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속, 도시를 걷다

일곱 번째 틈

by 귀리


발 아래에는 우리가 모르는 또 다른 세계가 있다. 도시는 수평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단단한 흙과 콘크리트가 모든 것을 차단한다고 믿지만, 그곳은 살아 있는 도시다. 거미줄처럼 얽힌 길들이 비밀스러운 네트워크를 이루고, 수많은 생명들이 저마다의 법칙으로 살아간다. 그 길은 어둠 속에서 이어지고, 때로는 살아 있는 것처럼 숨을 쉰다.

상상한다. 땅속으로 내려가는 여행을.
지하철이 달리는 어둠의 터널, 버려진 기계실의 숨결, 물결 아래 잠든 강바닥의 길, 파리 카타콤의 무덤 회랑… 두더지의 굴, 여우의 집, 거대한 수도관까지, 모두 한 장의 지도 위에서 연결된다.
그것들을 보고 싶다. 눈으로 확인하고, 손끝으로 만지고, 소리를 듣고 싶다.
쥘 베른이 지구의 심장부를 향해 갔던 것처럼, 상상 속에서는 어디든 갈 수 있다.

한 계단, 한 걸음씩. 발밑으로.
땅 아래로 발을 내딛는 순간, 비밀의 문이 열린다.



발 아래 도시

#지하_주차장

문을 연다. 공기가 변한다. 서늘함이 얼굴을 스친다. 가을 아침의 공기가 틈을 비집고 들어온다. 아직 여름옷을 입은 당신은 몸을 살짝 떤다.
차가운 콘크리트 냄새 오래된 먼지의 맛이 공기에 배어 있다. 천장의 형광등은 희미하게 깜빡이며, 전류가 스치는 소리를 낸다.
줄지어 선 차들은 잠들어 있다. 엔진은 꺼졌고, 금속이 남긴 열기가 공기 속에 옅게 퍼져 있다. 그러나 그 온기마저 서서히 사라진다.

정적을 깨는 소리.
타이어가 바닥을 스친다.
차 한 대가 천천히 들어온다. 주차할 자리를 찾으며 공간을 한 바퀴 돈다.
‘끼이익…’ 미끄러지며 바닥을 긁는 소리, 브레이크가 짧게 떨며 숨을 고른다.
문이 열린다. ‘찰칵.’ 닫힌다. ‘쾅.’ 경보음이 짧게 울린다. ‘삑.’
발자국이 메아리처럼 퍼진다. 또각, 또각. 자동문이 열리며 ‘지이이잉.’ 소리들이 서로 부딪혀 튀어 오른다.

그리고 다시, 정적.
바닥에 물웅덩이가 형광등 빛을 받아 흔들린다. 누군가 남긴 흔적일까? 발자국은 없다.

그때, 벽 너머에서 소리가 들린다.
쿵… 쿵…
규칙적인 박동. 기계음일까? 그러나 너무 느리다.
당신은 귀를 기울인다. 소리는 주차장의 끝에서 울린다. 그곳에 문이 있다. 회색 철문, ‘관계자 외 출입 금지.’
손을 뻗는다. 금속 손잡이가 차갑다. 틈새에서 바람이 나온다.
문이 열린다.


#기계실
기계실 안은 좁고 복잡하다. 벽을 따라 수많은 파이프가 달리고, 붉은 밸브가 매달려 있다. 머리 위로 두꺼운 전선이 얽혀 지나간다.
낮고 묵직한 기계음이 공기를 흔든다. 발바닥에서, 뼛속까지 전해지는 진동. 도시 전체가 숨 쉬는 것 같다.
녹슨 파이프에서 물방울이 똑, 똑 떨어진다. 금속과 기름 냄새가 공기를 채운다.

손전등을 켠다. 빛이 벽을 훑는다. 오래된 경고문, 지워진 낙서, 먼지 쌓인 계기판의 침묵.
파이프에서 바람 소리가 난다.
‘쉬이…’
바람일까, 아니면 숨소리일까?
손을 댄다. 금속은 차갑지만 안쪽은 뜨겁다. 그 속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린다. 물의 흐름일까,

아니면—

진동이 커진다.
갑자기, 기계음이 멈춘다.
정적. 숨조차 멈춘 것처럼 느껴진다.
등 뒤에서 ‘찰칵.’
잠금장치가 내려간다.


