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스템 없는 배려는 "노 땡큐" 입니다

9-1. 누구의 도움이 아니라, 모두의 접근성을

by 지지

선선한 밤이었다. 우리는 창덕궁 별빛야행 프로그램에 참여해 기분좋은 나들이를 마쳤고, 이제 인천으로 돌아가야 했다. 1호선을 타면 환승 없이 바로 돌아갈 수 있었으므로 우리는 밤길을 조금 걸어 종로3가역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그곳에서 30분을 헤매며 속을 앓아야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1호선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여러 개였는데, 엘레베이터는 하나뿐이고, 그 엘레베이터가 도무지 어디 있는지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마치 개미굴에 들어왔다가 길을 잃어버린 것처럼 우리는 표지판을 찾아 눈을 열심히 굴렸다. 장애인 표시가 보여서 그곳으로 가보기도 했다. 그런데 장애인과 관련된 것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왜 표지판을 놓은 것인지?) 그렇게 헤매던 중 마찬가지로 우리처럼 계단 앞에 멈춰 서서 어쩔 줄 몰라하는 할아버지도 발견했다. RPG 게임에서 동료를 추가하듯 나와 엄마는 할아버지도 함께 모시고 길을 찾아 걸었다.


결국 엘레베이터를 찾았으나 할아버지는 귀가 어두우셨다. 목적지가 어디냐고 물어도 잘 모르시는 듯 하여 마침 역 내에 들어와있던 경찰에게 할아버지를 부탁하고 우리는 겨우 엘레베이터에 탔다. 이리저리 헤매며 걸어다니느라 지친 것은 물론이요, 기분도 좋지 않았다. 지나치게 비장애인/비질병인 중심적인 환경 앞에서 나는 또다시 내 몸을 원망하게 되었다. 내가 건강했다면. 길을 헤매며 여러 개의 계단을 지나치며 억울하고 화가 나는 마음을 가라앉히기 어려웠다.


본격적으로 지하철에 엘레베이터가 설치되기 시작한 것은 얼마되지 않았다. 2001년 오이도역에서 휠체어 리프트를 이용하던 장애인 노부부가 추락하였다. 리프트는 작동 중 갑자기 멈추었고 역무원이 수동 조작 방식으로 리프트를 움직이려던 중 두 부부는 6M 아래로 수직 추락했다.


이때 남편은 의식 불명이 되었고, 아내는 치료를 받던 중 끝내 사망하고 말았다. 그 사이 철도청과 관계부처들은 할머니가 사망하기 까지 9시간 동안 사고 사실을 신고 혹은 보고조차 하지 않았으며 그 사이 사고현장을 수습해서 사고원인 규명을 어렵게 만들어 버렸다.


결국 이 사건은 언론에 보도되며 사회적으로 큰 충격을 주었다. 장애인계에서는 "이동권은 생존권"이라는 슬로건 아래 지하철 엘레베이터 설치 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기 시작했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엘레베이터 대신 휠체어 리프트가 많았다. 정부나 기관의 입장은 이러했다. 경사나 건물의 여건을 따져보았을 때 엘레베이터 설치가 도무지 어렵다는 것이다.


사실, 엘레베이터 설치의 논의는 처음 지하철을 공사할 때부터 했어야 했다. 장애인과 노약자를 이용고객으로 보지 않고, 그들의 이동권에 대해서 염두에 두지 않았기 때문에 "휠체어? 도와주면 되지!" 하는 생각으로 휠체어 리프트를 설치한 것이다.


이런 식으로 에이블리즘 사상을 지닌 비장애인들은 장애인이 겪는 어려움에 대해 시혜적인 태도로 "배려"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동권은 생존권"이라는 슬로건처럼, 장애인은 그저 생존하고 싶다. 비장애인이 주어진 환경에서 편의를 누리듯, 장애인 역시 주어진 환경에서 역경이 아닌 편의를 누리며 스스로 살고 싶을 뿐이다.


