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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리 Feb 04. 2022

장소에 관한 이야기를 낚다

허공에 낚싯대를 던지면 뭐가 낚일까? _ BGM # Zero7 | The Space Between


나는 낚는다.

장소 위에 표표히 떠다니는 이야기들을.

발 밑에 흘러가는 장소들의 사연을.

사람들의 발자국이 남기고 간 일상의 끝자락을.

사람과 사람 사이 공기 속에 스며있는 분위기를.

이미 이곳을 거쳐간 역사들을.

공기 중에 부유하는 아직 실현되지 않은 미래를.


하늘을 향해

길 모퉁이를 향해

이름 모를 곳을 향해

때론 모두가 아는 장소를 향해

여기도 저기도 아닌 어딘가의 사이를 향해

낚싯대를 휘이이익 던진다.

우아한 곡선을 그리며 장소들 사이에 착지해

자리를 잡고는 레이더를 작동시킨다.

무엇이 걸릴까 예측할 수 없는 미지의 세계가 저기에 있다.



장소 위에 떠다니는 이야기들을 건져 올려 나의 눈과 손과 발과 피부에 포착된 감각과 생각들을 글로 풀어내고 싶다.

뭔가 재미있는 걸 발견하면 좋을 텐데.

그것도 날 것의 매력이 느껴지는.

예기치 못한 장소에 숨어있는 뭔가를.


감각에 대한 생각을 하다가 문득 이런 의문이 들었다. 사람들이 느끼는 감각의 세계가 나와 얼마나 일치할까? 공통분모가 있을까?

개인의 성격에서부터 신체적인 특성, 마주하는 순간들까지 모두 다른데 같은 것을 바라는 것은 모순일 것이다.

그럼에도 감각을 풀어내는 말과 글은 그 개별성과는 다르게 일반화되는 경향이 있다. 너무 다양해서 분류하고자 했던 것이 사람들의 특별함을 꺾이게 한 건 아닐까 생각했다. 우리는 모두 자기만의 감각을 갖고 있지만, 단지 표현에 서툴고 시도하는 게 어색할 뿐인지도 모른다.

그 특별함을 나만의 방식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오늘 날씨 맑음. 오호츠크해로부터 불어온 바람이 시원하다. 탐험하기 딱 그만인 날씨다. 집에서 나와 무작정 걸었다. 목적지를 정하지 않는 자유도 좋다. 가끔은 ‘오늘은 몇 시간을 걸어볼까?’하고 도시를 정처 없이 걸을 때가 있다. 쉬지 않고 4시간을 걸으면 2만 보 정도가 되려나? 걷는 행위에만 집중하다 보면 머릿속이 단순해져 걸음을 멈출 수가 없게 될 때가 많다.

그렇게 한참을 걷고 있는데 며칠 전 새로운 글쓰기 방식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다. 책상 앞에 앉아 글을 쓰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글이라는 게 어딘가에 자리를 잡고 앉아 써야 하나? 어차피 정해져 있는 게 아니라면 걸으면서 글을 써보는 건 어때? 와이 낫!

그렇게 시작된 무계획적인 탐험과 글쓰기가 어느새 나도 모르는 사이 시작되고 있었다. 목적지 없이 내딛는 발걸음으로부터 그렇게. 걷다가 뭔가 떠오르면 멈춰 서서 생각나는 문장들을 스마트폰에 짤막하게 기록했다. 그리곤 다시 걷기를 이어나갔다. 머릿속은 걷는 행위와 상관없는 듯 보이지만 그 리듬에 맞춰 생각에 잠겨있다 보면 어느새 생각이 입안에서 우물우물 굴러다니다가 단어로, 문장으로 떠오르게 된다. 걷는 리듬은 머릿속에 펼쳐지는 세계의 환경을 바꿔준다. 생각에 발이라도 달린 것처럼 표류하던 조각난 생각들이 어느새 모여들어 하나의 강한 생각으로 짜 맞춰진다. 그러면 다시 멈춰 서서 스마트폰의 메모장을 꺼내 자판을 두드리며 단어를 선택하고 생각의 순서를 맞추며 문장을 만들어낸다.

머릿속에 하나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도시 방랑자의 탐험을 그린 로드무비 속 주인공을 상상해 보았다. 처음엔 어색해도 반복하다 보면 그 역할에 스며들겠지.