#지하철_터널

계단을 내려간다. 벽에는 오래된 광고 포스터가 찢겨 붙어 있고, 비상구 표지판이 희미하게 빛난다.
터널 안 공기가 바뀐다. 먼지, 기름, 오래된 전기 냄새가 섞인다. 발소리가 콘크리트 벽에 부딪혀 메아리친다. 발바닥이 차가운 바닥과 닿을 때마다 진동이 손끝까지 스며든다.

플랫폼은 비어 있다. 전광판 불빛은 꺼져 있고, 간간이 한 칸씩 희미하게 빛난다.
전깃불이 간헐적으로 깜빡인다. 터널은 과거의 복도처럼 느껴진다. 발소리가 시간을 거슬러, 예전의 나와 겹쳐질 것 같다. 빛의 깜빡임 속에서 벽을 타고 진동이 울려온다. 바람이 스치며 목덜미를 스친다. 열차가 다가오고, 빛이 점점 가까워진다. 그러나 열차는 멈추지 않는다. 플랫폼을 스치며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그 순간, 플랫폼 건너편에서 당신과 누군가의 눈이 마주친다. 흐릿한 윤곽.
환영일까. 아니면 이곳을 스쳐 지나간 '당신'의 잔영일까. 손끝에 남는 미세한 전류처럼, 긴장이 온몸을 스친다.

열차가 사라지고, 다시 정적이 터널을 채운다. 낮 동안의 소란스러움 위에 침묵이 내려앉는다.
잊힌 기억과 이야기들, 시간의 조각들이 철로 위를 맴돈다. 이곳은 시간이 담긴 길이다. 발밑 바닥의 차가움, 손끝으로 느껴지는 금속의 차가움, 공기 속에서 스치는 먼지와 바람의 감촉까지, 모든 감각이 지금 이 순간을 기록한다.

플랫폼 끝에는 또 다른 문이 있다. 문틈으로 냉기가 스며 나온다.


#수도관과_가스관

안쪽은 낮고 좁다. 머리 위 파이프가 촘촘히 이어져 있고, 벽에는 차가운 물기가 맺혀 있다. 발밑 물웅덩이가 손전등 빛을 반사한다.

물방울이 똑, 똑 떨어지는 소리 사이로 규칙적인 울림이 들린다.
쿵… 쿵…
도시의 심장 소리 같다.

당신은 파이프를 따라간다. 손끝에 닿는 금속 감촉, 안쪽에서 전해지는 열기.
이 파이프는 물을 옮길까, 가스를 옮길까, 아니면 도시의 피를 옮길까.

그때, 낮은 진동과 함께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 속삭임처럼 퍼진다.
‘…여기…’
발걸음을 멈춘다. 손전등 빛이 벽을 훑는다. 낡은 경고문, 지워진 계기판, 녹슨 철문.
벽 너머 세상을 상상하며 문을 연다. 흙냄새가 쏟아진다.


#땅속_생명의_네트워크

흙. 그리고 어둠. 통로는 낮고, 땅은 부드럽다. 뿌리가 흙벽을 뚫고 깊숙이 뻗어 서로를 감싼다. 땅속의 나무들은 보이지 않는 손을 맞잡고, 작은 뿌리들이 엉켜 거대한 그물망을 짠다.
잠들어 있는 씨앗은 봄을 기다리며 미세한 숨을 고르고, 감자나 고구마 같은 열매는 이곳에서 자라며 조용히 생명을 저장한다. 식물의 세계는 어둠 속에서 움직인다. 느리고, 그러나 확실하게.

그 옆으로 또 다른 길이 이어진다. 손전등 빛이 닿는 곳마다 작은 구멍들이 뚫려 있다. 두더지의 굴, 여우의 통로, 뱀의 길. 서로 연결된 미로가 땅속의 또 다른 도시를 만든다. 이 길들은 만난 적 없는 존재들을 이어 주는 보이지 않는 동맥이다.
흙바닥에는 발자국이 남아 있다. 흙을 긁은 자국, 털이 스친 흔적. 당신은 그 위를 조심스레 밟으며 더 깊이 들어간다.

그때, 빛이 닿은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점들.
눈이다.
하나, 둘, 셋… 곧 수십 개. 작은 생명들이 숨을 고르며 당신을 본다. 두더지의 집을 지나고 있는 모양이다. 여기는 땅속 존재들의 거실. 그들의 경계를 넘지 않도록 발끝을 세운다.

하지만, 무언가가 움직인다. 발밑이 흔들린다.
어둠 아래에서 거대한 것이 기어가는 소리.
그리고 다시, 그 소리가 들린다.
쿵… 쿵…
도시의 심장일까, 아니면 땅의 심장일까.