장애를 바라보는 관점에는 여러 다양한 관점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은 첫 번째 "질병적 관점"이다. 이른 바 의료 모델이라고 불리는 이 개념은 장애를 개인의 결함과 기능저하로 보고, 신체적 혹은 정신적 손상에 초점을 맞추며 이를 치료하거나 교정해야 할 대상으로 본다. 그렇기 때문에 이 관점에서 장애는 사회의 문제라기보다는 개인의 문제로 축소되며, 에이블리즘의 근거가 된다. 그들이 보는 장애인의 삶은 수동적이고 비정상적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이렇다. 휠체어를 탄 장애인에게 "힘내세요. 언젠가는 꼭 걸으실 수 있을 거예요!" 격려하거나, 영구손상을 입은 시력장애인에게 "기적이 일어나길 기도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장애를 질병적 관점에서 보기 때문에 나오는 에이블리즘적 태도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안타깝다며 위로하다가도 이는 사회의 문제가 아닌 개인의 문제이므로 개인이 알아서 "극복"해내야 한다. 이 관점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몇몇 소수 장애인을 예시로 들며 "그 장애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해냈다."고 말한다.


나는 중학생이 되기 전까지 질병적 관점 이외에 다른 관점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장애인식개선 교육에서도 질병적 관점을 들어 안타까운 사람들이니 차별해서는 안 된다고 교육하던 2000년대였다. 당사자인 나도 얼른 노력해서 내 걸음걸이나 배변장애 같은 걸 극복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살았다. 그러나? 세상에는 극복할 수 없는 게 있다. 그게 장애다. 그럼? 난 계속 누군가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야 하는가? 자립할 수 없는가?


나는 장애를 환경적 관점과 문화적 관점으로 본다.


환경적 관점, 즉 사회 모델은 장애는 개인의 몸이 아니라 사회적/물리적 환경이 만든 차별의 결과라고 주장한다. 즉, 장애는 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몸을 수용하지 못하는 사회구조에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장애는 사회의 문제이며 함께 개선해나가야 할 문제이다. 예컨대 앞서 말한 지하철을 생각해보자. 지하철이 애초에 장애인도 탑승할 수 있도록 경사로와 엘레베이터를 잘 정비해두었더라면? 장애가 문제가 되었을까? 아니,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문화적 관점 즉 정체성 모델도 비슷하다. 장애를 단순히 결핍으로 보는 것이 아닌 하나의 정체성, 사회적/문화적 다양성의 일부로 바라보는 관점이다. 이 관점은 장애를 수용한다는 점에서 개인의 자존감 회복을 돕고 사회적 발화를 할 수 있게 하는 힘이 된다. 장애인이 스스로를 "나는 장애인이다"라고 선언할 수 있는 힘. 그리고 장애문학과 장애예술을 통해 그들만의 세계를 구축하는 것. 그것이 문화적 관점이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누군가는 말한다. 장애를 사회 문제로 보는 것은 너무 비효율적이고 고비용이 따르기 때문에 수용할 수 없다고. 장애인이 스스로를 긍정하는 것은 좋은 일이나 비장애인이 그를 이해하거나 접촉해야 할 이유는 없다고. 하지만 생각해보라. 만들어진 엘레베이터나 저상버스를 누가 가장 잘 이용하고 있는가? 장애인뿐만이 아니다. 교통약자를 비롯한 비장애인 모두가 그 혜택을 누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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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부터미널의 지하철 엘레베이터 안내문이다. 누군가가 장애인 전용이라는 말 옆에 볼펜으로 노약자를 써두었다. 아마 나이가 있으신 어르신이 아니었을까? 장애인 전용이라는 말이 교통약자의 범위를 축소시키고 있어 불편함을 느끼셔서 이렇게 글을 쓰신 게 아닐까 생각한다. 이렇게 공감하면서도 나는 다른 한편으로는 전장연의 시위를 부정적으로 보는 몇몇 비장애인들을 떠올리며 속이 쓰렸다.


장애인을 위해 시작한 복지라고 해서, 그것이 꼭 장애인만 누려야 하는 복지인 것은 아니다. 장애인을 대상으로 한 복지는 질병을 가진 이들에게도, 나이가 들어 노쇠한 이들에게도, 갑작스런 부상으로 일시적인 질병 혹은 장애를 겪게 된 이들에게도 유용하다. 결국 모두를 위한 복지다. 하지만 사회는 복지를 감당할 여력이 안 된다며 개인에게 돌봄과 책임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 그 바람에 약자들은 한정된 복지 안에서 서로를 헐뜯고 싸우기도 한다. 정말 싸워야 하는 대상은 서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약자들을 서로 대립하게 만들고 단합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정말이지 악랄한 전략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본질을 바라봐야 한다. 대립 아닌 연대로, 분열이 아니라 함께 나아가야 한다. 인권은 파이 싸움이 아니다. 누구의 몫을 빼앗아야만 얻는 것이 아니라 함께 누릴 수 있도록 보장되어야 할 가장 기본적인 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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