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한 집이 대학가 근처다 보니 주머니 사정이 얇은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길거리 음식점들이 꽤 많았다.
컵밥이나 토스트 같이 간편히 먹을 수 있지만 영양은 포기해야 하는 음식들.
하루는 컵밥, 하루는 토스트, 하루는 삼각김밥.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삶을 놓았던 시기였던지라 딱히 뭐가 됐든 상관없었다. 위에 음식이 들어온다는 신호만 느끼면 될 뿐. 2, 3천 원짜리 음식들은 단짠의 조합이지만 나에겐 어떤 맛도 느껴지질 않았다. 미각을 잃는다는 게 이런 걸까...
약을 먹으려면 밥을 잘 챙겨 먹고 푹 쉬라는 의사의 처방과는 달리 제대로 된 음식을 먹을 수가 없었다. 만사가 귀찮고 내 안에 화가 가득 차 있는 마당에 뭘 할 수 있겠나.
그나마 사다 먹던 컵밥 같은 음식들도 소화가 잘 되지 않아서 다른 대안을 찾아야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배달앱이 발달한 좋은 나라에 살다 보니 아무리 살기 싫어도 굶어 죽긴 힘들다. 배달앱으로 죽 배달이 되길래 한 번에 몇 통씩 주문하고 냉장고에 쌓아놓은 채 먹었다.
나는 대체 살고 싶은 걸까, 죽고 싶은 걸까? 인생 참... 뭐 같다.
낮이건 밤이건 침대에 우두커니 웅크리고 앉아있거나 누워만 있는데 세상의 소리가 너무 시끄러웠다.
신경이 극도로 예민해지다 보니 내 귀는 어린 시절에 즐겨 봤던 미국 드라마의 주인공인 바이오닉 인간 '소머즈' 급이었다.
윗집, 옆집, 아랫집. 그들이 만들어내는 소리가 나에게는 아스팔트 도로포장 공사 소음처럼 너무 날카롭고 시끄럽게 들렸다. 온갖 신경증이 다 생길 것 같았다.
윗집 마룻바닥을 걷는 소리가 일부러 발꿈치로 찍으며 걷는 듯 쿵쾅쿵쾅 들리고, 윗집, 옆집 핸드폰 진동이 드릴로 벽을 뚫는 듯 집안 전체를 울리는 것 같고, 맞은편 집의 끝도 없는 개 짖는 소리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예전 같았으면 들리는지도 몰랐을 소리들이다.
모든 것이 잘못되어가고 있다.
정말 생의 끈을 놓을 심산이 아니라면, 어찌 됐든 나는 나를 한 번은 깨부숴야 한다.
아주 오랜만에 암막커튼을 젖히자 오후의 햇살이 꽤 강하게 들어왔다. 침대 머리맡으로 들어오는 햇살을 멍하니 바라봤다.
나에게는 바깥공기가 필요하단 생각이 문득 든다.
대충 배 채울 음식을 사러 하루에 한 번 나가는 것 말고는 외출이 전혀 없었다. 그마저도 배달앱을 사용하기 시작하자 현관문 밖으로 나갈 일이 전혀 없었다. 억지로라도 몸을 움직여야 한다는 생각에 나름의 룰을 하나 정했다.
집 근처 대학교 교정 안에 있는 커피를 마시러 가자.
내가 목표로 한 가게는 대학 교정을 한참 들어가야 나온다. 언덕배기 하나 넘듯 꽤 경사진 코스로 왕복 30분 정도 걷기라면 적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더라도 일단 해가 뜨면 그 가게를 향해 걸었다.
후줄근한 몰골일지언정 모자 하나 눌러쓰고 무작정 걸었다.
가는 길에 운동장이 하나 있었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20대 청춘들의 활기가 나의 온몸에 내리 꽂혔다. 학생들은 각자가 좋아하는 운동에 흠뻑 빠져 있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뛰고 구르고, 에너지를 쏟아내면서 또 충전하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이내 벤치에 앉아서 한참을 바라봤다.