또 다른 날. 날씨 흐림. 비가 한바탕 쏟아질 것처럼 하늘이 어둡다. 탐험하기 쉽지 않은 날씨다. 귀찮음에 변명거리를 늘려가고 있는 중이다. 부정적인 결론으로 추가 기울어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탐험할 수 있는 곳이 있지 않을까 머리를 쥐어짜보니 ‘집’이 있었다. 너무나 일상적인 공간이지만 관점을 달리해 보면 집은 이야깃거리가 도시만큼 많을 수도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의 공간만큼 다채로운 곳이 또 있을까?

또 다른 탐험도 가능하다. 컴퓨터를 켜고 구글 지도를 펼쳐 시칠리아 골목의 거리 뷰를 따라가며 탐험을 할 수도 있다. 영상 자료가 없어 더 이상 볼 수 없는 길도 있지만 직접 걷지 않고 가상으로 도시를 답사하는 방식에는 또 다른 매력이 있다. 지도를 자세히 관찰하며 거리의 풍경을 비교해 볼 수 있어 지형이나 길의 형태를 잘 파악할 수 있다. 도시 전체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나는 여행의 욕구가 차오르면 언제든 구글 지도를 켜고 탐험을 떠난다. 그 어느 때보다 상상력이 풍부해진다. 완벽하지 않고 비어있다는 것은 그만큼 상상할 여지가 많다는 이야기니까. 방구석에 앉아 떠나는 탐험이다.


다시 또 다른 날. 오늘은 시작 전부터 ‘냄새’라는 주제를 탐험 대상으로 정했다. 노트 위에 냄새로 연상되는 단어들을 나열해 보았다.

빵 집, 풀 냄새, 물 비린내, 하수구 냄새, 꽃 향기, 흙냄새, 고무 냄새, 타는 냄새, 카페, 음식점 뒷골목……

일단 이 정도면 충분하다. 밖으로 나가 내 후각에 의지해 냄새를 따라서 탐험을 해 나갈 것이다.

냄새는 특별한 시간과 장소를 연상하게 할 만큼 강력한 힘을 갖고 있다. 눈에 보이지 않아 실체를 알 수 없지만 도시 속 어느 장소에서나 냄새는 존재한다.

보이는 세계만큼 매력적인 보이지 않는 세계의 탐험.
떠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건축 경력만큼 탐험을 시작한 지도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러는 동안 탐험의 방식은 달라져 갔다. 관점을 새롭게 하기 위해 방식에 변화를 시도했던 과정이 지금의 나의 모습으로 귀결되었던 것 같다. 다양한 시도 끝에 만들어진 방식과 관점을 담아 장소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어나갔다.

장소를 이동해 가며 달라지는 풍경과 우연히 마주치게 되는 사건들 속에서 뭔가를 발견하고자 하는 영화일지도 모르겠다. 마치 로드무비를 찍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 들 수도 있겠다. 잘 짜인 플롯이 아닌 손의 떨림, 마음의 수런거림, 생각의 파편들까지 전달되는 하나의 다큐일 수도 있다. 그것도 아니면 장소에 대한 아주 사적인 일기가 될 수도 있겠다.


머리와 마음속에서 시작된 생각이 말로 내뱉어지고 글로 쓰여 공간 속에 표류하기 시작하면 더 이상 이전과 같지 않게 된다. 이미 과거의 말과 글이 된다. 공기 중에 희석되다가 어딘가로 가버릴 수도 있지만 종이 위에, 스마트폰의 화면 위에 그리고 말과 글을 받은 사람의 가슴과 머릿속에 안착하게 된다.

사람의 몸을 공간이라 생각해 보면 ‘나의 공간’ 속에 있던 생각이 말과 글의 형태로 종이와 스마트폰 화면으로 이동해 ‘누군가의 공간’에 다다라 머무르게 되는 것이다. 참 신기하고 재미있는 일이다. 그 일을 지금 시작해 보려는 것이다.


첫 발자국을 내딛는다.

장소 위에 표표히 떠다니는 이야기들을 낚아

나에게, 누군가에게 전한다.


두 번째 발자국을 내딛는다.

씨앗은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머리와 마음속에 심어두었던 씨앗들을 발화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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