았다고 했다. 그 말을 들으니 더 기가 찼다. 정말 신이 다시 와서 나를 본다면, 아마 이렇게 말할 것이다. "너는 나의 계획으로 만들어졌으며, 너는 지금의 너 자체로 온전히 완전한 사람이다." 나의 병과 장애는 내게 내려진 시련이나 벌 같은 게 아니다. 그냥 나라는 사람을 이루고 있는 정체성일 뿐이다.
집에서 차 마시면서 느긋하게 자신의 루틴에 맞춰 살아가는 사람 집 문을 지렛대로 뜯어 열면서 "도와줄게요!"하면 좋아할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밀어주겠다며 불쑥 휠체어를 밀거나, 도와주겠다며 시각장애인의 지팡이를 뺏고 팔짱을 끼는 일뿐만 아니라 그냥 자기 방식대로 길 잘 걷는 사람한테 다가가서 갑자기 어부바 해줄게요! 등 내미는 것도 무례한 일이다.
최근에는 그래도 장애인식개선교육이 많이 진행되고 있고, 또 여러 매체들을 통해 장애인을 알아가면서 무례한 사람들은 많이 줄어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누군가는 질병인 혹은 장애인을 자신의 잣대로 계몽하려 든다. 이들 스스로 부끄러움을 깨닫고 자신의 삶을 먼저 돌아보았으면 좋겠다.
이제는 그들이 스스로 질문해야 할 차례다.
당신이 누구를 위한다는 그 말은, 정말 그 사람을 위한 것이었는가?
당신의 친절은 그 사람의 삶에 꼭 필요했던 것이었는가?
내가 바라는 건 거창한 변화가 아니다.
그저 누군가의 몸과 삶 앞에서 침묵할 줄 아는 사람이 조금 더 많아졌으면 한다.
그것은 곧 "수용"을 의미한다.
받아들일 수 없으니까 삿대질하고 싶고 참견질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러니 제발 누군가의 인생에 무단 침입하기 전에 한 번쯤 생각해보길.
그 말, 지금 필요한 말이었나요?
그 눈빛, 지금 건네야 했던 것이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