자기 쪽으로 패스하라는 다급한 손짓들. 운동장 가득 울려 퍼지는 그들의 외침과 웃음소리가 듣기 좋다.
그들이 뿜어내는 활기, 그 생기가 나에게도 에너지가 되어 주었다.
커피는 기대 이상으로 꽤 매력적인 보상이었다.
매일 해야 할 나름의 숙제가 생기고 생각지 못한 에너지를 얻으면서 조금씩 내 인생의 안개가 걷히는 것 같았다. 한발 정도는 내디딘 느낌이다.
배달앱으로 주문하던 죽 대신 다른 음식을 먹어야겠다는 생각에 우선 어플을 지웠다.
길거리 음식도 더 이상은 먹지 말아야지.
근데 뭘 먹어야 할까...
정처 없이 우선 집 근처에 어떤 가게들이 있나 탐방에 나섰다. 사실 탐방을 핑계로 좀 걷다 보면 배도 고파지고 뭘 먹든 맛있게 먹겠지란 생각으로 나선 길이었다.
딱히 이렇다 할 음식을 발견하진 못해서 동네 맛집을 검색하자 여러 음식점이 나왔다. 그중에서 가격 대비 가성비가 좋다는 연어덮밥집을 선택했다. 가게는 그리 크지 않았는데 집에 오갈 때 수시로 지나쳤지만 들어가 볼 생각은 안 했던 가게였다. 워낙 가게가 자주 바뀌던 자리였던지라 맛집이 들어와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전에는 구슬 아이스크림 가게였는데...
큰 기대 없이 연어덮밥을 포장 주문했다. 따뜻한 국물을 플라스틱 통에 넣어줬는데 찌개든 국이든 끓여 먹을 일이 없던 나에게는 이상하게도 특별할 것 하나 없는 그 일본식 된장 국물이 마음에 들었다. 그 후로 그 가게를 종종 가게 되었다.
여느 때처럼 덮밥 가게를 향하는데 가게 앞에서 한 남성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손에 담배를 끼운 채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는 모습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좀 떨어진 데서 피우지 왜 문 앞에서...
포장 주문을 하고 기다리는데 때마침 담배를 다 태운 남성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손님이었나? 그런데 그 남성이 곧장 카운터를 지나 주방으로 들어갔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계속 쳐다봤는데 역시나 그 가게의 주방장이었다. 오픈식 주방이었기 때문에 주방장의 행동 하나하나에 눈길이 꽂혔다.
아뿔싸, 남성이 맨손으로 연어를 손질한다.
담배 피우던 손으로 바로 연어를...
요리사가 비흡연자일 필요는 없지만 담배 피우던 그 손 그대로 생선살을 만지는 걸 보고 있자니 당혹감이 밀려왔다. 너무 당황해서 뭐라고 항의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하아...
이게 내 밥이라고??
집으로 돌아와 포장용기 안에 들어있는 연어를 한참 동안 바라봤다.
문득 그 가게뿐만 아니라 모든 음식점들의 위생상태에 대해 의심이 들었다.
내가 지금까지 밖에서 뭘 먹고 다녔던 거지?
뒤통수를 정말 세게 얻어맞은 듯하다. 머리가 얼얼할 정도로 울린다.
회사를 다닐 때는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몸이 피곤하다는 핑계로 밖에서 그런 음식들을 사 먹었다. 심지어 그 단짠의 맛에 길들여졌다. 내가 원래 어떤 맛을 좋아했는지, 어떤 맛을 원하는지 조차 모를 지경이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퇴사를 해야 할지도 모를 정도로 아픈 몸 상태로 병가를 내고 집에만 있는데 계속 그렇게 먹어선 안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예전에 버렸던 어머니가 해주신 국이며 반찬들이 하나씩 머리를 스쳐 지나간다.
이런 음식을 먹자고 그 국을 버렸다니...
다음날부터 나에게는 또 다른 숙제가 하나 더 생겼다.
뭐가 됐든 내가 해 먹자.
왜 사니? 이따위로 꾸역꾸역 배 채우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