#땅_속과_빛

완전한 어둠. 시계에서 나오는 약한 빛조차 없다면, 이곳은 금세 깜깜해진다. 가끔 돌에서 나오는 은은한 빛이 희미하게 퍼진다.
동물들의 길 옆으로 수도관과 가스관이 모세혈관처럼 땅 밑을 흐른다.

이 땅은 놀랄 만큼 쾌적하다. 냄새와 촉감에 집중한다. 축축하고 편안한 감각이 온몸을 감싼다. 지상으로 돌아가더라도 쉽게 사라지지 않을 깊은 냄새다.
온도는 사계절 거의 일정하다. 흙이 단열재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1m 아래 6도, 3m 15도, 5m 17도. 조금 더 내려가면 21도, 사람에게 가장 쾌적한 온도다.

문득 궁금해진다. 이 땅은 언제부터 존재했을까. 퇴적과 융기, 비와 물, 동물들의 길. 지상 환경이 변했듯, 땅속도 끊임없이 바뀌었을 것이다.
얼마나 오랜 삶을 살았을까. 삶이라는 단어조차 무의미할 만큼 오래된 연대기. 흙과 돌, 부유물이 단단히 압축되어 하나가 된다.
나무의 나이테처럼 켜켜이 쌓인 지층을 따라 땅속을 가로지른다.

당신은 완벽한 이방인으로, 땅속 생명들의 바운더리를 피해 탐험한다. 머리 위 세상을 떠올린다.
지하철 위를 흐르는 강물, 겨울잠 자는 뱀 위를 누비는 개구리, 암석층 위의 집, 지하세계 위를 걷는 사람들.
지상과 지하, 두 세계가 동시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몸으로 느낀다.

커다란 벽과 마주한다. 벽을 통과하자, 눈이 부시다. 절대적 어둠에서 빛의 세계로.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야생 속에 있었는데, 사방이 흰 벽으로 둘러싸인 공간은 깔끔하게 정제되어 있다. 공기와 습도, 빛과 소리까지 계획된 완전무결함.
이곳은 젊은 작가의 개인전. 작품 하나하나를 동선에 따라 관람한다. 끝에 다다르면 어딘가로 가야 할 것만 같다.

발밑, 귀, 손끝의 감각이 여전히 땅속의 경험과 맞닿아 있다. 벽과 바닥, 조명과 공기 속에서도 땅속의 박동이 잔향처럼 느껴진다.
좀 더 머물러 전시의 여운을 느낄 빈 여백이 아쉽다. 밖으로 나선다.



빛으로 돌아오다

당신은 갤러리를 빠져나와 계단을 찾는다. 흰 벽에 둘러싸인 긴 복도를 따라가면, 비상구 표지판이 나타난다. 초록빛 화살표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금속 계단이 시작된다.
발소리가 울린다. 철제 계단을 한 발씩 오를 때마다 공기가 바뀌고, 약간의 흙냄새가 섞인다. 인공조명이 자연광으로 바뀌며, 바람의 기척이 스친다.

문 앞에 도착한다. 회색 철문, 틈으로 햇빛이 스며든다. 손잡이를 잡는다.
문을 열자, 세상이 폭발하듯 눈앞에 쏟아진다. 햇빛, 공기, 소리. 차가 지나가고, 자전거가 벨을 울리고, 누군가 통화를 하며 웃는다. 커피 향, 매연, 갓 구운 빵 냄새가 뒤엉킨 도시의 공기. 익숙하지만, 전혀 다른 층위에서 다가온다.

당신은 잠시 발을 멈춘다. 도시가 낯설다.
방금 전까지 머물렀던 땅속의 질서와 대비되는 이곳은 지나치게 개방적이고, 빠르고, 산만하다.
그러나 그 소란 너머, 여전히 지하에서 들었던 소리가 맥박처럼 깔려 있다.
쿵… 쿵…

그때 당신은 깨닫는다.
도시는 평면이 아니다. 위와 아래, 겹겹의 층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생명체. 그 심장은 땅속에서 뛴다. 그리고 그 리듬은, 묘하게 당신의 심장과 박자에 맞물린다.

햇빛이 얼굴을 스친다. 눈이 시다.
당신은 다시 걷는다.
발아래, 아직 끝나지 않은 길이 있다.
언젠가 또 다른 문이 열릴 것이다.
그 문 너머, 또 다른 어둠. 그리고 그 어둠 끝의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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